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임시 보호
“없다. 없어!”
레이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한국에서 유주와 함께 술 먹고 추던 춤을 덩실덩실 췄다. 양손을 들고 엉덩이를 씰룩이며 덩실거리는 모양새로 유주는 이것을 ‘기쁨과 환희의 춤’이라 명명했었다.
타 대륙에서도 킹크랩의 흔적은 미미했다. 특이한 대게가 있었으나 상품화 전에 사라져 이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자료가 전부였다.
특이한 대게라니. 이 말은 대게는 있으나 킹크랩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자료대로라면 킹크랩은 리담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해양 생물체였다.
“후후후.”
올해만 잠깐 등장한 건 아니겠지. 한 번 이쪽에 터를 잡았으니 앞으로도 쭉 오게 될 것이리라.
레이가 마지막 자료를 정리했다.
“푸둥아, 난 이제 부자야.”
“뀨?”
그녀는 품 안의 푸둥을 꽉 껴안고 머리를 마구 부비부비 해 줬다.
헤덴에게 받은 목걸이를 이용해 신전에 온 레이는 다시 한번 머리카락을 빗고 나서 연구실을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킹크랩 조사를 위해 대신전 자료실에 와 있었다. 라미엘이 꽤나 쏠쏠한 기부금을 낸 모양인지 고급 논문실 관리자가 알은체를 하며 먼저 인사를 해서 놀랐다.
생물 분야라면 대신전에도 황실을 능가할 방대한 자료가 있을 터이니 이걸 잘 이용해야 했다.
닷새째 대신전 도서관과 자료실에 출퇴근을 한 결과, 레이는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고 황실에 올릴 보고서 초안을 완성할 수 있었다.
도서관만 왔다 갔다 한 건 아니었다. 라미엘과 함께 루이즈의 어부들을 만나 양식장이 될 만한 커다란 그물 제작을 논의하며 킹크랩을 가둬 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애썼다.
바쁘게 오전 시간을 보내며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다시 바다로 나가 현장 작업을 한 뒤 라미엘은 나머지 작업 감독을, 레이는 대신전으로 와서 보고서 작성을 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작업이 될 듯한 날이었다.
“정말 괜찮겠냐.”
“네. 괜찮아요. 머리는 또 자라는걸요.”
레이가 목걸이를 이용해 대신전으로 오면 헤덴이 게이트를 열어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 주곤 했다.
그래서 아예 레이가 앞으로 계속 대신전을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도록 헤덴은 레이의 목걸이에 좌표 하나를 더 심어 주기로 했다.
자그마한 목걸이에 마력과 성력을 심어 넣는 건 본디 섬세한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다. 추가로 좌표를 하나 넣는 건 보통의 마법사라면 며칠은 걸리는 대작업이었다.
헤덴이 간단하게 하니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일임을 알기에 레이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제 머리카락을 내어주기로 했다.
연구원들은 공작 부인의 비단 같은 머리카락을 뎅겅 잘라 내게 되어 아주 많이 미안해하면서도 환호했고, 헤덴은 좀 더 강력한 마력을 넣어 게이트를 열 수 있는 횟수를 더 늘려 주었다.
어깨 위로 올라오는 머리 길이는 어린 시절 이후 처음이었다. 머리카락이 무거운 줄도 몰랐는데 자르고 나니 한결 가벼웠다.
“온 김에 네가 의뢰한 마력석이나 보고 가라. 4연구부에 있단다.”
“네, 감사합니다. 예하. 그럼 다음에 또 봬요!”
레이는 푸둥을 안고 발랄한 걸음으로 헤덴이 말한 연구실로 향했다.
공작 부인이 연구를 위해 머리카락을 기증했다는 소식에 대신전 신관들은 레이가 짧아진 머리를 살랑이며 지나갈 때마다 감격한 얼굴을 했다.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아마 루이반이 막대한 기부금을 내지 않았더라도 레이의 부탁에 고급 논문실 서고 문을 활짝 열어 줬을 것이다.
“너무 신기하네요.”
“네. 저희도 연구하면서 놀랐습니다. 정말 빈 마력석이었던 게 맞나요?”
레이가 분석을 부탁한 녹색 마력석은 기존의 붉은빛 마력석과 차이가 없었다. 발광 색깔만 다르지 기능도 쓰임도 똑같았다. 일부를 떼어 내 가공 실험을 해 봤는데 역시나 여느 마력석과 같았다. 마력이 다하면 빛이 옅어지는 것까지도 똑같았다.
이런저런 실험으로 현재 처음의 진초록빛에서 연둣빛이 되었고, 이는 곧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빛이 다하면 다른 빈 마력석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 분석하는 연구만 남는다. 그러니 최대한 이 빛이 사라지기 전에 결과를 내야 했다.
“네. 우리 집안, 아니 제 골칫거리예요.”
아마 지금쯤 피뢰침도 없는 그 빈 마력석 땅은 수십 차례의 낙뢰로 새카만 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특수 제작 피뢰침이 레이가 알던 것보다 훨씬 비싸서 차마 다시 구매할 엄두가 나지 않아 내버려 두었는데, 라미엘이 선뜻 돈을 쓰라고 할 줄 알았으면 진작 다시 달았을 것이다.
지금 황실에 요청해 다시 피뢰침을 만든다고 해도 몇 주는 걸릴 테니 일단 마력석의 결과를 보고 생각해야 할 일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추가 연구는 계속해 볼 것이니 너무 심려치 마세요.”
“걱정 안 해요. 신관께서 어련히 알아서 잘해 주시겠죠.”
레이의 말에 신관이 감동받은 얼굴을 했다.
고위 귀족을 떨떠름해하는 신관들이 적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거만함과 선민사상 때문이었다.
자주 만날 일은 없어도 레이처럼 일을 의뢰하는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기도식 때문에 1년에 한 번은 꼭 마주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딱히 좋은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루이반 공작 부인은 연구 협조도 역대 최고로 잘한다고 신전 내 소문이 자자했고 친절의 극치라 했다. 오늘 짧아진 머리를 보니 그 소문이 사실이었으며 직접 만나 이야기해 보니 더더욱 확실한 사실이란 게 증명되었다.
“믿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 혹시 이 빈 마력석에 이상 현상이 나타났을 때 다른 일은 없으셨나요?”
워크산 연구가 주력인 신관들도 레이가 준 마력석 같은 경우와 비슷한 에너지는 모른다고 했다.
미지의 영역인 산꼭대기 부분도 아니고 거대한 산의 거의 초입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발생할 만한 일이라니. 그들이 연구해 온 내용 중에는 없었기에 에너지 관련으로 접근하기에는 막막했다.
그러나 짧은 머리의 공작 부인을 보고 있자니 반드시 대단한 성과를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언가 작은 단서라도 하나 잡아야 했다.
“으음. 특별한 게 없었는데. 비가 많이 왔었고 번개가 쳤던 거? 아, 곰이 있었어요. 곰이 죽고 나서 발견했는데.”
레이는 곰이 죽던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곰이 죽으면서……. 참, 이거 헤덴 예하께 말씀드렸던 건데, 이미 전해 들으셨겠구나. 어휴. 도움이 안 되죠?”
그때 헤덴이 담당 신관이 정해지면 레이가 말한 기록을 넘겨준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 말에 신관의 표정이 싸늘히 식었다.
‘예하, 까먹었구나.’
신관이 겨우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그런 작은 한마디도 연구에는 다 도움이 됩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큰 수확이 있는 건 아니어도 보통의 마력석과 같다는 걸 알았으니 나쁘진 않은 결과였다.
“동물부 연구 신관한테 사냥해도 되는 동물 있으면 보내라고 해야겠다.”
이후에 일어날 일을 생각해 보고 싶지 않은 연구 신관의 말을 들으며 레이는 목걸이를 손으로 누르고 마음속으로 게이트를 떠올렸다.
게이트를 여는 방법이었다.
“뀨뀨뀻!”
연구실 밖에서 오매불망 레이만 기다리던 푸둥이 그녀가 갈 준비를 하자마자 세상 떠나갈 듯 울기 시작했다.
이걸 누가 울프 드래곤으로 봐요. 우리 푸엥 격한 환영의 반대 버전을 보는 것 같구먼.
“또 올게. 우리 요즘에 매일 봤잖아.”
“뀨뀻!”
눈치도 빠르지. 이번에 가면 당분간 올 일이 없다는 걸 아는 모양이었다. 푸둥이 레이의 품으로 뛰어들어 와 옷자락을 꼭 물었다.
“아가 조련사야.”
“헉! 어우, 깜짝이야. 예하, 갑자기 나타나셔서 놀랐잖아요!”
헤덴이 빈 공간에서 불쑥 나타났다.
“데려가렴.”
“네?”
“울프 드래곤, 데려가라고. 네가 맡겠다고 하면 아무도 반대 못 할 거다.”
자기가 키우는 동물인 양 말도 걸어 주고 간식도 챙겨 주며 푸둥을 품에 안고 다니던 레이를 신관들은 닷새 내내 봐 왔다.
각인하고자 했다면 벌써 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누가 봐도 레이는 저 귀한 동물을 사심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자기 집 강아지 대하듯 하고 있었다.
“제발 데려가. 목걸이에 뭐 더 새겨 주랴?”
기도제가 끝나고 루이반 부부가 떠난 뒤 푸둥은 내내 울부짖으며 여기저기서 부부를 찾았다.
라비던과 베롬이 워낙 멀고 그 사이에 바다까지 있으니 어린 푸둥은 아직 찾아갈 힘이 없어 마냥 두 사람의 흔적만 찾아 헤매다 하루를 끝내곤 했다.
물론 그때마다 토마의 속도 새카맣게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푸둥은 탈출의 달인, 아니 달용이 되어 헤덴의 케이지를 나가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툭하면 탈출하는 어린 짐승을 찾아다니느라 토마는 신경쇠약 직전이었다.
“완전히 맡는 게 불편하다면 후견인이 생기기 전까지 임시 보호하렴.”
헤덴은 레이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가끔 연구에 필요하면 대신전도 올 수 있으니 네가 제격 아니냐. 저놈은 이제 식사 정도는 알아서 잘하니까 괜찮아. 네가 데려간다면 그놈이 지금처럼 밥 먹으러 갈 수 있게 푸둥 전용의 워크산 게이트도 만들어 줄게. 아, 그래. 네 목걸이에 축복을 내려 주마.”
레이가 말을 할 틈도 없이 헤덴은 그녀의 목걸이에 축복을 꾹꾹 눌러 담아 넣어 준 뒤, 푸둥이 차고 있는 목걸이에도 무언가 주문을 걸고는 레이의 품에 안겼다.
축복이 대체 뭔지도 모르겠는데 물어보기도 전에 헤덴은 속 시원한 얼굴로 사라져 버렸다.
“……콱 각인해 버릴까 보다.”
아마 레이가 각인해도 헤덴은 콧방귀도 안 뀔 것 같지만.
“어휴. 뭘 어찌할 수도 없네. 너 얌전히 잘 있을 수 있지?”
레이의 말에 푸둥이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귀를 쫑긋거리며 뀨뀨, 하고 가르랑거렸다. 기분이 좋다는 신호였다.
“흐음. 이제 가 볼까.”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오, 정말이네. 도착.”
순식간에 도착한 곳은 라미엘의 집무실이었다.
매번 헤덴이 레이가 보내 달라는 곳으로 게이트를 열어 줬던지라 라미엘은 불쑥 나타난 레이를 보고도 놀라지 않고 반겼다.
“오늘 일정은 잘……. 레이, 머리가?”
“매번 왔다 갔다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냥 거기에 남기고 왔어요.”
어깨 위에서 달랑거리는 레이의 머리카락을 라미엘이 손가락으로 쓸어 보았다.
“이렇게 짧은 거 아주 어릴 때 이후 오랜만인데 가뿐해서 좋네요.”
“레이하고 잘 어울려요.”
라미엘의 칭찬에 레이가 배시시 웃었다.
“대신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 짐승은 왜 여기 있는 건지?”
짧아진 머리야 그렇다 치고 푸둥은 왜 레이의 품에 있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후견인은 아니고 후견인이 나타날 때까지 임시 보호하기로 했어요. 얘가 너무 나한테서 안 떨어지려고 해서.”
“신관들이 그 문제로 혹시 레이에게 무슨 소릴 했다거나…….”
“다들 환영했어요. 저라면 괜찮을 것 같다던데요?”
보는 눈들은 있는 것 같은데 어쩌자고 이걸 레이에게 덥석 맡겨 버린 건지. 결국 헤덴은 귀찮은 짐을 다시 원주인에게로 돌려보낸 셈이다.
“대신 예하께서 게이트 무제한 이용을 약속하셨어요.”
헤덴이 죽기 직전까진 얼마든지 사용이 가능할 것이다.
“좌표도 하나 더 찍어 주셨고요.”
“돈 주고도 못 살 것과 임시 보호를 맞교환하고 왔군요.”
“네. 그렇긴 하죠. 정확해요.”
헤덴이 만들어 준 게이트라니.
게이트를 이용하려면 황실에 적합한 이유를 상세히 알리고 요청 신청을 한 뒤 심사를 기다리고 값비싼 비용까지 지불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이용 허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이런 상황에 대신관이 직접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게이트 이용 허락을 내렸다니.
황실이 이걸 문제 삼을 리도 없었다. 대신전과 황실은 동등하되 서로 다른 위치에 있었다. 상대의 영역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심지어 대신전의 이름도 아닌 헤덴의 개인 행위니 당연히 괜찮은 일이다. 귀찮은 짐이 생겼지만 얻은 게 컸다.
“그럼 레이는 이제 저택으로도 편히 갈 수 있겠네요.”
루이즈에서 저택으로 돌아갈 때 기차를 타고 또 마차를 탈 필요도 없이 레이는 잠깐이면 바로 도착할 수 있다.
“내 좌표, 저택 아니에요.”
“루이반 저택으로 하면 되는 게냐?”
“아뇨. 거기 말고…….”
“라엘, 당신이에요.”
라미엘이 없는 루이반 저택에 있어 봤자다.
레이에게 루이반은 라미엘이고, 라미엘의 곁이 제가 있어야 할 곳이었다. 좌표를 설정하는 데 망설이지도 않았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레이의 말에 라미엘은 속이 뜨거워졌다.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당신을 믿는다고 그 어떤 말보다 더 확실하게 알리고 있는 레이를 라미엘은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