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따뜻한 저녁 식사
“대본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 필경사인가 봐요?”
필경사가 본업 외 쏠쏠하게 수익을 챙기는 부업 중 하나가 유명 연극의 대본을 읽어 주는 일이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필경사는 어딜 가나 수요가 있었고 특히나 연기력까지 있다면 대본 낭독회로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다.
상인은 눈앞에 있는 검은 머리 필경사가 외모도 빼어나니 인기도 극에 달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필경사는 부르는 게 값이다.
“필경사 아니에요.”
“아, 그럼 다행이고. 대본은 내일 저녁 이후에나 퍼뜨려 줘요.”
필경사가 아니라는 말에 상인은 당연히 레이도 글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대본을 사서 필경사한테 읽어 달라고 하려나 보다 했다.
이는 대본 낭독을 하려는 필경사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 극 홍보를 위해 극단에서 필경사를 고용해 낭독회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연극이 끝나기까지는 내용을 발설하지 말아야 한다.
연극은 필경사의 낭독으로 자연 홍보가 되고, 필경사는 낭독회로 돈을 버는 구조이기에 내용 유출 금지는 상호간의 상도덕이었다.
“이거 키즈웰에서도 흥행한 작품이에요. 필경사한테 낭독 때 이 사실도 꼭 좀 알려 달라고 전해 줘요.”
수도를 조금만 벗어나도 이런 분위기가 자연스러웠다. 글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기에 대신 글을 써 주고 읽어 주는 필경사는 마을에 꼭 두어야 하는 필수 직업군이었다.
특히나 여자들은 글을 더 안 가르치려고 하는 분위기 때문에 레이도 당연하게 그런 사람 중 하나로 여겨진 것이다.
레이는 열 권 정도 쌓여 있는 대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극 흥행 속 소품들이 불티나게 팔려 나가고 있어도 대본은 줄어들지 않았다. 아마 내일 연극이 끝나면 흥행했다는 소문을 들은 필경사들이 와서 전부 사 갈 것이다.
라비던은 연극이 끝나고 관련 상품 판매가 시작되면 대본이 제일 먼저 팔렸다.
라비던에서는 남녀를 떠나 글을 읽고 쓰는 게 당연시되는 분위기가 잡혀 가고 있었다. 물론 글을 아는 사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수도에도 필경사는 존재했다.
하지만 분위기와 그 수는 이곳과 현저히 달랐다.
비록 이곳보다 좀 더 견고한 신분제가 있어도 인간으로서 무언가를 익히고 배우고자 하는 이유와 필요는 수도가 더 확실하게 체감하고 있었다.
“왜 그래요, 레이?”
값을 지불한 라미엘이 조금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레이를 보며 물었다.
“아직도 많이 불편해요?”
“아뇨. 그냥 생각할 게 좀…….”
라비던과 차이가 있다고는 막연하게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상황을 접하니 더욱 선명하게 와 닿는 느낌이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레이가 몸을 돌려 한 발자국 뒤에 선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라엘, 이제 마지막이니까 다 같이 여기서 저녁 먹고 돌아가요.”
손님들은 식당 안쪽, 가장 경치가 잘 보이는 좋은 자리에 앉아 있는 다섯 명의 사람들을 흘끗거렸다. 어딘지 모를 우아한 분위기가 그들을 감싸고 있었고 특히나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의 미모는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무표정한 은발 남편은 아내가 무슨 소릴 할 때마다 얼음 녹듯 사르르 미소를 지었는데 그럴 때마다 자꾸 어디서 식기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크레하 경, 왜 이제 와?”
뒤늦게 모습을 보인 크레하를 보며 레이가 물었다.
모두 자리를 잡고 음식을 주문할 때까지도 보이지 않던 크레하는 음식이 나오기 시작한 때가 되어서야 나타났다.
“골목이 많이 복잡해서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라미엘의 명으로 수박바가 잠시 어딜 다녀온다더니 예상보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 모습을 드러냈다.
크레하는 라미엘에게 무언가를 건네더니 자리에 앉았다.
“라엘, 무슨 일 있었어요?”
수박바가 내민 건 손수건에 싸인 돈이었다.
“별일 없었어요.”
하지만 별일이 있었다.
연극이 끝나고 레이가 관련 상품을 모두 사고 있을 때.
“어느 연극 하세요?”
갑자기 두 사람 사이를 가르는 낭랑한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부부가 소리 난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볼에 주근깨가 난 소년이 두 사람을 보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두 분이 하시는 연극이라면 꼭 보고 싶어요.”
소년이 가까이 다가와 수줍게 웃었다.
‘……뻔하네.’
크레하는 소년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보았다. 축제에 빠지면 섭섭할 인물, 사람들이 많고 혼란한 틈을 타 주머니를 터는 좀도둑이다.
라비던 축제는 귀족들이나 사업가들이 많아 보안을 위해 경비병을 많이 세워 두지만, 그 외 도시는 수도만큼의 귀빈들이 그리 많이 참석하지 않기에 경비가 비교적 허술한 편이다.
수도 귀족들은 이런 지역 축제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각 도시의 수장인 파칸의 초대로 축하 인사를 건네러 오는 경우가 아니면 볼 일이 없었다.
그러니 평범한 사람들 사이 루이반 부부는 유독 튀어 보이긴 했다. 외형이 아름다워서이기도 했지만 몸에서 배어 나오는 특유의 우아한 분위기가 있었다.
아무리 공작 부부가 평범한 옷을 입고 왔다고는 하지만, 마님의 장신구나 공작님이 입은 코트는 웬만한 가정의 몇 달 치 생활비는 될 것이니 소매치기의 눈에 그게 들어오지 않을 리가 없다.
라미엘 역시도 소매치기가 접근할 때부터 알고 있는 듯했다. 그는 직접 나서는 대신 크레하에게 알아서 처리하란 눈빛을 보내고 모른 척 넘어갔다.
옆에 레이가 있어 조용하게 처리한 것이지 만약 소매치기가 그녀를 노렸다면 현장에서 라미엘에게 즉결 처분을 당했을 것이다.
운이 좋은 녀석이었다.
“내려놓고 가.”
조용히 소년의 뒤를 따른 크레하는 아이가 더 멀리 달아나기 전에 불러 세워 용건만 말했다.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지 한 마디도 않고 그저 두고 가라고만 내뱉었지만 이 정도도 충분했다. 이 바닥에서 오래 굴렀던 이라면 잘 알 것이다. 여기서 발뺌하고 모른 척을 한다면 호되게 큰일을 당할 수도 있겠다고.
“쳇. 자기 주머니도 아니면서 나서기는.”
소년은 투덜거리며 라미엘에게서 훔쳐 낸 돈을 크레하에게 돌려주었다.
“이거, 받아.”
크레하가 소년에게 2,000파브짜리 동전을 던졌다.
“어엇? 뭔데?”
“그분이 베푸신 호의다.”
“그분? 뭐 귀족이라도 되냐? 넌 그 수하고?”
크레하는 대답하지 않고 골목을 나섰다.
좁고 고불고불한 골목이 어지럽게 얽힌 동네였다. 이러니 이 소매치기가 여길 선택해 도망친 거겠지만 가는 동선이 번거롭긴 했다.
그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크레하 경도 왔으니까 맘 편하게 먹을 수 있겠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레이의 말에 호위 넷은 잠시 동작을 멈칫했다.
이 자리는 마님이 베푼 호사였다. 세상 그 어떤 주인이 자신의 하인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할까. 그것도 본인의 것과 차이 없는 동등한 메뉴로.
심지어 호위는 절대 호위 대상과 한 자리에서 이런 일을 하면 안 됐다. 돌발 상황에 빠르게 대응을 못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레이는 그런 일 정도는 개의치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식사를 권했다. 축제니까 다 같이 즐기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밖은 매섭게 추웠지만 마음만큼은 따뜻한 루이즈의 저녁 식사였다.
***
“준비 다 됐습니다.”
윌포프의 말에 레이와 라미엘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푸엥, 갔다 올게.”
푸엥의 동그란 머리에 쪽쪽 뽀뽀를 해 주고 나니 그 옆에서 강아지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푸둥이 보였다.
얘를 어쩜 좋을까.
울프 드래곤인데 주변에 동물이라곤 푸엥뿐이라 그런지 행동이 강아지와 동기화되고 있다.
루이반 저택 사람들은 푸둥의 존재에 대해 당연히 함구하고 있었다. 푸둥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무조건 푸둥에 관해선 외부로 발설하지 말라는 엄명이 내려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본래 주인이 그러라면 그렇게 하는 법이라 루이반 사람들은 그 명을 잘 따랐다. 아마도 귀한 품종의 비싼 개라 주변에 알리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라는 추측이 그나마 가장 그럴싸한 이유가 되었다.
“푸엥, 손. 이쪽 손. 안녕.”
레이의 명령에 푸엥이 앞발을 척척 내밀고 인사하듯 휘젓자 옆에 있던 푸둥도 똑같이 레이에게 손을 주고 인사하듯 흔들었다.
이 광경은 루이반 사람들에게 푸둥의 정체성이 개라는 것을 더더욱 확실하게 심어 주었다. 울프 드래곤을 모르는 몇몇 기사들은 푸둥의 정체를 의심하긴 했으나 푸엥과 하는 짓이 똑같은 것을 보며 의심을 지웠다.
“푸둥이도 잘하네.”
푸둥의 이마에도 뽀뽀를 해 주고 레이는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둘이 얌전히 잘 놀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외출할 때마다 푸엥과 작별 인사를 하느라 시간이 걸렸는데 하나가 더 들어오면서 시간이 배가 됐다.
“이제 가요.”
예의 흰 정복을 입은 라미엘의 팔짱을 끼며 레이가 걸음을 옮겼다. 레이도 고급스러운 단정한 드레스를 신경 써서 입은 차림새였다.
오늘은 황실에 보고를 올리는 날이다.
본디 연례 보고로 라미엘 혼자 행차해야 했지만 전매권을 위해 부부가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부부 동반을 원하던 태자의 의도대로 된 것이다.
“푸둥이, 이제 완전히 말귀 트인 것 같지 않아요?”
마치에 오르자마자 레이가 물었다.
울프 드래곤이 말을 알아듣는다는 논문이 사실인 듯 푸둥은 어느새 레이가 하는 말을 듣고 곧잘 그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푸엥이 레이의 뒤를 따라 나오려고 하자 마치 나가지 말라는 것처럼 푸엥의 꼬리를 살짝 물어 뒤로 잡아끌기까지 했다.
“레이가 하는 말들 알아듣는 것 보니 그런 것 같아요.”
“아까 손 주는 거 봤죠? 꼬리도 흔들고. 걔 그러다 정말 강아지 되겠어요.”
“푸둥이 산책 줄 마련해야겠네요. 조만간 옷도 생기겠고.”
라미엘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루이즈에서 돌아왔을 때 이번에도 푸엥은 하인들이 만들어 준 새 옷을 입고 있었다. 이번엔 요즘 유행 조짐이 보이는, 실크로 만든 꽃 장식이 달린 드레스였다.
오늘 레이가 입고 있는 것과 같은 디자인이었는데, 레이의 드레스를 만들고 남은, 버려야 하는 작은 천 조각들을 이어 만들었다고 했다. 연봉을 안 올려 줄 수 없는 솜씨였다.
라미엘 말대로라면 다음번 루이반을 떠나는 장기 스케줄이 예정될 때, 반려동물 두 마리가 똑같은 옷을 입고 레이를 반기게 될 거란 이야기였다. 충분히 발생 가능할 일로 보였다.
“음, 그건 엄청 귀엽긴 하겠네요.”
어쩜 반려동물들도 주인 닮아 희고 검은지. 두 마리가 종족을 뛰어넘어 함께 공원을 뛰어다니는 걸 보고 있자니 웃음이 다 나왔다.
“푸둥, 웃겨요. 워크산을 뛰어놀던 애가 푸엥 공원에서 잘 놀더라.”
어딘가로 이동할 때, 라미엘의 손에는 항상 일거리가 들려 있었다. 마차는 고요했고 그 속에서 그는 일을 쉬지 않았다.
이동하는 중에도 봐야 할 만큼 대단히 급한 일도,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나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일을 했다.
공백이 생기는 시간은 왠지 늘어지는 느낌이 들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마차는 레이의 목소리로 가득했고, 보고서는 손에 쥐어 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편안했다.
늘 초조하던 이동이 언젠가부터 조금씩 즐거워졌다. 그 시작점은 명확히 몰라도 누구 덕분인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나 어쩌지…….”
레이는 라미엘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가끔, 아니 이제는 종종 라미엘이 자신을 굉장히 엄청난 눈빛으로 바라볼 때가 있는데 지금이 딱 그랬다.
심지어 무적의 흰 정복 차림이다.
입술이 드릉드릉하다.
“왜 그래요, 레이?”
레이가 라미엘 곁으로 가서 앉았다.
“푸둥하고 푸엥도 받았으니까 라엘도 공평하게.”
라미엘의 얼굴을 붙잡은 레이가 새처럼 입술을 쪼아 대듯 가볍게 여러 번 키스를 했다.
“내 거라서가 아니라 진짜 잘생겼어.”
쪽쪽.
라미엘은 만족한 듯 씩 웃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는 레이를 살며시 붙잡아 다리 위에 앉혔다.
“할 거면 제대로…….”
라미엘의 나머지 말은 더 이상 소리가 되어 나가지 않고 입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