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고요한 루이반
마님이 움직일 때마다 주방장은 지옥을 오가는 듯 안절부절못했다.
“저, 마님, 제게…….”
“아냐, 일단 내가 해 보고.”
레이는 유주와 킹크랩을 먹은 이후, 마트나 인터넷에서 킹크랩보다 조금 더 저렴한 스노우크랩이나 홍게 같은 것을 사서 집에서 종종 쪄 먹고는 했다. 그게 정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킹크랩 사업은 오롯이 레이가 한국에서 겪은 대형 갑각류에 대한 기억으로 벌이고 있는 것이다. 정체는 아무도 모르는 게고, 먹는 방법도 그 무엇도 모르니 레이가 해야 했다.
레이는 감히 마님이 일을 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주방장을 물리고 직접 킹크랩을 쪄 냈다.
“이거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한국에서 먹던 그 맛이다. 살이 오동통하게 오른 붉은 게는 풍미와 감칠맛이 넘쳤다.
이제 제 사람들도 맛을 볼 차례다.
케이, 엘, 크레하, 테일러.
루이반 가솔 넷은 식당에 앉아 마님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마님이 다들 기대하라며 30분 뒤 식당으로 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크레하는 주방 근처에서 계속 마님 호위를 하다가 지금 막 쫓겨나 함께 자리에 앉은 차였다.
안절부절못하던 주방장과 별장 집사, 레이를 전담하는 별장 하녀들도 자리에 함께했다.
“마님께서 저희는 왜…….”
별장 하인들이 물었다. 루이반 본 저택에서 내려온 으리으리한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있으려니 약간 주눅이 든 것 같은 표정이었다.
“마님께서 다 같이 알아야 한다고 하시네요.”
엘이 대답하는 순간 레이가 식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어나지 마. 다들 앉아 있어.”
서빙 카트를 돌돌 밀며 식당으로 오는 레이를 보니 다들 마음이 너무 심하게 불편했다.
세상 어느 누가 고용주한테 일을 시키고 대접을 받나. 루이반 본가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면 라미엘 손에 당장 목이 잘려 나갔어도 불만이 없을 일이었다.
라미엘이 이 자리에 없어 너무도 다행이었다. 정말이지 두 번 다신 받고 싶지 않은 식은땀 나는 대접이다.
“짜잔.”
레이가 내민 커다란 흰 접시에는 처음 보는 음식이 가득 차 있었다. 붉은색과 흰색이 오묘하게 섞인, 결이 보이는 길쭉한 살덩이에서 맛있는 냄새가 났다.
“조금씩 가져다 먹어 봐.”
“저, 마님, 이걸 대체 어찌 먹어야 하는지…….”
처음 보는 음식이라 뭘 어찌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커다란 접시 안의 작은 그릇엔 진한 노란색에 연둣빛이 섞인, 상한 계란 노른자 같은 색감의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그냥 이렇게 한입.”
레이는 자리에 앉아 발라 온 킹크랩 살을 포크로 푹 찍어 입 안에 넣었다. 한입, 한입 먹을 때마다 감동이 몰려왔다.
마님의 솔선수범에 하나둘 포크를 들고 정체불명의 요리를 입에 넣었다.
“음?”
“어어.”
입에 들어온 살을 씹자 미심쩍어하던 사람들의 표정이 서서히 변화했다.
“이게 뭐예요?”
“너무 맛있어요. 이런 맛은 처음인데.”
엘과 케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다시 한 입 더 맛을 봤다.
“게랑 맛이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고 훨씬 더 달아요. 즙도 많고.”
“처음 느끼는 식감인데 입에서 부드럽게 흩어지네요.”
루이즈 사람들도 좋아했다. 호평 일색이었다.
‘역시 내 입에 맛있으면 남들 입에도 맞을 줄 알았지.’
시식회는 대성공이었다.
“맛있지? 여기 그릇에 담긴 거 찍어 먹어 봐.”
레이의 말에 다들 바삐 포크를 놀렸다.
여기서 내륙인과 바닷가 사람이 갈라졌다. 루이즈에 살던 별장 소속 사람들은 내장까지 싹 다 먹었고 루이반 본가 사람들은 그냥 살만 먹는 것을 더 선호했다.
레이는 이 부분도 체크를 해 뒀다.
“이게 그 킹크랩이라는 겁니까?”
테일러가 물었다.
“응. 지금 공작령 앞바다에 있는 애들이야.”
“제가 많이 무지했습니다.”
테일러는 인정했다.
이건 되는 장사다. 이 정도 맛과 풍미라면 무조건 팔 수 있다.
“이상하게 생겨서 맛이 좋은지 몰랐어요.”
“그러게요. 덩치가 커서 그런가 먹을 것도 많네요.”
“게가 이렇게 맛있는 거였군요.”
싱싱하지 않은 꽃게 살을 버터에 구운 정도만 먹어 봤으니 게 자체로도 얼마든지 맛있다는 건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게가 판매에 언급되는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게가 있어도 잘 먹지 않았다. 다른 생선을 먹은 후 최후로 남은, 신선하지 않은 게만 접하게 되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신선하지 않고 먹을 것도 없는 게는 대강 살을 발라 내 버터에 볶아 장식으로 올리는 정도밖엔 할 수 없었다.
“생긴 건 좀 그래도 맛은 좋아. 다들 좀 더 먹고 싶으면 도와줄래? 주방에 두 마리 더 있어.”
이 말에 주방장뿐만 아니라 테이블에 앉아 있던 모든 이들이 활시위를 벗어난 화살 같은 속도로 몸을 일으켰다.
두 번이나 살 떨리는 대접을 받을 만큼 간이 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시각 루이반.
펜이 종이 위를 지나가는 소리만이 가득한 집무실에 탁 소리가 났다. 라미엘이 펜을 내려놓는 소리였다. 그 순간 고요가 집무실을 집어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숨 막히는 정적이 몰아닥쳤다.
답답한 기분이 들어 라미엘은 집무실 창을 열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이라 창을 열어도 바람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저택이 원래 이렇게 조용했던가.’
며칠 내 쥐 죽은 듯 고요한 루이반이 어색했다. 평생을 이곳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이상하게 내 집이 아닌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테일러가 루이즈로 갔기 때문에 그의 일을 넘겨받은 두 명의 보조 행정관이 쉴 틈 없이 업무 보고를 하고 고강도의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신없이 일을 할 때는 잠시 잊히지만 이렇게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영 허전하고 헛헛한 감각이 몰아쳤다.
이런 감정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쓸쓸함’이었다. 텅 빈 것처럼 적막한 저택에서 라미엘은 쓸쓸함을 느꼈다. 그 이유가 너무도 명확하기에 원인을 찾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고작 한 명 없는 것뿐인데.’
라미엘뿐만 아니라 루이반의 모든 이들도 레이의 부재를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사람이 넘쳐나는 루이반이다. 그런데도 고요한 기분이 들었다.
푸엥이라도 있으면 강아지가 저택을 열심히 휘젓고 다니며 내는 톡톡톡, 하는 발톱소리라도 들렸을 텐데, 마님의 최고 흔적인 푸엥마저도 없으니 너무나 허전했다.
사냥제 때 주인이 없어 허전했던 건가 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게 아니라 마님의 부재가 더 컸던 듯했다.
그저 몇 개월 전, 예전의 루이반으로 아주 잠시 돌아간 것뿐인데 영 어색한 느낌이었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그러게. 원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복도를 지나가는 빨래방 하인들의 자그마한 목소리까지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
똑똑.
“헬라 공작령 다리 보수 보고서가 올라왔습니다.”
쉴 새 없이 일거리가 몰려와 다행이었다. 라미엘은 일감을 받아 들고 창문을 닫았다.
간략하게 보고를 마친 보조 행정관이 집무실을 나서자 다시금 정적이 감돌았다. 라미엘이 펜을 다시 집어 들려고 하는데 책상 앞 공간이 검게 물들었다. 게이트가 열리고 있었다.
“레이?”
“아, 됐다!”
가벼운 옷차림의 레이가 무언가를 들고 라미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8일 만에 보는 레이다.
“라엘, 바빠요?”
레이가 나타난 순간 허전함, 적막감 같은 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비로소 이 공간이, 저택이 꽉 찬 듯한 기분이었다.
“근데 바빠도 안 돼. 잠깐만 시간 내 줘요.”
당장 황제가 저택에 찾아와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레이에겐 얼마든지 내줄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레이야말로 바쁜 거 아닌가요? 여기 올 시간이 있어요?”
헤덴이 준 게이트 사용 목걸이 덕분에 라미엘에게 오긴 쉬워도,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면 마차와 열차를 타고 몇 시간이 걸려 돌아가야 한다.
“헤덴 예하를 졸라서 담판 좀 짓고 왔어요. 앞으로 최대 15분까지 사용할 수 있는 왕복 게이트 이용권을 받아 온 참이에요.”
머리카락 기증 이후 연구 속도가 좀 더 빨라졌다는 소식에 레이는 바로 게이트 이용 권한 확대를 요구했다.
이번엔 초록색으로 머리카락을 염색한 헤덴은 요청을 단박에 거절했지만, 레이가 한국 문명에 ‘전화’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하나 더 건네는 것으로 협상이 완료되었다.
사전에 모든 정보를 풀지 않아 다행이었다. 앞으로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요런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서 교환할 것이다.
레이의 협상에 헤덴은 ‘고얀 놈’이라고 했지만 잠깐이나마 이렇게 라미엘의 얼굴을 볼 수 있으니 들을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레이가 집무실의 테이블에 가져온 것을 올려놓았다.
“그게 뭐예요?”
“루이즈의 모든 이들하고 먹었는데 라엘이 빠질 순 없잖아요. 제일 핵심이신데.”
라미엘용 킹크랩을 한 마리 쪄 내자마자 게이트를 열어 들고 왔다.
“식기 전에 빨리 먹어 봐요. 라엘도 놀랄 거예요.”
지금 느끼는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라미엘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 먹기 전에 잠깐…….”
레이가 팔을 벌리자마자 라미엘은 고개를 숙여 품에 안기듯 하며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라미엘의 볼과 입술 위에 봄비처럼 가벼운 키스가 톡톡 내려앉는다.
“이 이상은 다음에. 지금은 이게 더 급해요.”
깊어지려 하기 전에 레이가 라미엘의 품에서 포르르 빠져나갔다.
‘나는 이게 더 급한데.’
하지만 레이의 표정을 보니 지금은 참아야 할 말이었다.
“짜잔.”
뚜껑을 열자 따뜻한 김이 나는, 해체된 거대한 붉은 게가 보였다. 게의 다리 일부는 껍데기가 벗겨져 있어 붉은 살이 그대로 보였다.
“이걸 먹는 건가요?”
“네. 여기 잡고 이 붉은 살을 먹어요. 사실 생긴 걸 보면 거부감 느낄까 봐 살 다 까서 오려고 했는데 식을까 봐 마음이 조금 급했어요.”
레이가 다리 하나를 잡아 라미엘의 입에 대 주었다.
그녀 말대로 솔직히 약간은 거부감이 드는 생김새였으나 레이가 주는 거니 당연히 먹어야 했다.
“……이게 킹크랩, 인가요?”
생김새와는 전혀 다른 달콤한 풍미가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아주 익숙한 맛과 질감은 아니지만 분명히 ‘맛이 있는’ 상품이다.
“레이가 왜 전매권을 사려고 했는지 알겠어요.”
“가치 있죠?”
“레이가 사겠다고 했으니 가치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만 그 가치가 내 생각보단 훨씬 더 큰 것 같군요.”
겉치레 같은 말은 안 하는 사람이 해 주는 말이니 더 크게 와 닿았다.
“이 남자, 나한테 이렇게 푹 빠져서 어떡해.”
레이의 말에 라미엘이 소리를 내서 웃었다.
“게이트, 자주는 사용 못 한대요. 예하 컨디션이나 체력에 따라 쓰는 거니까 급할 때만 사용하래요. 그래서 자주 오지는 못할 거예요.”
그러면서 레이는 다리 하나를 또 라미엘에게 건넸다.
“집게도 별미니까 꼭 먹어요. 다리랑 좀 다른 맛이야. 몸통은 나중에 요리해 줄게요.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그냥 왔어.”
“이걸 레이가 요리한 거예요?”
“화내지 마요. 나 말고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라미엘의 빡침 포인트를 콕 집어내 해명하면서도 레이는 벌써 게이트가 닫힐 시간이 되었다는 사실에 울고 싶어졌다.
레이는 빠르게 루이즈의 상황을 설명했다.
“창고랑 시장 일은 얼추 마무리됐으니까 테일러가 곧 루이반에 올 거예요. 그때까지 조금만 힘내요.”
“내가 원하는 건 일거리를 줄여 줄 테일러가 아니에요.”
라미엘의 대답에 레이가 방긋 웃었다.
“알아요. 라엘이 테일러를 원한다고 했으면 나도 정말 서운했을 거야.”
라미엘이 조금씩 표현을 하기 시작한다. 뿌듯한 기분이다.
“일이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네요. 하나 처리하면 또 할 일이 생겨.”
사실은 테일러와 함께 라비던으로 돌아오려 했으나 킹크랩 수송과 관련한 일이 생겨 헬라로 가야 할 판이었다.
“내일이나 모레쯤 헬라로 갈 거예요. 헬라에서 일 마치면 바로 라비던으로 올 테니까 그때 봐요.”
“헬라 일, 많이 걸려요?”
“아뇨, 거긴 크게 시간 걸릴 일 없어요. 하루면 충분해요.”
더 상세하게 루이즈에서 있는 일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게이트 시간이 다 되었다. 레이는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라미엘에게서 떨어졌다.
“킹크랩 라엘이 다 먹어요. 전부 당신 거야. 그리고 나 헬라 가면 베르니에서 지낼 거예요. 괜찮죠?”
게이트에 들어서며 레이가 말했다.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릴.”
대답 대신 활짝 웃는 레이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게이트가 닫혔다.
다시금 조용해진 집무실엔 아직 따끈한 킹크랩만 남았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꽉 채워진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