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필경사 (2)
“둘이 바람났어?”
“……이 새끼, 내가 입에도 담지 못할 정도로 세상에서 제일 끔찍하게 죽는 꼴이 보고 싶은 모양인데.”
다신 없을 충격적인 소릴 들은 얼굴로 크레하가 제 귀를 털었다. 이 소릴 라미엘이 들었다면…….
‘상상도 하기 싫어.’
실제 벌어진 일도 아니었고, 레이와 크레하 두 사람 사이에 그 어떤 일도 없었지만 저딴 소릴 들었다는 자체가 공포였다.
“더 이상 그런 불경스러운 소릴 하면…….”
크레하가 아이를 쫓아내기 위해 가볍게 살기를 뿌렸다.
신체만 보호하는 게 아니라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님을 지켜야 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단장이 떠나 있는 게 좋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레이 걱정에 크레하를 붙여 준 라미엘이다. 주인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지금의 일은 크레하의 실책이었다. 저런 녀석과 마님은 접촉도 해선 안 됐다.
뭔지는 모르지만 자기를 매섭게 찌르며 옥죄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소년이 파랗게 질려 갈 무렵이었다.
“얘, 너. 여기 살아? 아님 놀러 온 거야?”
레이가 소년에게 물었다.
“으윽, 큭, 켁켁.”
레이의 질문에 크레하가 살기를 거두자 소년이 콜록거렸다.
“대답.”
한참을 콜록거리다 진정되는 듯 보이는 소년에게 크레하가 짧게 대답을 종용했다.
“어, 엉? 그, 그건 왜, 왜 묻는데.”
“무례하게 굴지 말도록.”
소년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아마 그때 그 하얀 남자는 남편이 아니라 이 남자처럼 검은 머리 여자의 수호 기사였던 듯했다. 그리고 실력은 상상 이상이고.
그런 둘에게 보호받는 여자의 신분은 상당히 높을 것이다.
‘그런데 식당에서 한 자리에 앉아 식사하는 거 봤는데.’
여자도 그 자리에 함께하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같은 자리에서 함께 식사를 했던 걸 보면 같은 신분이라는 소린데, 지금 상황을 보면 아닌 것도 같고.
아무튼 뭔지 모르겠지만 눈앞의 레이디에게 껌뻑해야 산다는 건 알았다.
“여기서 산 적 있어, 있습니다.”
“그럼 헬라에 대해서 잘 알겠네? 얼마나 살았니?”
“그건 몰라요.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살아서…….”
“흐음.”
레이가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마님, 무슨 일이십니까.”
“저 아이한테 헬라 안내 좀 맡아 달래 볼까 하고.”
크레하보다도 평범하게 살아온, 어쩌면 더 바닥에서 살고 있는 아이였다. 더 날것의 헬라를, 수도 외의 곳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제국민이다.
“네 보호자는 어디 있지?”
레이의 질문에 소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부모님은? 가족은 어디 있어? 아니면 네가 일하는 소속이라도?”
“그런 것 없는데요.”
기억에 남는 시절부터 가족은 곁에 없었다. 그래서 소년은 자신의 이름도, 나이도 모르고 길바닥에서 컸다.
구걸해서 목숨을 연명하고 각지의 축제를 돌아다니며 소매치기로 돈을 구했다. 운이 좋을 때는 마을에서 잡부 일을 얻어 헛간에서라도 잘 수 있었다.
지금처럼 번쩍이는 사람들과는 한평생 스쳐 지나가 본 적도, 말을 섞어 본 적도 없었다. 지금 소년은 호의를 베푼 자들에게 일종의 도박을 건 상태였다.
자기 지갑을 턴 소매치기한테 2,000파브나 쥐여 준 걸 보면 부자일 터다. 그러니 자기 집안 잡일을 처리하는 일이라도 시켜 주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온정을 기대한 도박이었다.
“잘됐네. 나 좀 도와줄래? 헬라 관광을 하고 싶은데 네가 안내해 줘. 그에 대한 보수는 지불할게.”
레이의 제안에 소년보다 크레하가 더 놀랐다.
“마님. 그건…….”
“왜애. 크레하 경이 날 든든하게 지켜 줄 거잖아.”
이런 식으로 라미엘 님도 조종하시는 건가.
“그건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크레하의 말에 레이가 그럼 됐다는 얼굴을 하고 다시 소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기, 널 뭐라고 부르면 돼? 이름이 뭐야?”
레이의 질문에 소년은 쭈뼛거리며 바로 대답을 못 했다.
몇 초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자그맣게 소년이 말했다.
“저, 저는 이름이 없습니다.”
왜 없냐고 물으면 굉장히 실례일 것 같은 소년의 행색에 레이는 입을 다물었다.
“나이는?”
“열네 살쯤 됐을 거래요.”
소년이 예전에 길거리를 다닐 때 그의 부모를 알던 노인이 대강 아홉 살쯤 될 것이라 말했었다. 그 이후 소년은 본인 나이가 이 정도 되었겠거니 하고 살고 있었다.
레이는 잠시 말없이 소년의 얼굴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로프스라는 곳이 있어. 아니?”
뜬금없는 장소 이야기에 소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니요.”
“키즈웰에 있는 도시 이름인데 그곳에 호수가 하나 있어.”
소년은 눈앞의 레이디가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헛소리를 들어 줬으니 그 값을 청구해야 하나, 같은 생각을 하는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 호수는 특히 색이 정말 끝내준다? 초록빛이랑 파란빛이 아주 잘 어우러져 정말 아름다운 청록색을 내. 네 눈동자처럼.”
레이의 말에 소년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로프스에서 따와서 롭, 어때? 네 이름으로.”
소년의, 아니 롭의 청록색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롭은 충동적으로 자신들을 몰래 따라왔다고 했다.
헬라에서 살다가 도저히 버틸 수 없어서 어부 일이라도 배우려고 루이즈로 왔는데 아무도 그를 받아 주지 않아 소매치기로 살고 있었다고.
헬라로 다신 돌아올 생각이 없었는데 레이의 행선지가 이곳일 줄 몰랐다며 눈물이 주렁주렁 달린 얼굴로 웃었다.
“몰래 숨어서 탔어요.”
여기까진 어떻게 왔냐는 말에 롭이 대답했다. 루이즈로 올 때도 그렇게 왔다고 했다.
“예쁘다.”
노을이 지는 광경이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졌다.
어둡고 좁고 긴 골목 끄트머리에 다다라야 보이는 절경이었다. 빈민가 끝에 위치한 작은 동산이기에 일반 제국민들이나 귀족들은 결코 알 수 없는 헬라의 명소였다.
지나오면서 봤던 빈민가 사람들 대부분은 여자와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제대로 돈을 벌 만한 일을 구할 수 없어 마을에서 소일거리나 허드렛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레이의 등장에 그들은 혹시나 이 마을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지레 겁을 먹고 꼭꼭 숨어 버렸다.
어딜 가나 빈민가는 환영받지 못했다. 발각되면 마을을 쓸어버리는 일이 허다했기에 최대한 숨어 살아야 했다.
수도 가까이에 있는 도시일수록 방어는 심했다. 손가락만 까딱해서 마을 하나를 없애 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지금의 빈민가는 레이가 보고 있는 것처럼 해가 지는 광경이 보이는 동산이 있다. 이 사실을 귀족이 알면 당장 마을을 없애 버리고 자신들의 공간으로 만들 수도 있기에 더더욱 다들 불안해했다.
“다들 이렇게 예쁜 걸 보고 있었구나.”
“아무도 해 지는 광경을 예쁘다고 생각 안 해요. 마님이 특이하신 거예요.”
롭이 툭 대꾸를 하고 레이의 눈치를 살폈다. 크레하가 불경하게 마님의 말에 토를 달거나 허락 없이 함부로 말을 하지 말라고 했었기 때문이다.
“이게 안 예뻐?”
“그런 거 볼 시간에 일 하나라도 더 해야 저녁 한 끼라도 더 먹을 수 있거든요.”
현실적인 대답에 레이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일정을 좀 수정해야겠어.”
한참 만에 레이가 엉뚱한 대답을 했다.
“크레하 경, 오늘 열차 취소하자.”
이제나저제나 레이만 기다리고 있을 라미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일 터였다.
“마님, 이런 말씀 올리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만 제가 감히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뭔데?”
“사람 하나 살린다 생각하시고, 오늘 못 가신다는 말씀은 제발 마님께서 직접 주인님께 해 주시면 정말 감사드리겠습니다.”
***
“필경사를 구하는 게 아니라 만들려고 해.”
베르니에 모인 루이반 사람들과 샤메인이 레이의 말에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님이 예정 시간보다 한참이나 늦게 돌아오신 터라 보통 걱정을 한 게 아니었다.
“소포니악 3지구 빈민가 근처랑 라 헬라 쪽, 두 군데 정도에 거점을 두고 싶어.”
도시의 이름 앞에 ‘라’가 붙으면 해당 도시의 메인 소도시라는 뜻이었다. 헬라의 메인 도시 라 헬라, 루이즈의 핵심 라 루이즈 같은 식이었다. 대륙이 통일되기 전 수도였던 지역의 흔적이었다.
베르니는 라 헬라에 위치하고 있다. 오늘 레이가 다녀온 곳은 베르니에서 조금 떨어진 소도시 소포니악이었다.
예정보다 한참이나 늦게 돌아오셨다 했더니 아예 라 헬라를 떠났기 때문이었다. 거기에서 애도 하나 주워 오시고. 그 아이의 안내로 소포니악까지 다녀오셨다고 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으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님이 예정보다 헬라에 오래 머무시게 되었다는 것 정도는 다들 알 수 있었다.
“크레하는 돌아가. 자리 오래 비울 수 없잖아.”
테일러가 귀환할 때 톰까지 딸려 보낸 마님이 이번엔 크레하를 올려 보내시려고 했다.
“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이 이상 기사단을 비울 순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님 호위의 임무를 저버릴 수도 없었다.
케이와 엘이 있어 크게 불안한 건 없지만 그래도 루이반이라는 거물인지라 어디서 어떤 거대한 돌발 상황이 생길지 알 수 없다. 샤메인도 있긴 했지만 라미엘이 보기엔 조금 아쉬운 인력일 게 분명했다.
“걱정 마. 라엘한테는 내가 다 말할 테니까.”
라미엘 본인을 제외하고 크레하만큼 강한 인력은 없다. 아마 라미엘은 쉽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오래 안 걸려. 필경사 양성소만 만들면 바로 갈 거야. 나도 빨리 수도 가 봐야 하는 거 알잖아.”
할 일이 태산이었다. 일단은 스케줄이 바뀌었으니 기다리고 있을 라엘에게 알려야 했다.
“잠시만.”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레이는 방으로 돌아와 게이트를 열었다. 예상대로 라미엘의 집무실로 게이트가 열렸다.
“라엘!”
“레이?”
라미엘은 레이 뒤로 보이는 게이트를 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폈다.
“추가 일정이 생겼나 보군요.”
“네. 지금 잠깐 온 거예요. 미안해요, 라엘. 조금 더 걸릴 것 같아요.”
“대체 그게 왜 사과할 일입니까. 하던 일 마무리 다 하고 와요.”
“지금 시간이 없어서 바로 가 봐야 해요. 이따가 다시 와서 설명할게요!”
크레하가 슬픈 소식을 전할 일 없게 라미엘에게 직접 스케줄 변경을 통보한 레이는 그의 볼에 진하게 뽀뽀를 한 번 남기고 게이트로 들어섰다.
“회의하자.”
다시 베르니로 돌아온 레이는 모여 있는 사람들과 필경사 일을 논의한 뒤, 내일 아침부터 바로 양성소 설립을 위해 움직이기로 결론을 내렸다.
일단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게 먼저였다. 하여 내일부터 레이는 직접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하는 것으로 일정을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