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리본 바다 축제 (2)
“배역이 다 했어.”
침대에 누워서도 레이는 아까 봤던 연극에 대해 종알종알 수다를 늘어놓았다.
“페티 역 배우, 되게 밋밋하게 생겼는데.”
페티는 지고지순하게 말리아를 사랑하고 지키는 배역 때문에 맹한 얼굴이 잘생겨 보이기까지 했다.
“배역이 잘생겨서인가 사람까지 괜찮아 보이는 거 있죠?”
사실 그 배우의 외모도 수려했는데 레이에게 밋밋하단 평가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라미엘 때문에 레이의 눈에 웬만한 미남은 미남으로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크레하도 어디 가서 절대 기죽지 않을 외모다. 주변에 핀 커다랗고 화려한 꽃 때문에 레이의 눈은 그야말로 고공행진 중이었다.
“어쩜 막 그런 눈빛을 해 가지고 이렇게에 말리아한테 ‘누나아─.’ 하는데 그걸 어떻게 가만 놔둘 수가 있어?”
페티를 거칠게 밀어 눕히던 말리아의 심정이 십분 이해가 갔다. 당장 자신도 라미엘이 야시시한 눈빛을 하고 누나아, 하면 셔츠고 뭐고 다 찢어 버릴…….
“누나.”
뭐지. 뭐죠.
레이가 방금 무슨 소릴 들었는지 뇌와 귀를 의심하는 사이.
“누나아.”
라미엘이 레이를 쳐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어, 어버, 어버버.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입은 뭔가를 말하려다가 막힌 듯 붕어처럼 뻐끔거렸다. 길지도 않은 두 음절에 진하게도 색이 담겼다.
“라, 라엘, 라엘.”
뻐끔대던 레이의 입에서 겨우 끄집어낸 것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라미엘이 레이의 손을 끌어다 가볍게 키스를 했다. 손바닥에 닿는 입술이 뜨겁다. 레이에게도 서서히 열이 퍼지기 시작했다.
“응, 누나.”
진득하고 농후한 목소리는 누가 봐도 레이를 유혹하는 소리였다.
***
오전 내내 침대 신세를 졌다.
별장이 원래 그런 곳이니 하인들은 별생각이 없겠지만 당사자인 레이는 굉장히 부끄러웠다.
‘왜 이렇게 동네방네 소문내는 것 같냐.’
애초에 부부의 별장행 자체가 그런 의미였지만 몸으로 와 닿은 적은 없었기에 레이는 처음으로 별장의 존재에 민망함을 느꼈다.
마물 토벌을 한, 천재 검사인 연하 남편은 밤새 레이를 놔주지 않았다. 레이가 지나칠 만큼 무섭게 몰려드는 쾌감에 눈물까지 보였지만 멈출 기색은 없었다.
늦잠 한 번 자는 일 없이 언제나 새벽처럼 침실을 벗어나던 공작님은 아침 내내 침대를 떠나지 않았다.
평소에 하던 오전 업무 대신 그는 레이를 자극해 길고 긴 후희를 다시 나눴다. 하여 레이는 녹초가 되어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약간 좀 창피, 음?”
세상에 이게 누구 목소리람. 아니, 사람 목소리가 맞긴 한 거야? 쇠 긁는 소리가 아니고?
아침엔 그냥 신음만 흘렸지 제대로 말을 해 보질 않아서 미처 몰랐다. 밤새 우느라 목이 다 쉬었다. 목이 아파서 내내 말도 안 하고 고갯짓과 손짓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어서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기껏 말끔히 다 나은 몸에 다시 멍이 새겨졌다. 움직이는 것도 불편했다.
“완전 그때잖아.”
사냥제 직후로 다시 돌아온 기분이었다.
‘처음이랑 다르게 정신줄 놓을 것처럼 좋지만 않았다면 다신 안 했을 짓이야.’
“엉? 조, 좋은, 좋…….”
잠잠했던 마음이 다시 확 부끄러워져 버렸다.
레이가 심하게 부끄러워해서 침실에 케이와 엘도 못 들였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내내 그녀의 수발을 도맡은 건 라미엘이었다.
그는 레이를 씻기고 옷도 갈아입히고 밥까지 먹였다. 그야말로 공작 각하의 지극정성이었지만 고마운 것과는 별개로 얄미운 감정도 존재했다.
차를 가지러 갔던 라미엘이 방으로 돌아왔다. 몹시도 멀쩡한 모습이다. 심지어 혈색이 평소보다 좋아 보이기까지 한다.
‘가지가 최선이 아니었다니.’
반칙도 그런 반칙이 없다. 아직도 그의 절정을 생각하면 얼이 빠진다. 가지보다 더 큰 채소 뭐가 있냐.
체력은 또 왜 그리 좋은지. 밤과 새벽이 엄청나게 긴 시간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아, 밤과 새벽만 긴 건 아니지. 아침도 대단했어.
“어디 또 아파요? 레이, 표정이 안 좋은데.”
“너만 멀쩡해 보여서 분해요.”
난 이제 겨우 말하기 시작하는데.
레이의 대답에 라미엘이 미안한 얼굴로 웃는다.
“그게 최대한 살살 움직인 건데.”
기가 막힌 소리였다.
“라엘, 최대한 살살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죠?”
처음엔 아파하던 레이가 조금씩 다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 뭔가가 머릿속에서 톡 끊어지려는 것 같았지만 간신히 붙잡고 제 나름대로 조심히 파고들었다.
손가락에, 입술에 맞닿는 레이가 너무 여려서 일단은, 이번만은 살살 움직여야 했다.
“이거부터 마셔요.”
라미엘이 먹여 주는 차를 호로록 마셨다. 진정 효과가 있는 차였다. 따뜻한 차가 몸을 조금 덥히자 한결 편해졌다.
레이는 라미엘의 품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당연한 듯 그가 가까이 다가온다. 레이가 살짝 고개를 뒤로 빼서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이 남자가 정말.’
대체 지금 뭘 했다고 고작 가벼운 포옹에 가지가 또 화를 내려고 하는 것인가. 레이가 눈짓으로 화를 냈다.
안 돼. 더 이상 절대 못해.
“아침에도 충분히…….”
“절대 충분하지 않아요. 절대.”
그렇지만 레이의 눈을 보니 양껏 날뛰려면 조금 더 서로에게 익숙해진 뒤여야 할 듯했다. 앞으로 더 열심히 매진해 보겠다는, 레이가 알면 기함할 결심을 하며 라미엘은 품 안의 소중한 이를 조금 더 꼭 안았다.
그의 가지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오랜 시간 얌전히 안겨 있던 레이는 지난밤을 떠올리다 어제의 연극이 생각났다.
“저녁까지 회복해야 하는데.”
연극은 다시 보기나 재방송이 없기에 무조건 현장 방문이 필수다. <불같은 사랑>을 보러 가야 하기 때문에 레이는 반드시 컨디션 회복을 해야 했다. 라미엘의 야한 얼굴에 속아 지금 또 허락했다면 아마 내일까지도 침대를 못 벗어날지 모를 일이었다.
그건 안 되지.
“나 연극 못 보러 가기만 해 봐.”
레이가 매섭게 라미엘을 노려보았다.
하나도 무섭진 않고 귀엽기만 해서 라미엘은 저도 모르게 홀린 듯 레이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아으, 이제 입술도 아프잖아.”
아프다는 그녀의 말에 라미엘은 몸을 조금 물렸다.
여린 건 알았지만 그의 생각보다 레이는 더 약했다. 앞으로는 정말 깨지기 쉬운 유리 다루듯 해야 할 것 같다.
“<불같은 사랑> 못 보면 평생, 다신 내 몸에 손 못 댈 줄 알아요. 어, 맞아. 워크산 벌칙도 있었지? 그거 지금 당장 할게요. 내 옆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요.”
제대로 먹히는 무서운 협박이었다.
***
“어어? 안 돼! 뭐 하는 거야! 키스해! 키스하라고!”
키스 갈기란 말이다!
관객들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키스를 외쳤다. 하지만 끊기 신공이 보통이 아닌 극작가와 연출 덕분에 딱 두 사람의 키스 직전에서 연극이 끝났다.
왜 몰랐을까. <불같은 사랑>이 3부작이란 걸. 가장 중요한 결말만 남겨 놓고 루이즈를 떠나게 생겼다.
“아오, 아오!”
레이는 통탄하며 가슴을 쳤다가 아파서 멈췄다.
2부 역시도 매워서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주인공들은 놀란 백작의 말을 믿을 수 없어 그걸 뒤집어엎을 증거를 찾아다닌다.
그런 와중에 1부 내내 정체가 모호했던 백작 부인이 나타나 예비 사위한테 매콤한 귀족가의 맛을 보여 주었으며, 놀란 백작이 실은 게이였다는 사실까지 드러나 집안이 난리가 났다.
어찌 되었든 마지막은 풍비박산 난 놀란 백작가가 배경이었다. 페티와 말리아는 죽일 듯 싸우기도 했지만 여전히 서로를 사랑했고, 자신들이 남매가 아닌 증거를 찾은 참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다며 우리 마음껏 사랑하자고 서로 눈을 마주치고 입술을 들이미는데 커튼이 내려온 것이다.
“좌표를 라엘 말고 루이즈로 찍을걸.”
<불같은 사랑>만 보고 올 수 있도록 그래야 했다.
왜 라엘을 골랐지. 다음에 가면 예하께 좌표 추가해 달라고 할까.
“……레이, 그 정도예요? 이 연극이?”
“사람은 항상 순한 것, 몸에 좋은 것만 먹고 살 수 없어요. 가끔은 자극적인 것도 좀 섭취해 줘야 한다고요.”
음모가 나와 봤자 집안을 망하게 하려는 악조가 뒤에서 수작을 부리는 게 전부인, 주인공들은 흔들림 없이 서로만 순수하게 사랑하는 순한 맛뿐인 라비던의 연극에선 볼 수 없는 막장 스토리였다.
출생의 비밀, 복잡하게 얽히는 사각 관계, 게이에 매서운 백작가살이. 온갖 자극적인 요소가 다 들어 있는 연극이니 입맛이 짜릿하긴 했다.
“라비던 연극이 발전할 게 많네.”
레이의 말에 라미엘이 헛웃음소리를 냈다.
황실 보고만 아니었다면 하루 더 있어도 되는데 전매권을 받아야 킹크랩으로 뭘 할 수 있으니 하루빨리 움직이긴 해야 했다.
라미엘의 부축을 받으며 레이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느릿한 동작으로 극장을 나섰다.
“라엘, 걸음 멈춰요.”
극장 입구 매대에서 무언가를 팔고 있다. 방금 연극을 본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것을 보니 관련된 무언가가 분명했다.
“빨리 사람들 좀 헤쳐 봐요.”
레이의 독촉으로 라미엘이 그녀를 거의 안아 들다시피 품고 인파를 헤쳤다.
“세상에나.”
이런 상술 넘치는 극단 같으니!
연극이 아직 다 끝난 것도 아닌데 대본과 배우들의 초상화를 팔고 있었다. 연극에 소품으로 등장했던 것들도 판매품이었다.
보통 <불같은 사랑>처럼 2부작 이상의 장기극은 연극이 끝나는 날 대본과 상품을 풀기 마련이다. 결말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2회도 흥행에 성공하자 바로 상품을 내놓은 모양이었다. 대단한 배짱이었다. 어찌 되었든 레이에겐 눈물 나게 고마운 배포였고.
“이 대본, 전 회 차 다 있는 거 맞아요? 내일 공연까지 전부 다?”
“아, 물론이죠.”
레이는 매대에 있던 모든 상품을 쓸어 담듯이 집어 들었다. 옆에 있던 라미엘은 자연스레 레이 전용 장바구니가 되어 그녀가 집은 것들을 자신이 가져다 들었다.
“대본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 필경사인가 봐요?”
통 큰 손님의 상품 싹쓸이에 신이 난 상인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