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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85화 (85/160)

85화. 마그스너

케이틀린의 약혼자 고르기에 동참한 지 30분.

“어? 이 총각, 사냥제에서 봤던 사람이네.”

레이가 2부 우승자라고 예상했던 그 귀여운 총각의 초상화가 나왔다. 나이는 이제 열네 살. 레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어린 나이였다.

키도 크고 체격이 좋아 십 대 중후반이라 생각했는데, 라미엘처럼 자라려고 하나.

“아아. 몬순 공작 아들 말하시는 거죠?”

레이가 초상화를 건네지도 않았는데 케이틀린은 바로 알아차렸다.

“아는 사이?”

“하.”

케이틀린이 대답 대신 한숨을 쉬었다.

“제일 적극적이라 곤란해요.”

보아하니 몬순 공작의 아들이 케이틀린에게 푹 빠진 모양이었다.

“음, 그래도 외모가 딱 케이틀린 취향인 것 같은데.”

“맞아요. 근데 성격이…….”

“성격이 별로야?”

“너무 선명해요.”

엥? 그게 뭔 소리?

“얼굴은 귀여워도 존재감이 있는 듯 없는 듯 흐리멍덩하고, 내 말에 토도 달지 말고 픽 기죽어 있어야 하는데, 우물쭈물하지도 않고 첫 출전 사냥제에서 사냥에도 성공하는 걸 보면 보나 마나…….”

케이틀린이 삼킨 뒷말이 들리는 것 같다.

─라미엘 님 과예요.

사람 느끼는 거 다 똑같네.

그래도 우리 라미엘은 이제 고분고분하게 말도 잘 듣, 아. 존재감.

“그렇지만 외모는 몬순 소공작이 가장 출중한데…….”

“제가 더 잘생겼으니 됐어요. 그리고 장래가 너무 탄탄해 보여서 안 돼요.”

“케이틀린, 내가 정말 도움이 될까? 케이틀린의 이상이 너무 확고해서 난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

“다들 조금씩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는데 그걸 좀 더 명확하게 판단하고 싶어서 알렉스께 도움을 청하고 있는 거예요.”

하여 두 사람은 나머지 후보를 더 뽑고 각자의 장단에 대한 토의와 케이틀린의 취향을 녹여 내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최종적으로 두 사람은 다섯 명의 후보를 골라낼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찻주전자 세 번 리필, 선물로 사 온 간식 모조리 흡입, 잠깐 누워 쉬기 등의 시간이 소모되었다.

“루이반 공작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두 사람의 열띤 토의가 끝나갈 무렵, 라미엘이 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벌써 라엘 회의가 끝이 났다고?”

회의가 끝나면 라미엘이 마그스너가로 데리러 온다고 했었다.

“어머나, 알렉스, 지금 저녁 시간이에요.”

놀라기에는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라미엘이 예상한 회의 시간보다 더. 그도 기나긴 회의를 마친 길인 듯했다.

“그래도 대강의 장단들은 얘기 다 됐으니까 다행이네.”

“네, 정말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해요, 알렉스.”

“이제 다신 이런 일로 부르지 마. 순수하게 놀러 오라고만 해.”

케이틀린이 까르르 웃으며 레이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방을 나섰다.

라미엘은 마그스너 후작과 이야기를 하다가 레이의 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라엘.”

라미엘은 길어진 회의에 레이가 먼저 루이반으로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마그스너 저택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후작과 함께 이리로 온 길이었다.

“레이, 많이 기다렸어요?”

“아뇨, 라엘이 딱 맞게 왔어요.”

“머무시며 불편한 점은 없으셨는지요.”

마그스너 후작이 물었다.

“케이틀린 영애 덕분에 무척 즐거운 하루를 보냈답니다. 환영에 감사했어요.”

레이가 답인사를 하며 라미엘의 손을 잡았다. 이제 집으로 갈 시간이다.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데 케이틀린과 함께 응접실에 나와 있던 후작 부인이 말했다.

“마침 저녁 시간인데 함께 식사라도 하고 가시는 건 어떠십니까.”

갑작스레 찾아온 손님이나 다름없는데 마그스너가의 저녁은 마치 루이반 부부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준비라도 해 둔 것처럼 훌륭했다.

화기애애한 저녁 식사였다.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그동안 시간을 그렇게 오래 끌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그스너 후작은 재혼법 강경 개정파였다. 귀책이 있으면 재혼을 못 한다는 이 법은 여자들에게만 너무 불리하게 적용된다며 처음부터 강하게 개정을 밀어붙이던 사람이었다.

“그러게요.”

라미엘이 맞장구를 쳤다.

“그럼 오늘 개정안 발효 때문에 늦은 거예요?”

레이의 질문에 마그스너 후작이 대답을 했다.

“하하, 아닙니다. 재혼법 개정은 거의 통과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고 오늘 늦은 건…….”

마그스너 후작이 라미엘을 쳐다보며 말했다.

“루이반 공작 각하가 발의하신 안 때문이었죠?”

라미엘을 바라보는 후작의 눈빛이 아들이라도 보는 것처럼 훈훈했다. 마치 얘가 어쩜 그런 좋은 걸 생각해 냈나, 하는 느낌이었다.

“여성도 작위를 받을 수 있게 하자는 법안이었습니다.”

후작의 말에 테이블이 술렁였다. 리담의 상식에서 놀라울 만큼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수백 년의 시간 동안 논의조차 되지 않던 일을 갑작스레 수면 위로 끌어 올린 라미엘은 고요해진 회의장을 보며 피식 웃었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어요?”

레이는 너무 놀랐다.

이 남자, 혹시 간밤에 한국에라도 다녀왔나. 어떻게 이런 선진적인 생각을 다 했지? 심지어 생각을 하자마자 실천했어!

라미엘은 대답 대신 레이의 입에 후식으로 나온 달콤한 오렌지 셔벗을 한입 넣어 주었다.

오전에 레이가 전매권을 받아 내는 걸 보다가 떠올린 안건이었다. 레이가 전매권을 따내기 위해 계약금을 미리 달라고 했던 일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그녀 주변의 상황들이 하나씩 보였다.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능력이 되는 수많은 사람들이 불합리한 상황으로, 혹은 어찌할 수 없는 사정으로 하고자 하는 걸 포기하게 됐을 때의 일이었다.

가볍게, 만약 레이가 전매권을 신청할 기회나 자금이 없었다면 게를 보고 무언가를 해 보려는 시도나 해 봤을까 하는 생각이 시작이었다.

바닥에서 시작해서 황실 의상실까지 올라간 엘빈, 루이반에 있는 케이와 엘, 베르니에 있는 집사장 샤메인까지. 아주 귀하게 찾아낸 인재들이었지만 그들을 귀하게 여기거나 찾아 주는 곳은 없었다.

엘빈은 평민이라 무시당하기 일쑤고 케이와 엘은 무사임에도 사냥제에 참여하지 못했다. 토벌전에 나섰던 대단한 무인인 샤메인은 베르니의 집사가 되어야 했다.

샤메인의 경우 본인이 토벌전 후, 싸움은 더 이상 싫다며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 달라고 했다지만, 만약 그녀가 들어갈 기사단이 많았다면 선택지가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레이를 처음 봤을 때, 여자는 작위를 못 받으니 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고 독설을 퍼붓던 그녀의 목소리까지도 생생했다.

하여 라미엘은 원래 상정하려던 안건을 가뿐히 팽개쳐 버리고 여성 작위 수여 건을 들고 회의장에 들어갔다. 레이에서부터 시작된 안건이었다.

“그러게요. 공작 각하께서 정말 꿈에도 생각 못 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재혼법 개정에 적극적이었던 이답게 후작도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라미엘의 법안으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데 어느 순간 케이틀린이 말이 없어졌다.

“케이틀린 영애?”

“아, 네. 공작 부인.”

“괜찮아요? 갑자기 안색이 조금 안 좋아 보이는데.”

레이의 걱정에 케이틀린이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잠깐 넋을 놨네요.”

여성도 작위를.

듣자마자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발밑이 모조리 꺼지고 무너지는 느낌에 잠시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케이틀린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대화에 집중하려고 했다.

“난 아내가 무엇 하나 걸리는 것 없이 하고 싶은 걸 다 하길 바랍니다. 이 일은 그 시작에 불과하고요.”

라미엘의 발언에 후작 부부가 아내 사랑이 너무 심하게 각별하신 게 아니냐며 소리 내 웃었다.

그러나 케이틀린에겐 그 소리들이 들리지 않았다.

─하고 싶은 걸 다.

“공작님은 내가 살고 싶어 하는 대로 살게 해 준다고 약속하셨거든요.”

이전에 레이가 했던 말이 라미엘의 목소리와 겹쳐 들렸다.

케이틀린의 심장은 그때보다 지금 더 뛰었다.

***

“나 작위 받게 해 주려고 그런 건 아니었을 테고.”

돌아가는 마차에서 레이는 라미엘 곁에 앉아 저녁 시간과 이어지는 이야기를 꺼냈다.

“어쩌다 그런 안건이 생각난 거예요?”

라미엘은 잠시 레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옆의 이 사람이 조금씩 자신의 세계를 넓고 깊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 당신 덕분에요.”

“으응? 나? 내가?”

무슨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라미엘이 자신의 무언가를 보고 세상이 놀랄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라엘이 내게 루이반을 주려고 하나. 정말로 레이알렉시스 공작 각하 만들어 주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각하께선 루이반 공작 부인께 작위를 양도하라면 하시겠습니까?”

회의 때, 라미엘의 안건 때문에 소란스러워진 분위기에서 던져진 질문이었다. 여성의 작위 승계와는 조금 다른 방향의 질문이긴 했지만, 라미엘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레이가 원한다면 줄게요.”

라미엘이 레이의 허리를 안고 다른 손으로 볼을 감쌌다.

“흐음. 대가는?”

레이가 살며시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

“지금 이거랑 앞으로도 이런 건 나하고만 한다는 약속?”

미래를 약속하는 건 처음이었다.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 역시도 처음이었다. 그에게 있어 레이와 하는 모든 것은 전부 다 처음이었다.

라미엘의 약속은 그의 미래에 레이가 당연하게 있다고 여기고 그때에도 지금과 같은 마음일 것임을 전제하고 있었다.

“그거라면 자신 있어요. 다 줄게.”

레이의 대답에 라미엘의 입꼬리가 한껏 휘었다. 그의 입술에 닿는 레이의 입술도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앞으로’ 또 이 사람과 무엇을 처음으로 하게 될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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