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88화 (88/160)

88화. 필경사 (1)

“실수했어. 베르니를 받았어야 했는데.”

피터가 만들어 준 핫도그를 오랜만에 먹으며 레이는 후회에 잠겼다.

물론 지금의 라미엘이라면 베르니가 아니라 루이반을 달라고 해도 덥석 안겨 주겠지만, 그래도 공적인 일로 베르니를 받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고심 끝에 킹크랩을 수도까지 보내기 위한 판로에 헬라를 포함시키기로 했다.

현재 루이즈와 수도를 오가는 열차는 텔덱사에서 운영하는 노선 하나뿐이었다. 이 노선은 총 열한 개의 역을 지나쳐 가는데 한 역당 짧게는 30분, 길게는 한 시간 정도가 소요되어 루이즈까지 가려면 오래 걸렸다.

하지만 유일한 열차였기에 이용객은 많았고 세로로 노선이 길기 때문에 역마다 도시가 계속 바뀌어서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후발 주자로 뛰어든 르아넬로는 과감하게 승부수를 띄웠다. 루이즈와 수도 간 열차 노선을 헬라 한 군데만 거치는 급행으로 구성한 것이다.

헬라와 루이즈 사람들이 열차를 얼마나 이용할지 정확한 수치를 알 수 없어 오스카는 두려워했지만 레이의 권유로 시도했다.

헬라는 수도 다음으로 큰 도시다. 수도의 비싼 물가를 피해 생활권을 옮긴 사람들이 기거하면서 세력을 키운 헬라는 열차 개통 이후 한 시간이면 수도를 오갈 수 있는 편의성 덕에 리담의 수도 다음가는 제2의 도시로 성장했다.

헬라에 사는 인구도 상당하니 루이즈 열차가 개통되면 필연적으로 물자나 인적 자원이 이동될 확률은 높아진다. 레이는 점점 커지는 헬라의 인구와 미래를 보고 오스카에게 과감히 투자를 권한 것이다.

처음 공사할 때는 이렇게 될 줄 당연히 몰랐는데, 지금 루이즈에서 해산물을 수도로 보내기 위한 최적의 루트가 마련된 셈이다.

르아넬로의 열차가 개통되면 루이즈에서 헬라까지 두 시간 반 정도, 수도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면 도착이다. 지금보다 시간이 절반가량 줄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레이는 킹크랩의 주력 거점을 헬라로 정했다. 수도에서도 루이즈에서도 비슷한 시간을 들여 도착할 수 있는 장소이고, 사람들도 많이 있어 제격이었다.

이런 사업을 위해선 르아넬로 열차와 제휴를 맺어야 하고, 헬라에서 킹크랩을 담당할 인력들이 필요했다.

일단 가장 먼저 우선되어야 할 것은 헬라에도 루이즈처럼 킹크랩을 보관할 창고를 하나 두는 것이다. 하여 루이즈에서 테일러가 골라낸, 함께 일을 했던 어부들과 인력 모두가 레이와 함께 헬라에 와 있는 중이었다.

“루이즈에서 했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똑같은 일을 하면 돼. 지난번 작업 과정 기억나지? 혹시 몰라 적어 뒀으니까 필요하면 참고해.”

“저, 근데 필경사는 어디에…….”

아, 맞다.

루이즈에서는 테일러가 저들 곁에 붙어 있었지만 그가 루이반으로 돌아갔으니 미처 생각 못 한 공백이 이렇게 생겼다. 루이반이나 수도에서는 주변에 글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보니 망각한 사실이었다.

일꾼들에게 문서화된 일을 지시하려면 필경사를 고용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레이의 불찰이었다.

“일단 작업 먼저 시작해. 모르는 일 아니지? 작업하다가 모르면 바로 물어보고. 필경사는 바로 고용할게. 미안. 깜빡했어.”

까마득한 마님의 사과에 일꾼들이 놀란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수도 이외 도시에서는 신분제가 수도만큼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지 않다 해도, 그간 대단한 사람들이 절절매며 마님을 깍듯이 모시는 광경을 보아 왔기에 절로 분위기를 익히게 되었다.

소문을 듣자하니 수도 귀족들은 여간해서 사과나 고맙단 말도 잘 안 한다고 하던데, 별것 아닌 일로도 냉큼 사과를 해 오시니 괜히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어유, 아닙니다.”

“하던 일 똑같이 하면 되는 거니까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헬라 르아넬로 역 근처에 있는 땅에 킹크랩 창고를 짓기로 했다. 루이즈와 똑같이 일회성으로 짓고 올해와 내년의 수확량을 확인한 뒤 제대로 된 창고를 만드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공사가 시작되는 것을 확인하면 레이는 냉동 보관을 할 수 있는 마력석을 구하러 황실 마법부로 가야 한다. 더불어 헬라 역 이용을 위해 르아넬로가와 업무 협약도 해야 한다.

드디어 수도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게 며칠 만인지.

테일러가 루이반에 도착하면 황실 마법부와 일정을 잡고 연락을 한다 했으니 수도에 가도 당분간은 느긋하게 놀 수는 없다. 그래도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 하나로 충분히 마음이 들떴다.

“필경사부터 구해야겠네.”

레이의 말에 샤메인이 빠르게 대답했다.

“베르니 이름으로 공고를 내면 구하기 훨씬 쉽습니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진행하겠습니다.”

“응. 부탁할게. 그런데 샤메인, 헬라에 글 읽을 줄 아는 사람 많아?”

레이의 질문에 샤메인이 잠시 헬라를 떠올려 보고 대답했다.

“일반적이진 않습니다. 보통은 어느 정도 직책을 맡은 사람들, 황실이나 귀족 가문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나 읽을 줄 아는데, 그 때문에 요즘에 조금씩 헬라에서도 글을 배우고 싶어 하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긴 합니다.”

수도 이외로는 아무리 제2 도시인 헬라여도 타 도시와 비슷한 양상인 듯했다.

“그렇구나.”

루이즈의 새벽 시장이 생각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매권의 내용을 읽고 안다기보다는 거기 찍힌 황실 인장과 상품을 상세하게 그린 그림을 보고 내용을 눈치챘다.

시장이 열릴 때 도매상 근처에서는 여럿의 필경사가 문서 대필을 하고 내용 확인을 하느라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 잠깐 외출 좀 다녀올게.”

“네, 마님. 준비하겠습니다.”

“내가 입고 나갈 평범한 겉옷만 준비해 주고 케이랑 엘은 여기 있어. 크레하랑 둘이서 다녀올게.”

최대한 평범한 제국민처럼 보이는 상태에서 공작령이 아닌 곳의 헬라를 경험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호위는 크레하 하나만 선정했다.

케이와 엘은 자신을 너무 극진하게 모셔서 탈락이다. 저 둘은 여느 친구 사이처럼 보이게 굴라고 해도 고장 난 장난감처럼 뚝딱거릴 게 뻔했다.

남는 건 가끔 얘가 기사단장이 맞나 싶은 수박바뿐인데, 마침 평범한 제국민을 제일 잘 가장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마차 준비됐습니다.”

마부의 보고 소리가 들렸다.

“경, 가자.”

레이는 샤메인이 구해 준, 제국민이 입는 평범한 일상용 드레스를 착용하고 헬라의 시가지로 나갔다.

수도보다 눈이 더 많이 내렸다는 헬라는 마차나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을 제외하면 걷기도 힘들어 보일 만큼 눈이 쌓여 있었다. 멀끔한 길을 보니 헬라의 유동 인구가 몸으로 와 닿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나와서 자신의 땅도 아닌 거리의 눈을 치웠을 리는 없으니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눈이 쌓일 틈도 없었다는 말이 된다. 어찌 보면 수도보다 더 활발한 도시였다.

“조심하십시오. 이쪽은 눈이 조금 많이 쌓였습니다.”

크레하가 눈이 쌓인 곳을 막아서며 마차에서 내리는 레이를 에스코트했다.

“크레하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진짜 기사 같지가 않았는데.”

“지금은요?”

“방금 너무 번듯해서 진짜 기사인 줄 알았어.”

말을 하고 보니 이상했다.

수박바는 기사 맞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기사가 맞는데 얘는 왜 이렇게 아닌 것 같을까.

“……마님, 제가 누구인 줄은 아십니까?”

“응. 놀랍게도 잘 알고 있어. 마부 아냐?”

레이의 말에 크레하가 킬킬 웃었다.

“잘 아시네요.”

“이따 돌아갈 때도 잘 부탁해.”

“안전히 모시겠습니다.”

오랜만에 찾은 르아넬로의 헬라 역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날이 춥고 눈이 많이 내린 탓인지 평소보다 더 붐비는 듯 보였다.

“뭐 하나 보네.”

역사 중앙 홀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키가 큰 크레하가 앞을 내다보더니 대본 낭독회 중이라고 했다.

어떤 필경사인지만 잠깐 보고 가자는 레이의 의견에 두 사람이 군중 속으로 들어갔을 때.

“페티!”

“오, 말리아!”

레이와 크레하가 눈빛을 교환했다.

<불같은 사랑>이 헬라에 상륙했다.

일이 바빠 아직도 3부 대본을 못 읽고 있어 통탄스러웠는데 마침 지금 필경사가 열연하는 게.

“3부 같은데요.”

“그치?”

두 사람은 뭘 어쩌자고 말을 하지도 않았지만 짠 것처럼 동시에 돈을 지불한 후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페티, 저 쳐 죽일…….”

앞부분을 놓쳐서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말리아에게 몹시 차갑게 굴고 있었으며 심지어 다른 여자랑 돌아다녔다.

너무 열 받아 욕을 하는데 레이 옆에 앉아 있던 푸근한 인상의 여자가 말해 줬다.

“쟤가 마차에 치여서 지금 기억을 잃었어요.”

‘미친. 기억 상실도 있어!’ 극작가가 사실 한국인인 거 아니냐?

그 후 점점 기억을 되찾은 페티는 후회남 루트를 타 말리아의 발닦개 노릇을 하며 데굴데굴 굴렀고, 여차저차 두 사람이 드디어 결혼에 골인해 불같은 키스를 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났다.

“저걸 눈으로 봤어야 했는데.”

“그러게요. 기억 상실이라니. 정말 생각도 못 했습니다.”

“<불같은 사랑>은 키즈웰과 루이즈에서 이미 대흥행을 하고 이곳, 헬라에서 조만간 공연을 할 예정입니다! 실제 극도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필경사의 연극 홍보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두 사람도 여느 사람들처럼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헬라 오길 잘했네.”

“수도까진 안 올까요?”

“수도가 받아들이기에 너무 선진적인 연극이라 잘 모르겠네.”

“하긴 수도 연극에 비하면…….”

크레하가 고개를 끄덕이다 돌연 레이를 막아섰다. 그녀가 이유를 묻기도 전에 불쑥 처음 듣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왜 둘만 있어?”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레이가 덜컥 놀라 작게 소리를 질렀다.

“깜짝이야!”

루이즈에서 봤던 소매치기였다.

크레하는 그의 기척이 느껴졌지만 다가올 것 같지도 않고 해코지를 할 것 같지도 않아서 잠자코 있던 중이었다. 예의주시하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불쑥 접촉할 줄은 몰랐다.

소년이 왜 여기까지 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이에게 접근한 걸 보니 루이즈에서 따라온 듯했다.

“으음? 너 혹시 루이즈에 있지 않았니?”

자신과 라미엘을 보고 연극을 하냐고 물었던 그 소년이다.

‘얘가 여긴 왜 와 있냐.’

레이의 질문에 소년이 답했다.

“맞아.”

크레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줄 거 없는데.”

“뭐 달라고 온 거 아냐.”

뭐지. 두 사람 사이에 뭐가 있던 건가.

레이의 눈동자가 바쁘게 두 사람을 오갔다.

“근데 왜 둘이야? 그 하얀 남자는? 그 사람이 남편 아냐? 둘이 바람났어?”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질문들이 소년의 입을 통해 줄줄 흘러나왔는데 압권은 마지막이었다.

‘둘이 바람?’

크레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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