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리본 바다 축제 (1)
레이가 황실로 올리는 보고서는 라미엘이 감수를 했다.
“이 정도면 됐습니다. 완벽해요.”
“휴.”
레이가 보고서 마지막 장에 서명을 했다. 이로써 루이즈에서의 모든 일이 끝났다.
공작령 바다 한가운데 엄청나게 커다란 어망을 치고 인근에 보이는 킹크랩을 가뒀다. 리담의 모든 자연물은 황실 소유라서 전매권을 받기 전까지 절대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일단의 조치만 해 둔 것이다.
레이가 킹크랩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어 처리 시간이 많이 단축된 덕분에 계획됐던 것보다 일찍 끝이 났다.
“그런데 레이, 그 게 이름은 어떻게 할 건가요?”
보고서에 계속 ‘신종 게’라고 말할 수는 없고, 전매권도 신청하니 특정할 수 있는 이름을 붙여야 했다. 그런데 레이는 이름에 대한 고민을 이미 끝낸 듯 바로 대답했다.
“이 게의 이름은 킹크랩이에요.”
“킹크랩?”
“네. 타 대륙에서 그렇게 부른대요. 크랩은 게를 뜻하고 킹은 크다는 걸 의미해요.”
대신전에서 며칠 자료와 씨름하더니 저런 정보를 얻은 듯했다.
“큰 게라. 적합한 이름이군요.”
“그렇죠?”
이렇게 신종 생물은 ‘킹크랩’이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부여받아 보고서에 오르게 되었다.
“라엘, 많이 바빠요? 오늘 갈 거예요?”
추가 일정을 일주일로 계획했던 것에서 이틀 정도 시간 여유가 생겼다. 라미엘에게는 라비던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아직 남아 있지만 루이즈에서의 일은 모두 끝이었다.
“하루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돼요?”
푸엥 보고 싶다고 빨리 가자던 레이가 돌연 마음을 바꿨다. 아까 어부들과 잠시 대화를 하는 것 같더니 무언가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다.
“오늘부터 축제래요.”
보통 축제는 봄이나 가을에 열린다. 여름 축제도 있지만 대부분은 한창 날씨가 좋은 봄, 가을에 날짜를 잡았다.
하지만 루이즈는 독특하게도 한겨울 혹은 봄 시작 직전의 시기에 축제를 열었다. 날이 추울 때 더 많은 어종이 잡혀 활기를 띠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해산물로 유명한 도시다운 선택이었다.
“라엘, 우리 열심히 일했으니까 보상이 필요하지 않아요? 응?”
루이즈 전체에 묘하게 들뜬 분위기가 느껴진다 했더니 큰 행사가 있어 그랬던 모양이다.
“열차 취소할게요.”
“와아! 그럼 우리 얼른 축제 가요!”
레이가 신난 걸음으로 집무실을 뛰어나갔다.
***
축제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레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후와아.”
이런 축제는 처음이었다.
축제 장소 여기저기가 리본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앙상한 겨울나무는 초록빛 리본 끈으로 장식되어 풍성하고 반짝이는 이파리를 자랑했고 붉은색 리본을 동그랗게 뭉친 과실이 열려 있었다.
분홍색 나무도 있고 금색 나무도 있고 형형색색의 리본 나무들이 축제 인파를 맞이하고 있었다. 축제 행사장의 가판과 가게들에도 커다란 리본 장식이 달려 있었다.
“너무 예쁘다.”
축제 이름이 ‘리본 바다’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루이즈의 상징인 ‘바다’와 ‘리본’이 합쳐져 그리 불리는 것이었다.
매서운 바람이 한 번씩 불 때마다 수백의 리본이 살랑살랑 흔들리며 장관을 만들었다. 마력석이 없어도 충분히 화려하고 빛이 나는 광경이었다.
사람들은 추위에 옷자락을 꼭 쥐었으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수도 축제와 분위기도 달랐다. 루이즈 축제는 시선에서 자유로웠다. 수도에선 귀족들이 행차할 때마다 주위 시선을 한 몸에 받았는데 이곳은 달랐다. 모두가 평등한 축제의 일원이었다.
공작령이야 귀족 소유니 소속된 모든 사람들은 신분이 확실히 눈에 보이게 행동하지만 한 발자국만 벗어나도 이토록 달랐다.
레이와 라미엘에게 닿는 시선 역시 그저 미녀 미남 커플에게 잠시 머무는 것뿐, 뒤따라 이어지는 조심스러운 경외 같은 건 없었다.
“라엘, 난 발 딛자마자 느꼈어요.”
“뭐를요?”
“여기 오길 잘했다고요. 벌써부터 많이 즐겁네요. 부지런히 일해 두길 정말 잘했어.”
시간에 여유가 있다고 늑장 부렸다면 절대 오지 못했을 것이다. 리본 바다를 즐길 수 있는 건 부지런함과 성실의 대가였다.
레이가 맞잡은 손을 막 흔들어 댈 정도로 즐거워하자 라미엘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으흑.”
그의 미소에 지나가던 남자가 코피를 쏟는 작은 에피소드를 뒤로하고, 부부는 축제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춥다.”
아무리 꽁꽁 싸매고 왔어도 가려지지 않은 얼굴에 차가운 바람을 계속 맞고 있자니 한기가 들었다.
“돌아갈래요? 레이, 코가 빨간데.”
“싫어요. 한창 재밌는데 왜 돌아가요? 오늘 축제 끝내고 파장 기념으로 술 한잔할 때까지 안 갈 거예요.”
“레이가 지금까지 추위 핑계로 마신 술이 다섯 잔인데요.”
“추워서 마신 건 술이 아니라 보온용 옷 같은 거예요.”
라비던에서 미처 보지 못한 온갖 신기한 해산물이 잔뜩 있어서 새로운 것을 실컷 맛보고 있는 중이었다.
갓 잡아 온 해산물들이 어찌나 싱싱하고 맛있던지 술을 절로 부르고 있었다. 심지어 일부 구간에서는 한국처럼 날것으로 해산물을 먹어 볼 수 있었다.
라미엘과 기사들은 조리가 되지 않은 해산물을 먹는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으나 레이는 루이즈에 평생 살던 사람인 양 술술 잘도 먹었다.
“크. 너무 맛있다. 비리지도 않네?”
“루이즈 사람이에요? 억양 보니 수도 쪽인 줄 알았는데. 여기서 오래 산 어부들보다 잘 먹네.”
“이 맛있는 걸 어부들만 먹어요? 역시 전문가라 그런지 잘 아는군.”
“어허허허허! 이것도 좀 드셔 보세요. 입에 맞겠네.”
가게 주인이 내민 노르스름한 살점을 레이가 냉큼 받아먹었다.
“여기에 아까 마셨던 술 한잔 곁들이면 딱이겠는데. 방금 먹은 거 2인분 줘요. 술 가판 가서 먹을 거야.”
가게 주인이 레이의 먹스케줄을 듣고 존경의 눈빛을 담아 박수를 쳤다.
“라엘, 저기 뭐 있나 봐. 실내에서 하는 거 같은데 저기 잠깐 들어갔다가 나올래요?”
“가 보죠.”
실내 행사의 정체는 연극이었다.
입구에는 오늘 극에 출연하는 배우의 이름과 대략의 줄거리가 나와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배우진의 이름만 훑어보고는 입장료를 지불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추위를 잠시 피하고 몸을 녹이려고 했던 것이기에 줄거리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보기 시작한 연극이 어느덧 절정으로 치달았을 때.
“세상에!”
레이가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게 관람에 큰 방해가 되지는 못했다. 연극을 보는 관객들 역시도 레이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충격적인 대사에 극장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지고 분위기가 술렁였다.
두 사람이 보고 있는 연극, <불같은 사랑>은 여타의 연극이 그러하듯 귀족들의 사랑과 연애에 관한 이야기로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놀란 백작에게는 여동생과 금지옥엽으로 기른 딸이 하나 있다. 백작 부인은 극 내내 등장하지 않았는데 사별인지 이별인지는 언급이 되지 않았다.
어느 날, 백작의 딸 말리아는 시장에 놀러 나갔다가 납치를 당할 뻔한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남주인공인 페티가 나타나 말리아를 구해 주고 둘은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둘은 한창 달달한 연애를 하고 이윽고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백작저로 향했다.
마침 백작저에는 놀란 백작의 여동생이 약혼자와 함께 와 있었는데, 세상에 이럴 수가.
놀란 백작의 여동생의 약혼자가 페티의 아버지였다!
관객들이 입을 떡 벌리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딱 이곳에서 절묘하게 1부가 끝났다.
2부가 시작되기 전 잠깐의 쉬는 시간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서 관객들은 누구네 커플을 응원해야 하는지 열띤 토론을 벌였다.
먼저 사귀기 시작했고 약혼까지 한 백작 여동생 커플을 응원해야 한다는 파와 당연히 이야기의 주인공 커플을 밀어 줘야 한다, 안 그러면 왜 주인공이 여동생이 아니라 말리아겠느냐고 주장하는 쪽으로 나뉘었다.
연극에 영 흥미가 없는 라미엘을 제외하고 레이와 루이반 기사들도 열렬히 의견을 교환할 정도였다.
과열된 분위기 속 2부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의 충격이 조금 잦아들고 주인공 커플을 응원하기 시작하는 분위기가 되었을 때.
백작이 딸의 사랑을 반대하고 나섰다.
[아버지. 저 남자는 비록 귀족이 아니지만 실력 있는 기사예요! 분명 왕실의 기사가 될 거라고요!]
[글쎄 안 된다니까!]
[왜 이렇게 반대만 하세요! 제발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제대로 봐 주실 순 없으세요?]
[보고 싶지 않다! 말리아, 그 남자는 정말 절대로 안 된다.]
술렁술렁.
“그깟 신분이 뭐라고 저러는 거야, 수도 귀족들은 저래? 꽉 막힌 애비네.”
관객들이 백작을 욕하기 시작했을 때.
[너희는……. 너희는 남매다!]
휘몰아치는 매운맛 전개에 관객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희대의 연극 <불같은 사랑>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다음 이야기는 내일 이 시간에 이어진다고 했다. 1부작 연극이 아니었다니. 보통 상술이 아니다.
레이는 다음 내용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와, 미치겠네. 술도 다 깼어. 내일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배우들의 커튼콜까지 모두 다 보고 나서야 극장 밖으로 나온 레이의 볼은 흥분으로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라엘, 있잖아요…….”
“네. 원래 일정대로 출발하죠.”
척하면 착이다.
별장으로 돌아오니 푸엥 대신 푸둥이 뛰어나와 부부를 반겼다.
며칠 새 레이가 말을 많이 걸어서인지 푸둥은 말을 조금씩 알아듣기 시작했다. 그 예가 지금이었다. 잠시 집에 있으란 말에 푸둥은 축제까지 쫓아오지 않고 얌전히 별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푸둥이 밥 먹었나. 사냥 다녀올래?”
레이의 물음에 푸둥이 대답을 하는 것처럼 발을 한 번 탁 굴렀다.
레이는 푸둥의 목에 걸린 목걸이의 보석 부분을 살짝 손으로 건드렸다. 헤덴이 말한 워크산으로 가는 푸둥 전용의 게이트였다.
푸둥이 조금만 자라도 알아서 하늘을 통해 다녀올 수 있을 테지만, 아직은 어려서 이렇게 직접 데려다주어야 했다.
푸둥이 전용 게이트로 사라져 모습을 감췄다. 레이도 그제야 취침 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