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황실 보고
라미엘은 하루 종일 황실에 있을 예정이었다. 연례 보고에 법안 정기 회의까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귀족들과 다 함께 연례 보고를 했어야 했지만 루이즈의 마물 문제 때문에 미뤄졌고, 밀린 날짜인 오늘은 귀족들이 법안 논의를 하는 날이었다.
오전에 연례 보고를 마치면 바로 회의가 시작된다. 숨 돌릴 틈 없이 빽빽한 일정이었다.
오늘 회의에서 이전부터 말 많았던 재혼법 개정이 최종 결론을 낸다고 하니 회의가 짧게 끝이 나진 않을 것이다.
“흠, 짧은 시간치고 명확하게 조사가 잘됐군.”
태자는 레이가 내민 전매권 서류를 즉석에서 살펴보았다.
태자가 검토하기까지 며칠 걸릴 줄 알았는데 라미엘의 연례 보고가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끝이 나서 시간이 남은 덕분에 레이의 서류까지 바로 확인이 되는 중이었다.
테일러가 약식으로 올린 보고서가 완벽했던지 본 보고를 받아도 크게 이상하거나 신경 써야 할 내용은 없었다.
첫 보고인데 질릴 만큼 완벽하게 해낸 루이반 공작을 보자니 매년 연례 보고에서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오랜 시간이 걸렸던 선대 루이반 후작과 더욱 비교가 되었다.
심지어 부부 금실도 좋은지 공작 부인의 입술 상태가 태자비 르누아와 비슷했다. 루이반은 앞으로도 걱정이 없어 보였다.
“킹크랩이라. 공작 부인이 직접 이름을 붙인 건가?”
다른 곳 인간들이 지었습니다.
“네. 게가 커서 그리 지었습니다.”
태자는 다시 보고서로 눈을 돌렸다.
킹크랩이라 명명해 올린 보고서에는 ‘킹’은 크다, ‘크랩’은 게를 뜻하는 말로 타 대륙의 소수 민족들이 쓰던 언어에서 따왔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게 이름 붙이겠다고 다른 언어까지 뒤져 본 열정이 대단했다.
“큰 게라서 킹크랩. 재미있군.”
킹크랩은 루이즈의 루이반 공작령에만 출몰한 상태. 타 대륙에 흔적은 있으나 현재는 전무.
루이반 측에서 일단 본인 자본을 들여 킹크랩을 잡아 놓은 상태라 황실에서 큰 비용이 발생하진 않았다.
보통은 신종 생물이 출현하면 일단 황실에서 관리하다가 전매권을 주기 때문에 초기 비용이 막대하게 들곤 했다.
그래서 초기 투입 비용을 어느 정도 회수하고 앞으로의 예상 수익까지 산정하기 때문에 전매권이 비쌌다. 황실도 이런 부분을 운영하는 데 있어선 상인이나 다름없기에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았다.
지금 같은 경우는 초기 비용은 들지 않았고 게는 비인기 품목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매권이 싼 건 아니었다. 애초에 전매권 자체가 누군가에게 특혜를 주는 것이라 기본 가격부터가 라블로 시작되었다.
하여 태자는 이걸 왜 루이반이 가지려고 하는가, 하는 의문을 계속 품었다.
게는 인기가 없다 보니 가격도 저렴한 편이었고 주된 요리로 먹는 일도 없어서 물고기를 잡다가 잡히면 파는 정도의 생물이었다.
보고서를 보면 이 킹크랩이라는 큰 게만 잡아 상품화한다는데, 라미엘 같은 영민한 남자가 손해만 보는 일을 가만히 둔다는 점도 이해가 안 됐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아무리 봐도 돈이 될 것 같지 않군. 오히려 손해야. 매출이 이 게를 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굳이 왜 상품화하려고 하지?”
게가 비싸면 당연 판매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을 거고, 저렴하게 팔면 관리 비용에 손해가 발생할 것이다. 그래도 하겠다면 황실은 전매권 팔이로 앉아서 그냥 돈을 버는 것이니 허락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전매권 관련 부서에서 회의를 하고 현장 답사를 가거나 시장 조사를 해 보는 등의 시간을 낼 필요도 없다. 본 신청서 내용만으로도 전매권을 내어줄 수 있다.
“그건…….”
황실 전매권 부서로 넘어가기도 전에 직통으로 최종권자인 태자에게 건네진 전매권 신청서였다. 태자가 짬이 나는 시간에 후루룩 봐 주기에 당장 얻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어쩐지 너무 쉽게 간다 했다.
라미엘은 킹크랩에 관련한 일은 전적으로 레이에게 맡기고 있었다. 오롯이 본인이 덤벼든 일이니 그녀가 전권을 갖는 게 맞았다.
그래서 전매권 신청도 레이가 직접 했고 앞으로의 관리도 전부 레이가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그녀는 태자에게 자신의 힘으로 명확히 전매권의 필요를 입증해 보여야 했다.
“제가 게를 너무 좋아해서요.”
이 게는 상품화가 분명 가능하다고, 고급 상품이 될 것을 확신하며, 허락만 하신다면 킹크랩 한 마리를 잡아서 시식하자고 말하려 했건만 한국에서 먹던 생각이 오버랩되면서 말이 헛나가고 말았다.
“어어? 조, 좋아해?”
예상외의, 말 같지도 않은 소릴 들은 태자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전매권 신청은 어렵고 까다로워서 온갖 해박한 지식과 상술이 받쳐 주는 말발을 가져야 하거늘, 다 된 밥에 어찌 코를 빠뜨렸을까!
빨리 수습을 해야 하는데 너무 당황한 나머지 머리가 하얗게 비어 버리고 말았다.
레이가 동공에 지진을 일으키며 입만 벙긋대고 있는 것을 보며, 라미엘은 태자가 좋아할 법한 대답을 해 이 상황을 무마하기로 했다.
“아내가 즐겁게 실컷 먹을 수만 있다면 손해라 생각되지 않습니다.”
사랑꾼으로 중무장한 그의 대답에 태자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어.”
항간에 아직도 루이반 부부가 계약 결혼을 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꼴을 봐야 했다.
‘하긴 1,800억 파브 지를 때부터 제정신이 아닌 남자였지.’
태자는 똥 씹은 표정으로 전매권을 승인하는 사인을 하고 인을 찍었다.
내 손핸가, 자기들 손해지.
“감사합니다, 전하.”
어찌 되었든 전매권을 받아냈다.
약간 ‘이거 먹고 떨어져, 빨리 가 버려.’라고 말하는 듯한 손짓으로 태자는 전매권 서류를 레이에게 넘겼다.
“차라리 이름을 랑크랩으로 하지 그러나.”
“랑크랩이요?”
랑이 무슨 뜻이 있는 말인가 추측해 보는데 태자가 약간 질린다는 얼굴을 숨기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사랑의 게라고 해서, 사‘랑크랩’ 말일세.”
……하, 하하, 하.
레이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
라미엘이 회의를 하는 동안 레이는 황실을 벗어나 마그스너 후작가로 향했다. 미뤄진 티파티가 다시 개최되는 날이다.
“공작 부인!”
지난 티파티보다 한결 편안한 드레스 차림의 케이틀린이 해맑게 웃으며 레이를 반겼다.
“영애, 오랜만이에요.”
말만 티파티지 친구네 초대받아 놀러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티파티 장소부터 응접실이나 온실 같은 곳이 아닌 케이틀린의 방이었다.
“스타일이 바뀌셨네요?”
케이틀린이 자른 머리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훨씬 잘 어울리세요.”
“고마워요. 머리가 짧아지니 너무 편한 거 있죠.”
“그래요? 저도 좀 잘라 볼까요?”
“일단 겨울 보내고 생각해 봐요. 목덜미가 조금 썰렁하긴 하거든요.”
레이의 말에 케이틀린이 아하하,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언제나 가벼운 웃음만 짓던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고고한 벽을 이렇게나 허문다.
“루이즈 일은 잘 해결되셨나요?”
“네, 마물이 아니라 특이 생물이었어요. 그거 확인하느라 좀 늦었네요.”
“다행이다. 마물이라고 해서 놀랐었어요.”
레이는 황실에서 사 온 쿠키를 선물로 내밀었다.
“로열 팟 사왔는데, 괜찮아요?”
다과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한 번 먹으면 디저트 세계에 입문한다는 마성의 고급 황실 쿠키다.
“싫을 리가요. 너무 좋네요. 이거랑 어울리는 차로 다시 끓여야겠어요.”
속마음 겉마음 따로 노는 기 싸움 없이 편안한 대화가 이어졌다.
한창 수다를 떨다가 케이틀린이 방 한구석에 있던 궤를 열고 무언가를 가지고 왔다.
“실은 부인을 초대한 게, 이거 보여 드리려고 한 거예요.”
“이게 뭔가요?”
케이틀린은 대답 대신 품에 한 아름 가지고 온 두루마리들을 테이블 위에 쫙 펼쳤다.
“영애, 이거 혹시…….”
“네, 맞아요.”
케이틀린이 펼친 두루마리는 초상화였다. 전부 젊고 어린 남자들이 그려져 있었고 하단에 무언가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케이틀린에게 혼인 의지를 보인 남자들, 즉 예비 혼약서였다.
‘살다 살다 이렇게 혼약서가 많은 건 처음 봤다. 이게 이렇게 여러 개가 쌓일 일이야?’
라비던 인기 1순위는 역시 남달랐다.
“부모님께선 제 의견을 가장 존중한다고 하셨어요.”
“음, 그렇다면 여기 중에서 케이틀린 마그스너 영애의 신랑감이 나오는 건가요.”
“네. 제가 고르기만 하면 돼요.”
“고르는 데 며칠은 걸리겠는걸요.”
“으흐음. 후훗.”
케이틀린이 개구진 소녀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레이를 보았다.
“지금 혹시 나랑 같이…….”
“네! 공작 부인 말고 제 취향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놀랍게도 이 두루마리 뭉치들은 1차적으로 케이틀린이 거르고 난 명단이었다.
“아우, 나 사기당했네. 노동력 착취 사기 당했어. 영애가 이럴 줄 몰랐는데.”
레이가 가볍게 투정을 부리자 케이틀린이 방긋 웃었다.
“제가 믿을 만한 분이 공작 부인뿐이라 그런 건데 사기라뇨. 아차, 말씀 편하게 하시고 저 케이틀린이라고 불러 주세요.”
요놈 보게.
레이가 피식 웃자 케이틀린이 와하하, 하고 웃는다. 시원한 웃음소리다.
“케이틀린도 날 알렉스라고 불러요.”
레이가 덜컥 이름을 허락한 게 뜻밖이었는지 케이틀린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기쁜 듯 곱게 휘었다.
“네, 알렉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