소설리스트

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78화 (78/160)

78화. 되는 장사

“라엘, 그땐 진짜 못됐는데. 속아서 계약했구나 했지, 내가.”

지금은 혹여나 자신이 잘못될까 노심초사하며 손으로 꽁꽁 언 제 손을 녹여 주고 있다.

“말하다 보니 생각나네. 이름 부르는 것, 처음에 눈치 보였는데. 그때 정말 괜찮았던 것 맞아요?”

“라엘이라고 부를게요.”

“어디서 들었습니까.”

“뭐, 뭐를요?”

“그 호칭.”

어린 시절 모친이 부르던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그 위로 레이의 따뜻한 음성이 덧씌워졌다. 별것 아니었던 아명은 이제 더 이상 아명이라 부를 수도 없게 레이 전용이 되어 버렸다.

“사실 라엘은 내 아명이었어요.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단둘이 있을 때 불러 주던 이름이었죠.”

어느 정도 손이 녹았는지 손가락에 저릿한 느낌이 났다. 그와 동시에 라미엘이 덤덤히 말하는 내용에 마음도 저릿했다.

“귀한 추억이었네요. 안 괜찮은 거였네.”

그의 모친은 루이반에서 라미엘이 유일하게 마음을 둘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불쑥 외부인의 입에서 나온 아명에 그런 반응을 했던 거겠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그 이름을 듣고 놀랐던 것뿐이에요.”

라미엘이 레이의 손을 끌어당겨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췄다.

“레이가 불러 주니 좋네요.”

그가 레이의 손을 끌어당긴 순간 멀리 서 있던 기사들은 짠 것처럼 바로 뒤를 돌았다. 눈치 백단의 기사들은 이대로 그냥 사라져 버릴까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저 생물, 레이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아…….”

한국 이야기는 극비였다. 레이에게 함구 마법을 걸지 않은 건 그녀가 어디 가서 말을 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으로 헤덴이 호의를 베푼 것이다.

그 믿음을 저버려선 안 된다. 레이 역시 아무리 라미엘이라 해도 섣불리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오래전에 친구 책에서 본 적이 있어요.”

다른 대륙에서 온 사람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를 계기로 접해 본 적이 있다고 둘러댔다. 대륙 간 무역은 행해져도 인적 자원이 원활하게 교류되고 있는 편은 아니었기에 이런 핑계를 댈 수 있었다.

타 대륙으로 가는 길은 워낙 멀고 험해서 보통은 황실의 주도하에 무역선이 왕래했다. 상단끼리 거래를 해도 커다란 무역선을 여러 대 보내기 위해서는 황실의 힘이 필요했다.

황실의 지휘 아래 상단들이 일종의 협회를 만들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상업적 무역 이외에도 지금의 황제가 즉위했을 때, 레프저 대륙의 황제가 축하 문서와 사절단을 보내는 등의 친화 교류도 있고, 3년에서 5년에 한 번 정도 물류 교환도 했다.

대륙에서 가장 크고 튼튼한 선박에 각 대륙의 특산품을 서로 교환하는 행사였다. 이때 특산품 운송을 맡은 대륙 사신들은 두 달에서 길게는 세 달 정도 국빈 대접을 받고 돌아간다.

이 시기에나 인적 자원이 활발하게 오고 가게 된다. 대륙을 대표하는 사신들은 각 분야에서 뛰어난 인재들만 뽑아서 보내기 때문이다. 현재 리담에 ‘언니’, ‘누나’, ‘형’ 같은 말이 존재하는 것도 호칭이 다양한 레프저 대륙의 영향이었다.

다만, 리담에서 레프저 대륙으로 가려면 험한 바닷길로 이동해야 했다. 레프저 대륙으로 연결되는 곳은 크고 높은 험한 산맥으로 막혀 있기에 육로를 통한 교류가 어려웠다.

하여 황실의 최대 목표는 육로 개척이었다. 이는 레프저 황실도 마찬가지였다.

육로만 개척된다면 각국의 물자, 자원을 빠르고 저렴한 비용으로 운송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대륙 간 육로를 통한 물자 교류는 서로의 염원이었다.

오랜 옛날처럼 마력이 넘쳐나던 시절이라면 가능했을지 모르겠으나, 현 마력으로 대륙을 넘나드는 장거리 게이트는 열 수 없었다.

“혹시 레이가 종종 말하던 친구가…….”

“네. 맞아요.”

한국을 타 대륙으로 둔갑시켜 버리고 레이는 다시 킹크랩에 시선을 주었다.

리담에서 처음 발견되었고 아직 수가 파악되지 않았지만 제법 많은 마릿수가 예상되는 상황이다.

‘이거 무조건 되는 장사다!’

루이즈에 온 건 하늘이 준 기회였다. 레이의 심장이 두근두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황실에서 사자가 오면 빨리 전매권 신청을 해야겠는데.’

전매권은 특정 상품에 대한 특허로, 신청한 자만이 독점적으로 해당 상품을 판매할 수 있다는 자격을 가지는 권리를 말했다.

당연히 시장과 제국민의 생활 안정을 위해 생필품이나 식료품 계열은 어지간해서 허가가 나지 않았다. 보통은 사치품이나, 전문가가 아닌 이가 뛰어들었을 때 피해를 많이 보는 종류의 사업들이 권리를 인정받았다.

킹크랩은 식료품이기는 하지만 필수적으로 꼭 먹어야 하는 식재료는 아니었기에 전매권을 노려 볼 수 있는 분야였다. 레이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황실에서 보낸 사자가 곧 온다고 했지?’

심지어 이 생물이 어떤 것인지 아직 그 누구도 파악을 못 하고 있으니 직접 나서서 처리한다고 하면 황실이 거절할 리 없을 것이다.

“라엘.”

무슨 말을 하려고 공작 부인께서 이리 진지한 얼굴을 하시는지.

“네.”

“……저기 음, 내 계약 완수금, 조금만 빨리 주면 안 돼요?”

지금 수중에 있는 금액은 사냥제 상금뿐이었다. 하지만 1라블은 킹크랩 상업화에 턱도 없는 금액이었다. 하물며 전매권을 따낼 금액조차도 되지 않았다.

들어올 돈은 완수금뿐인데 아직 완료 기간이 남은 상태에서 선불로 달라고 하니 조금 민망하긴 했다. 라미엘과 서로 마음을 내보이긴 했어도 계약과 마음은 별개의 것이다. 제 몫을 챙기는 게 맞았다.

“라엘을 떠나려고 하는 거 절대 아니에요! 내가 지금 엄청난 일을 하려고 하는데 자금이 조금 필요해서요.”

레이는 필사적으로 결코 계약을 파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어필했다.

“레이, 완수금은 그 날짜가 되면 줄 거예요.”

라미엘의 말에 레이의 입이 다물렸다.

사람 마음은 바뀔 수 있다. 지금이야 당장 좋아 죽겠다고 하지만 미래의 감정까진 예측할 수 없다. 계약 때문에라도 곁에 붙어 있게 하려면 완수금은 라미엘이 쥐고 있어야 하는 게 맞는 일일 터였다.

말 그대로 ‘완수’금이다. 모든 것이 완전히 끝이 났을 때에나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알겠어요.”

라미엘의 거절은 씁쓸하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아버지라도 찾아가 볼까. 이거 정말 되는 일인데. 이대로 손 놓기 아까워.’

레이가 돈 나올 구멍을 찾아 머리를 데굴데굴 굴리는데 라미엘이 이어 말했다.

“돈이 필요하면 얼마가 되든지 그냥 달라고 해요.”

“르아넬로에, 예?”

“완수금 쓸 필요 없어요. 레이는 필요하면 명령만 하면 됩니다.”

“그게 무슨, 무슨 말이에요.”

“공작 부인으로 생활하는 데 필요한 건 루이반에서 제공한다고 했잖아요.”

“어, 그렇긴 한데. 솔직히 말하면 이건 공작 부인과는 관련이 없는 일이라…….”

라미엘이 레이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말해요.”

“……라엘.”

“레이가 필요한 것, 원하는 것 전부 해 줄 수 있으니 당신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내게 말만 하면 돼요.”

전에 라미엘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저런 서늘한 사람이 제대로 한 번 빠지면 앞뒤 구별도 안 하고 물고 빨고 하겠다고.

“내가 마력석 광산이 갖고 싶다고 하면 어쩌려고요.”

“루이반에 많아요. 레이에게 몇 개쯤 준다고 별일 없습니다.”

그 말에 레이의 마음이 간질간질하니 뜨끈해졌다.

제가 원하는 걸 모두 준다고 해서가 아니었다. 정말 예상치도 못하게 자신이 라미엘의 메마른 애정을 촉촉하게 만들었다는 놀라움 때문이었다.

“큰일 날 남자네.”

레이의 말에 라미엘이 피식 웃는다.

“그러게요.”

“내가 사기꾼이나 세상 못된 사람이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이에요. 고맙죠?”

“고맙네요.”

아마 레이가 그런 사람이었어도 상관이 없었을 것 같지만, 라미엘은 고분고분 대답을 했다.

“그런데 부인께선 뭘 하고 싶어서?”

이번엔 레이가 웃음이 나왔다.

“라엘, 순서가 바뀐 것 같지 않아요? 그걸 먼저 묻고 돈을 나중에 줘야죠.”

“레이는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말했잖아요. 당신은 내게 뭐든 요구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레이가 위험하고 허튼 일을 할 것이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눈빛 반짝이며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에서 악하고 어두운 느낌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위험하고 허튼짓을 하면 또 어떤가. 레이가 해 보겠다는데.

특이 생물을 보고 말한 거니 레이가 뭘 원하는지는 훤히 보였다. 이걸 어떻게 할지 벌써부터 궁금하고 기대가 된다.

레이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위험한 거 할 건데. 마력석 폭탄 사업 해서 뒷거래로 암흑 용병단한테 거액에 팔 거예요.”

“금방 부자 되겠네요.”

뭘 해도 다 받아 주네.

“그럼요. 마린의 거미줄 다섯 개씩 살 수 있을걸요.”

사람들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종종 영양가 없고 쓸모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었다. 좋은 분위기를 만들 필요가 없을 때에 실없는 소리를 하는 건 불필요한 일에 에너지를 쏟는 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레이와 이런 잡담을 나누고 있는 지금이 즐거웠다.

라미엘은 지금 또 다른,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도 또 그의 마음에 레이가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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