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새벽의 루이즈
파도를 처음 보고 흐어엉헝엉허엉, 하고 레이의 품에 안기던 푸엥은 이제는 파도를 쫓으려 안달이었다.
“안 돼, 너 추워. 겨울 바다 많이 차다. 파도 밟아 봐서 알잖아. 여름에 실컷 놀게 해 줄게.”
루이즈의 바다는 여전히 차가웠다. 며칠 전 축제까지 즐기고 왔음에도 다시 오니 처음 온 곳인 것처럼 새로웠다.
이번 루이즈 동행은 라미엘이 아니라 푸엥과 푸둥이었다.
라미엘은 일이 바빠 도저히 루이즈에 올 시간을 낼 수 없었고, 레이는 겨울이 가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지금 잡아 둔 킹크랩을 상품화해야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결혼 후 처음으로 각자의 일정대로 따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라미엘의 예언대로 푸둥에게도 산책 줄이 생겼다. 남들 보기에는 개이기에 푸엥과 똑같은 대접을 해야 했다.
그나마 이곳이 루이즈이기에 푸둥이 밖에 나올 수 있지, 수도에서는 푸둥을 본 적 있는 귀족들이 단박에 정체를 알아차리게 될 것이기에 저택 밖에 내놓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푸둥이 나중에 좀 더 커서 푸엥과 같은 취급받았다는 거 알면 얼마나 황당할까.’
그렇지만 두 마리 동물은 바다를 접하고 약간 흥분한 상태였다. 이러다 바다에 훌떡 달려들 수도 있으니 애초에 잘 막아야 했다. 심지어 푸엥은 이제 덩치도 많이 커져서 작정하고 달려 나가면 레이 혼자 막아 내기 버거웠다.
레이는 푸엥 옆에서 제 걸음에 맞춰 산책 줄을 하고 걷고 있는 푸둥을 바라보았다.
강아지 크기였던 푸둥은 루이반으로 오고 나서 중형견 정도로 커졌다. 자라난 건지, 모습을 바꾼 건지는 모르겠지만 루이반으로 온 후 세상 편하고 즐거운 얼굴로 쑥쑥 성장하고 있다는 건 알았다.
푸둥은 하루가 다르게 알아듣는 말도 늘었고 주변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눈치 있게 행동했다.
몇 시간이 걸려 도착한 먼 곳에 레이가 자신과 푸엥을 함께 데려왔다는 건 이곳에서 며칠은 머물 예정임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푸둥은 루이즈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잘 곳을 정했다. 레이가 자는 침대 아래, 푸엥의 옆이었다.
킹크랩 상품화, 출하를 위해 루이즈에 왔다. 리담에 본격적으로 이 생물이 자리를 잡으려는지, 좀 더 먼 바다로 조업을 나간 어부들에게서 킹크랩을 추가로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걸 잡아 왔어야 하는데.’
아쉬웠지만 아직은 킹크랩이 마물이 아니라는 소식 정도만 전해진 터이니 무시할 만했다.
앞으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커다란 게가 전매권을 받아 낸 상품이며 루이반이 관리를 한다는 인식을 확실하게 심어 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레이는 새벽부터 루이즈 어시장에 나가 현장 파악을 하고 이번에 새로 신청된 전매권을 알리고 왔다.
전매권이 발효되면 본래 관련자들에게 1순위로 공문이 도착하기 마련이다. 현장 사람들이 일을 하는 데 있어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여 테일러는 굳이 그러실 필요가 없다고 말렸지만 레이는 직접 현장에 나섰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덥석 시작하는 건데 적어도 시장이 움직이는 건 봐야 할 것 같아서였다.
킹크랩이라는 새로운 존재에 대한 사실을 어업계에 확실히 알리려면 직접 대면이 가장 좋다. 르아넬로는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매출을 내고 있는 집안이고, 레이는 그걸 곁에서 보고 배우며 자랐다. 우두머리가 모르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건 상식이었다.
테일러와 라미엘의 염려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수십의 광산과 상단 여러 개를 운영 중인 상업의 달인 가문에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알려 주고 있는데 따르지 않고 있으니 답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첫 시작은 효율만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은 레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킹크랩 상품화를 위해 루이즈로 간다고 할 때, 라미엘은 마님 전담이라 당연히 함께 갈 케이와 엘 말고 크레하도 추가했으며 심지어 테일러까지도 곁에 붙여 주었다. 한창 일이 바빠 테일러도 결코 저택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 인력을 딸려 보낸 것이었다.
이걸 보고 애정 둔치 윌포프도 크게 충격을 받았다. 드디어 루이반의 집사도 레이의 위상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 것이다.
“아후. 너무 피곤하다.”
레이가 소파 위로 풀썩 엎드렸다. 새벽에 어시장을 돌고 아침에 반려동물 둘을 산책시키고 돌아오면 하루가 다 끝난 것같이 느껴졌다.
“매일 그리 술을 드시니 피곤하시죠.”
케이가 레이에게 따뜻한 꿀물을 내밀었다. 술을 마신 다음 날엔 물에 꿀을 타서 따뜻하게 달라는 마님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새벽 어시장이 그렇게 재밌는 줄 몰랐지. 그런 걸 어떻게 술도 없이 먹어.”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만…….”
그것 봐라, 하는 얼굴로 레이가 씩 웃으며 물었다.
“꿀은?”
“잔뜩 넣었습니다.”
레이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곤 따뜻한 꿀물을 쭉 마셨다.
루이즈의 하루는 몹시 빨랐다.
한국 같은 냉동 저장 시설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루이즈 어업은 해산물이 상하기 전에 빠르게 운반하는 것이 가장 관건이었다.
마력석을 이용한 냉동 창고가 있기는 했지만 이용료가 많이 비싸기 때문에 고급 생선이나 황실, 수도 귀족들이 먹는 것들 위주로 저장해야 타산이 맞았다.
하지만 저렇게 고급으로 관리하는 해산물의 양보다 평범한 사람들이 주로 먹는 양이 더 많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부들은 최대한 날이 덥지 않을 때 작업을 해야 했다. 밤 시간이 좋지만 너무 어두워서 작업이 어려우니 새벽 시간을 이용했다.
특히나 여름엔 해산물이 빨리 상하기 때문에 더더욱 바빴다. 하여 루이즈는 새벽이 가장 활발하고 바쁜 도시였다.
새벽 어시장에는 도소매인들이 사업적인 거래를 하는 것 외로 주변에 가판이 열리곤 했다. 상품 가치는 떨어져서 팔 수 없으나 먹는 데는 아무 지장 없는 것들을 떨이로 팔거나 요리해서 파는 자리였다. 수도나 다른 도시에서 먹던 것의 반값, 반의반 값도 되지 않는 저렴한 가격인데 갓 잡은 생선이라 그런지 훨씬 신선했다.
판매 상품이나 메뉴는 그날 잡아 온 생선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종류에 선택권은 없지만 싸고 맛있는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아 새벽의 루이즈는 활기가 넘쳤다.
추운 날씨를 감안해 몸을 녹일 수 있는 루이즈 지역 술도 곁들이는 건 당연지사였다. 찬거리를 사러 온 주부도 큰 잔으로 네 잔씩 먹고 행복하게 웃으며 돌아가는 게 루이즈의 새벽 어시장이었다. 그러니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안 마실 수가 있겠는가.
“케이랑 엘이 나 지킨다고 안 마셔서 그래. 내일부터는 두 사람 돌아가면서 한 잔씩 같이 마셔 봐.”
“저흰 마님 지켜야죠.”
“아이, 그러니까 한 명만.”
루이즈 상인들은 처음엔 딱 봐도 곱게 자란 티가 팍팍 나는 외지인이 나와 얼쩡거리니 경계하고 무시하거나 귀찮아했다. 그럼에도 레이는 닷새를 꾸준히 새벽시장에 나가 얼굴을 보이고 말을 걸었다. 어부나 상인들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시장에 오는 사람들과도 불쑥 어울려 놀았다.
레이가 새로운 게의 전매권 주인이라는 말에 루이즈 어부들과 어시장 상인들은 돈만 많은 세상 물정 모르는 초짜 사업가가 남아도는 돈으로 별 희한한 짓거리를 했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더불어 저런 멍청한 짓을 한 사람이니 당연한 수순으로 거들먹거리며 설칠 줄 알았는데 상인들의 예상과 너무 달랐다.
거만하지도 않고 가문을 들먹이지도 않았으며 정말 진심으로 배우러 온 사람인 티를 팍팍 냈다. 뭐든 물어보고 귀찮게 하며 쪼르르 따라다니는데 그 와중에 눈치는 빨라서 일을 하느라 바쁜 사람들을 귀찮게 하지는 않았다.
“그럼 게 잡는 일은 따로 하는 사람이 없어?”
“돈도 안 되는 걸 누가 해?”
처음으로 대꾸가 돌아오자, 레이는 씨익, 됐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원래 대화를 자주 했던 사람처럼 쭉 말을 이었다.
“돈 되면 할 거야?”
“많이 주면 해야지.”
“맞아. 역시 그렇지. 알았어. 나도 그거 줘.”
“이걸? 그쪽이 먹긴 험할 텐데.”
그러면서 선상에서 어부들이나 먹는 멍게를 거부감도 없이 덥석 받아먹었다.
멍게도 리담의 주력 해산물이 아니었다. 어쩌다 그물 안에 있어 어부들도 이게 뭔가 했던 생물인데, 그 안의 말캉한 살을 먹어도 된다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된 참이었다.
바다향이 강해 어부 중에도 먹는 사람이 얼마 없었고 외형이 특이하고 먹을 것같이 생기지 않아 시장에 내놓지도 않은 생물이었다.
“으, 이건 아직 못 먹겠다.”
“아직?”
“응. 술이랑 맛있는 소스가 있으면 그때 먹을래.”
그게 시작이었다.
아무리 레이가 평범한 척을 해도 곱상한 외모와 품격 있는 태도, 수도말을 고상하고 매끄럽게 구사하는 레이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탈한 행동으로 수더분하게 루이즈의 새벽시장에 녹아들었다. 사람들 사이에 껴서 이것저것 하도 잘 먹고 돌아다니다 보니 레이는 짧은 시일에 어느덧 어시장 명물이 되었다.
“최근에 잡힌 큰 게, 킹크랩? 그거 전매권 산 사람이라는데 여기 사람 같아. 평생 어부인 내 남편도 못 먹는 멍게를 생으로 다 먹더라니까.”
레이에 대한 평가였다.
테일러는 레이가 짧은 시간에 사람들 틈에 스미는 걸 보고 그녀에 대한 생각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라비던의 마녀, 막말 폭풍.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레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헛소문을 만들었던 게 분명하다.
저 별명은 레이와 절대 어울리지 않는다. 누가 되었든 레이를 겪은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가진 선한 본성에 이끌려 소문 따위는 잊게 된다. 자신이 그런 것처럼.
레이에겐 자연스럽게 사람들 속에 스며들고 그들을 이끌어 나가는 힘이 있었다. 만약 그녀가 라미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만났다면, 그 사람의 가치는 이전과 비견되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을 것이다.
레이가 라미엘을 선택해서, 라미엘이 레이를 만나서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속이 따뜻하게 꽉 차 있는 사람이 좋은 상황에서 태어나 주변 환경에 흔들리지 않게 자라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레이알렉시스는 정말로 귀한 사람이었다.
라미엘이 레이를 애지중지 품는 이유를 더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초반에 레이를 내심 가볍게 여겼던 게 미안할 지경이다.
“며칠 내내 일찍 일어났더니 엄청 졸리네. 30분만 자고 일어날래.”
테일러가 침실로 가려는 레이를 막았다.
“창고 구상하신다면서요.”
루이즈에 와서도 루이반 일을 손에 놓지 못해 쉴 틈 없이 일하는 테일러였다. 그럼에도 레이에 관한 것도 뭐 하나 허투루 보내는 것 없이 꼼꼼하게 돌봤다.
“음, 그거 일단 돈이 좀 들더라도 테일러 말처럼 올해 일회용으로 하려고. 이제 됐지? 나 잠깐만 잘게.”
내년에도 킹크랩이 리담에 나타날지, 그 양은 얼마나 될지 확인해야 하니까 섣불리 관련 시설들을 만들 순 없었다. 비용을 좀 감수하더라도 테일러 말대로 단기간짜리 임대 창고를 개설하는 게 나았다.
그 단기 임대 창고를 제작하기 위한 일이 필요한데 마님께선 지금 주무신다고 하신다.
“미루시면 루이반으로 돌아가는 게 더 늦어지실 텐데요.”
라미엘 없는 썰렁한 침대에서 잔 지 오늘 밤까지 치면 여드레. 테일러의 말이 레이의 심장을 찔렀다.
“……라엘 잘 있겠지? 푸둥이라도 두고 올 걸 그랬나.”
“아뇨. 둘 다 데려오신 건 아주 잘하신 일입니다.”
공작님이 퍽이나 동물로 허전함을 달래시겠습니다.
레이 발치에 있던 푸둥이 제 이름이 들리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이참. 테일러가 그렇게 말하니까 일해야 하잖아.”
레이가 비실비실 책상으로 걸어갔다.
“마님, 정말 하실 겁니까.”
테일러가 물었다. 일단은 마님을 도우라니 오긴 했는데 영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게를 팔자니. 그것도 전매까지 얻어 내서.
저렴하게 받아 낸 전매권이라고 해도 지금 창고 비용이나 어업 비용 등을 모두 계산하면 킹크랩이라고 하는 저 게를 웬만한 고급 생선 뺨치는 가격으로 팔아야 할 수준이다.
그런데 품목이 리담에서 대단한 식재료로 쳐 주지도 않는 게다. 먹으면 먹고 말면 마는 그 게. 그걸 비싼 돈 주고 사 먹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아차, 내가 제일 중요한 걸 안 했구나? 먼저 시식을 시켜 줬어야 하는데.”
미래 홍보 계획은 레이의 머릿속에 다 짜여 있었다. 수도 귀족인 자신이 가진 모든 걸 털어 내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것만큼 효과 좋은 판매 전략, 더는 없다.
하지만 저것보다 더 빠르게 해야 할 건, 킹크랩을 의심하는 루이반 가솔들에게 이건 되는 사업임을 확실히 인지시켜 주는 것이었다.
“잠시 기다려 봐.”
레이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