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전매권
라미엘 근처의 허공이 검게 물들고 있었다. 타원 형태로 그림자 같은 어둠이 점차 선명해졌다.
게이트가 열리고 있다.
황실에서 보낸 사자가 지금 도착하는 듯했다.
게이트에서 세 사람이 모습을 보였다. 태자와 그의 수호 기사, 특이 생물 담당자였다.
검은 바지에 흰 셔츠를 입고 방한 마법이 이중으로 걸린 망토를 걸친 채 게이트에서 등장한 태자는 손을 꼭 잡고 있는 부부를 보며 활짝 웃었다.
“공, 오랜만이야. 여전히 사이가 좋아 보이는군.”
예상 못 한 태자의 등장에 공작 부부와 휘하의 기사들은 모두 급히 예를 취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멀리서 있던 인부들도 태자라는 말에 술렁이며 급히 고개를 숙였다.
황실을 제외한 공간에서, 특히나 수도를 벗어나서 황족을 만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들은 지금 평생에 한 번 생길까 말까 한 일을 겪는 중인 것이다.
“고개 들게.”
태자의 명에 라미엘과 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 뒤로 기사들이 몸을 일으키면서 태자의 수호 기사와 함께 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구도로 자리 배치를 바꿔 섰다.
“어찌 여기까지 직접 행차하셨습니까.”
라미엘의 말에 태자의 표정이 설핏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
“잠시 바깥 공기 좀…….”
태자의 눈 밑에 검은 그림자가 선명했다.
나날이 악화되는 황제의 병세로 태자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태자비 역시도 웬만한 일정은 전부 취소하고 내부 업무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황제의 상태는 국가 경쟁력과도 같은지라 고도의 극비 사항이었다. 하지만 태자 부부가 기도식조차 참석 못 한 것으로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로 황제의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흐레째 집무실 밖을 못 나가고 있으니 르누아가 잠시라도 다녀오라고 하더군.”
“태자비 전하께선 무탈하신지요.”
레이가 꺼낸 태자비 이야기에 파르베제의 얼굴에 웃음이 퍼졌다. 일부러 지으려는 표정이 아니라 저도 모르게 활짝 피어나는 미소였다.
“몹시 무탈하네.”
무언가가 있어 보이지만 태자는 더 이상 별말 없이 싱글거리기만 했다.
“자, 그래서 그 문제의 생물은 어디 있지?”
“이쪽입니다.”
태자와 황실의 생물 관리 담당자 멧시가 킹크랩에 가까이 다가갔다.
“물에서 나오지 못 하는 무해한 생물입니다. 게와 같아서 집게가 위험하긴 하지만 일부러 만지지 않는 한 먼저 공격을 하진 않습니다.”
라미엘이 설명을 마치자 멧시가 한 마리를 잡아 투명한 상자에 담았다.
“호오. 정말 게같이 생겼군. 누가 먼저 발견했지?”
“저, 접니다.”
높으신 분들이 줄줄이 있는 중이라 잔뜩 긴장한 어부가 쭈뼛거리며 태자의 질문에 대답했다.
멧시가 작은 주머니에 넣어 온 마력석들을 꺼내 투명 상자에 넣으며 물었다.
“어떻게 발견했지?”
멧시가 입고 있는 두터운 로브에 황실 문장이 없었다면 아마 마법사로 오해를 받을 수 있을 듯한 광경이었다.
“저희가 생선을 잡으려고 지난주에 설치한 그물망을 수거해 올리는데 그물 절반이 넘게 처음 보는 괴상한 생물들이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흐음. 갑자기 생겨난 건 아닌 거군.”
상자에 넣어진 마력석은 아무런 변화 없이 잠잠했다.
“혹시 이 생물 말고 원래 우리가 아는 게가 있는가?”
“예, 저쪽 그물에 아마 몇 마리 있을 겁니다.”
“그걸 한 마리 가져와 보게.”
멧시의 명령에 남자가 쏜살같이 달려가 꽃게 한 마리를 그물에서 찾아내 가지고 왔다.
“그걸 이쪽으로.”
남자가 멧시의 명령대로 투명 상자에 게를 넣었다.
보통의 게가 한 마리 들어가자 마력석 세 개 중 노란 것 한 가지만 색이 진해진 것 말고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전하, 게가 맞습니다.”
마력석에 조금도 변화가 없는 것을 확인한 멧시가 약식 보고를 올렸다.
“차후 제대로 연구를 해 봐야겠지만 게가 확실합니다.”
“전례 없던 게가 나타난 거군.”
마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미 뭐가 됐든 안심인 상황이었다. 게의 종류가 한 가지 더 늘어난다고 큰일은 없을 것이다.
리담에서는 게를 즐겨 먹거나 자주 먹지 않기에 태자는 새로운 게가 나왔어도 그게 리담인의 생활에 그리 큰 영향을 주리라 생각하진 못했다.
멧시나 라미엘, 심지어 게를 잡아 파는 어부들조차도 그리 생각했다. 주된 식재료는 아닌 것들이기에 새로이 나타나 봤자 모두의 흥미를 끌지 못한 것이다.
“위험은 없으니 일단은 저것들을 풀어 둬도 될 것 같은가?”
“그건 어렵습니다. 일단 최소 하루 정도는 더 지켜봐야 합니다, 전하.”
아무리 별 흥미가 안 생기는 종류이고 위험성이 없다고 나왔어도 일단 신종 생물이 발견되었으니 연구 자료를 만들어 두긴 해야 했다.
멧시는 일단 며칠 정도만 짧게 루이즈에 머물며 신종 게의 생태를 살핀 뒤 몇 마리를 가져가 황실에서 나머지 연구를 할 계획이었다.
신종 생물이 등장했다기에 기대를 많이 하고 왔으나 평범한 게와 크기와 생김새만 약간 다를 뿐 차이를 감별하는 마력석이 변화하지 않는 것을 보고 조금 맥이 빠진 상태였다.
색이 바뀌어야 기존의 게와 차이가 있다는 것인데 마력석이 진해졌다는 건 추가된 생물과 약간의 성질은 다를 수 있겠지만 거의 차이가 없는 같은 계열이란 이야기였다.
“저,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그때 레이가 조심스레 대화에 끼어들었다.
루이반 공작 부인의 조건은 간단했다.
신종 게에 대한 조사부터 처리까지 루이반이 도맡을 테니 대신 이 게의 전매권을 갖겠다는 것.
“루이반에서 일어난 일이니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연구 자료를 만들기 위해선 게의 생태를 확인하고 그 특성을 정확히 알아야 했다. 루이즈에 머물면서 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루이반이 대신 나서서 이 작업은 물론 처리까지 한다니 황실에서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게’라고 확실히 판명된 생물이었다. 비인기 종목이니 전매권을 가져가도 괜찮을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 이걸 비싼 값의 전매권까지 신청해 가면서 얻어 내려고 하는가?”
그것도 공작이 아닌 공작 부인이 먼저 나서서 전매권을 요청하고 있었다.
“기존에 있던 종류와 크게 차이가 없는 생물이지 않습니까. 굳이 황실의 귀한 인재가 저걸 연구하고 처리하느라 인력을 낭비하느니, 어차피 여기 있는 제가 담당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부인이?”
“네. 전하께오서도 아시다시피 공작이 워낙 바쁜 시기이니 제가 맡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리 말씀드렸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루이반 공작은 지금 태자에게 보고를 올리러 황실로 와 있어야 했다. 그리고 작년의 모든 정산을 정리하는 시기이니 한창 귀족들이 정신이 없을 때이기도 했다.
“음, 맞는 말이지. 그런데 부인이 굳이 전매권을 가져갈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전매권을 얻어 전담을 하면 다른 지역에 이 게가 출몰을 해도 제가, 루이반이 바로 나서서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태자는 막힘없이 술술 대답하는 레이를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상인 집안의 딸이라서 그런가, 그녀가 말하는 것은 모두 다 맞는 말이었다. 바쁜 황실을 배려하면서 루이반이라는 자신의 입지를 정확하게 이용하는 점이 놀라웠다.
생물은 한곳에만 출몰하지 않는다. 다른 지역에 나타난다면 재빠르게 그곳으로 가서 수습을 해야 하는데 ‘빠른 이동과 수습’은 결국 돈과 직결되는 이야기였다. 돈과 권력에 있어 황실도 두렵지 않은 가문이 루이반 아닌가.
라미엘이 마냥 생뚱맞은 사람을 자기 반려로 삼은 게 아닌 듯했다.
‘마녀라고 소문난 사람의 본질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건가.’
짐승들만 상대해 온 남자인 줄 알았는데 사람 보는 눈도 제법 있었던 모양이다.
“멧시, 이대로 진행해도 되겠는가.”
“예, 전하. 약식으로 추가 검사를 진행해 봤으나 별다른 큰 특징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럼 공작 부인 말대로 진행하도록 하지.”
“하해와 같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그 후, 태자는 라미엘의 어깨를 툭툭 쳐 주고는 게이트를 통해 다시 황실로 돌아갔다.
***
“에고고고.”
침대에 누운 레이가 낑낑거리자 라미엘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가 뻐근해하는 부분을 가볍게 마사지했다.
“싹싹하게 잘하는 것 같더니. 이 정도였습니까.”
태자 앞에서 잘도 협상을 해서 전매권을 따내는가 했더니 레이는 태자가 사라지자마자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죽는 줄 알았네.”
“레이? 괜찮아요?”
“말하는데 심장 터지는 줄 알았어요. 너무 떨렸어.”
태자가 올 줄 그 누가 알았던가. 황실 사자한테 전매권을 신청할 줄 알았는데 태자한테 직접, 바로 승인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전매권을 떠올렸을 때,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이유를 대야겠다고 대본을 대강 짜 두어서 다행이었다. 몸은 얼었지만 입은 살아 대본을 나불나불 잘도 읊었다.
태자가 떠나고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렸을 때, 그때야 알았다. 태자를 상대로 그야말로 혀를 잘도 놀렸다는 것을.
황실의 귀한 인력 낭비, 루이반의 처리는 무슨. 되는 장사라는 걸 알았기에 심장을 걸고 덤벼든 것이었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흐르는 르아넬로의 진한 피를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레이는 라미엘에게 안겨서 루이반 별장으로 왔고 단박에 침대로 직행했다.
“난 내가 말을 그렇게 잘하는지 오늘 처음 알았어요.”
“나도 레이의 말발에 놀랐습니다.”
레이는 이미 저 게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모른 척 태자 앞에서 시치미를 떼고 황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전매권을 따냈다.
멧시가 평범한 게라는 걸 알아차리고 귀찮은 기색을 아주 잠시 보였을 뿐이었다.
“내가 정말 대단한 사람하고 결혼한 거였군요.”
“후후. 그렇죠? 라엘, 황실에 갈 때 우리 같이 가겠어요.”
황실에는 약식의 연례 보고서를 올려 둔 상태라서 급하게 바로 찾아갈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부부는 신종 게 보고서가 작성되면 그때 함께 황실로 찾아가 라미엘은 연초 보고를, 레이는 전매권 승인에 최종 사인을 받을 예정이었다.
최소 엿새를 잡아 뒀던 일정이었는데 보고서가 하나 추가되면서 좀 더 체류 기간이 길어지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푸엥 데려올걸.”
“푸엥은 왜 안 데려왔어요?”
“어떤 생물인지 모르니까 혹시나 우리 푸엥 위험할까 봐 못 데려왔어요. 아, 라엘도 이런 마음으로 나더러 오지 말라고 한 거군요.”
이제야 극구 말리던 라미엘의 심정이 십분 이해가 된다.
“라비던으로 돌아가면 푸엥한테 받혀서 코피 안 나게 조심해요.”
라미엘의 말에 레이는 양손으로 조심히 자신의 코를 가렸다.
푸엥을 사랑하지만 그 환영 공격은 너그럽게 포용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