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필경사 (3)
투다다다닥.
두 마리 동물이 복도를 신나게 내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푸엥과 푸둥의 우다다 시간인 듯했다.
“이 새벽에 체력도 좋아.”
동물을 키우다가 추가로 한 마리를 더 들이게 되면 엄청 신경 써야 한다고 했는데, 개와 울프 드래곤은 합이 잘 맞는지 두 마리는 친구처럼 잘 지내고 있다.
바빠서 산책을 아침과 저녁 두 번밖에 못 시켜 주고 푸엥 공원처럼 뛰어노는 곳도 없어 참 미안했는데, 둘이 잘 노는 걸로 어느 정도 해소가 되는 모양이었다.
생각할수록 다행인 일이었다. 만약 두 마리가 서로 으르렁거리는 사이였다면 이걸 해결하느라 고생깨나 했을 것이다.
돌아가면 더 많이 놀아 줘야겠다고 생각하다가 라미엘에게 아직도 제대로 말을 못 한 것까지 생각이 났다.
“아, 맞다. 라엘! 왜 늦는지 알려 주기로 했는데.”
새벽 시간이었다. 라미엘은 분명 지금까지 안 자고 있을 것 같기에 게이트를 여는 데에 망설여지진 않았다.
“……예하, 괜찮으시겠지?”
게이트를 하루에 두 번이나 쓰게 되었지만 헤덴이니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레이가 목걸이를 톡 건드렸다.
“어머나.”
딱딱한 바닥이 디뎌질 줄 알았는데 폭신한 침대 위로 몸이 쓰러졌다.
“레이, 왔어요?”
침대에 막 누우려던 라미엘이 급작스레 열린 게이트를 보며 몸을 바로 세웠다. 여전히 드레스 차림인 레이가 보였다.
“라엘!”
레이가 라미엘을 꼭 껴안으며 잠시 심호흡을 했다.
두근두근, 귓가에 일정하게 울리는 심장 소리와 저를 품에 안고 토닥이는 라미엘의 손짓을 느끼자니 피로가 녹아 나가는 것 같다.
피곤한 줄도 몰랐는데 빨리 루이반으로 돌아오고 싶어서 강행했던 일정을 생각하니 피로할 만했던 스케줄이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아뇨. 내가 일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꼭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
“레이가 하는 일이니 이유가 있겠죠.”
신뢰 가득한 라미엘의 목소리에 레이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라엘은 언제 한가해져요?”
“테일러가 와서 앞으로 시간이 좀 날 거예요.”
“다행이다. 쉬엄쉬엄해요. 잘생긴 얼굴 상하게 하지 말고.”
레이가 입술 조금 내밀었더니 바로 라미엘의 입술이 닿는다.
가볍고 깊지 않은 키스였다. 그 이상을 하면 레이가 게이트를 이용하지 못하게 될 게 분명해서 라미엘은 인내심을 최대한 발휘했다.
“필경사를 양성하려고 해요.”
리담엔 학원 개념이 없다. 무언가를 배우려고 한다면 그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을 데려다가 과외 형식으로 배워야 했다.
레이는 이러한 기존의 수업 양식 대신 좋은 직업을 구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국의 학원처럼 아예 시설을 차려 필경사를 키울 생각이었다.
“아, 그리고 크레하 경은 내일 루이반으로 보낼게요. 루이반 기사단장이 한창 시기에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운 것 같아서 신경 쓰여요. 대신 다른 기사로 둘 보내 줘요.”
라미엘이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기에 둘을 보내라 했다.
“레이가 날 이제 아주 잘 파악하는 것 같은데.”
절대 안 된다고, 크레하를 데리고 있으라 말할 게 뻔하니 기사 둘을 말한 것이다.
“기사는 레이가 말한 대로 하고, 선생은 언제 보내 줄까요?”
헬라에서 본인이 벌인 일이니 레이는 좋은 선생을 찾아보는 것도 자신이 알아서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당연하다는 것처럼 라미엘이 자신의 일을 도우려고 했다. 그런 일은 왜 하는지 필요와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지원이다.
‘큰일이다. 진짜 이 남자 절대 못 놔주겠어.’
레이가 좀 더 라미엘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직 학생 수가 파악이 안 돼서요.”
“한 명이 아니에요?”
“음, 좀 많을 것 같아요.”
대체 레이는 뭘 어떻게 하려는 걸까.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크레하한테 들어요.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게이트가 벌써 닫히려고 했다. 레이는 라미엘을 눈에 담고 또 담고 게이트로 들어섰다.
“최대한 빨리 올게요!”
부부 생이별의 시간이었다.
저택이 너무 고요하고 적막하니 빨리 돌아오라고 하고 싶었지만 공작 부인께서 하시는 일이 많고 바쁘니 칭얼댈 수는 없었다.
“레이, 무리하지 마요.”
라미엘의 걱정을 뒤로하고 게이트가 닫혔다. 레이는 다시 베르니의 침실로 돌아왔다.
“라엘이 지금 나 걱정한 거지? 세상에.”
게이트가 안 닫혔다면 단박에 뛰어나가 라미엘의 셔츠를 찢어발겼을 것이다.
라미엘의 물기 어린 표정이라니.
“저걸 두고 왔어! 저걸! 으아아!”
일만 다 끝나 봐, 라미엘 가만 안 둬!
레이는 침대를 팡팡 내려치며 굳은 결심을 했다.
***
“그래서 후작은 어떻게 됐어요?”
리첼의 눈동자가 레이에게 향했다.
대본을 읽어 주는 내내 레이 손에 잡힌 책만 바라보던 이였다. 나이는 레이와 동갑이지만 여섯 살짜리 딸이 있는 엄마로 소포니악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였다.
“그건 내일 읽어 줄게. 이제 취침 준비해야 하잖아.”
레이의 말에 주위에 모여 있던 여자들이 아쉬운 듯 탄식했다.
“아아아. 시간 진짜 빨리 간다.”
사는 게 바쁘고 형편이 여의치 않아 필경사가 대본 낭독회를 해도 제대로 즐겨 본 적 없는 빈민가 여자들은 매일 레이가 찾아와 틈틈이 읽어 주는 대본 낭독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레이는 낮에 올 때는 아이들을 위해 동화를 읽어 주고 밤이 늦으면 어른들을 위해 유명한 연극 대본을 읽어 주었다. 가끔 같이 오는 남자나 여자들과 역할을 나눠 읽기도 했는데 오늘은 롭 하나만 데려오고 끝이었다.
그러나 저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라미엘이 내려 보낸 그림자 기사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레이를 철통같이 보호 중이었다.
그들은 라비던에서 헬라로 올 때, 마님에게 수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연극 대본도 최대한 많이 여러 권 가져오라는 임무도 함께 부여받았다.
타지에서 마님께서 취미로 대본집을 읽고 계신 줄 알았더니 이런 일을 하고 계실 줄은 몰랐다.
“이게 대본이거든? 어차피 또 내일 올 거니까 여기다 두고 갈게. 절대 읽지 마! 내용 미리 알면 호응 안 해 줄 거잖아.”
“어머, 퍽이나 저희가.”
처음엔 웬 레이디가 불쑥 마을로 쳐들어오기에 경계를 했다. 얼마 전에 동산에 들렀다 간 여자라고 해서 밀리고 밀려 이 구석진 곳까지 와 겨우 살게 된 마을이 없어질까 봐 피가 말랐다.
그런데 여자는 특이했다. 마을 한가운데 대뜸 자리를 잡고 앉더니 책을 읽어 준다고 했다. 빈민가에서 백날 낭독회를 해 봤자 무슨 돈이 된다고 여기까지 꾸역꾸역 들어왔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제 막 필경사가 된 여자인 것 같은데 세상 물정을 몰라도 이렇게 모를 수가 있나, 기가 막혔다. 심지어 주변 사람들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도 아니고 쩌렁쩌렁 온 동네에 다 들리게 낭독을 했다.
집 안에서도 가만히 있으며 집중만 잘하면 들을 수 있는 걸, 대체 누가 가서 돈을 주고 듣는단 말인가. 이 빈민가에서.
─저러다 돈 안 되면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겠지.
모든 이들의 차가운 눈초리 속에 여자는 꿋꿋하게 낭독회를 시작했다.
낮 시간엔 다들 일을 나가거나 집 안에 처박혀서 가지고 온 일거리들을 소화해야 했기에 거리에 나와 노는 건 아이들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왕자님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가!”
클라이맥스였다.
내내 탑에 갇혀 있던 왕자님에게 처음으로 누군가가 말을 건 순간이었는데.
“오늘은 여기까지.”
평소보다 훨씬 짧은 시간이었다.
지금 낭독한 것의 두 배는 더 있어야 할 시간에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옆에 서 있던 비쩍 마른 비실비실한 남자아이가 뭐라고 말을 전한 뒤였다.
다음 날 매번 같은 시간에 모습을 보이던 여자는 사흘째 나타나지 않았다.
─드디어 지쳤구나, 역시 그럼 그렇지.
언제 여자가 지쳐 떠날지 다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낮 시간에 또랑또랑하게 울리는 여자의 동화 낭독 소리가 사라지자 마을이 허전했다. 뒷이야기도 너무 궁금하고 말도 없이 사라진 여자가 서운했다.
─이럴 거면 애초에 시작을 말지.
무언가를 바라고 기대하는 것 없던 자신들에게 억지로 무언가를 쥐여 주곤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여자.
조금 원망스러우면서도 인사라도 건넸으면, 여자에게 조금만 잘해 줬어도 이렇게 훌쩍 떠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오랜만이야. 다들 잘 있었어? 바쁜 일이 생겨서 못 왔어!”
아무도 반기지도 않고, 들어 주는 이도 없는데 여자는 활짝 웃으며 씩씩하게 돌아와 동네를 향해 인사를 했다.
“나 지난번에 어디까지 읽어 주고 갔어?”
이 말에 동네에 있던 아이들이 가장 먼저 여자에게 뛰어갔다. 여자는 실제로 처음 보는 자신의 낭독회 손님들을 마치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친근하게 맞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글 읽는 거 쉬워. 조금만 배워도 금방 글씨 익힐걸? 너희가 대본집을 보다가 글을 익힐 줄 어떻게 알아.”
레이가 말하자 여자들이 깔깔 웃으며 반박했다.
“그게 그렇게 쉬우면 필경사를 왜 쓰겠어요?”
“봐서 되는 거면 우리가 왜 삯바느질이나 하고 빨래방을 다녀요. 필경사나 하지.”
레이가 씨익 웃었다.
“어, 정말? 너희 필경사 하고 싶어?”
살살 미끼를 던져 보았다.
“당연히 하고 싶은 거 아녜요? 돈 많이 벌 수 있잖아요.”
“고생도 덜 하고.”
“추워 죽겠는데 찬물에 손 담그기 싫어.”
성인 남자들은 어떻게든 돈이 될 만한 자기 일을 찾는다. 배를 타든, 건물 짓는 인부가 되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여자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고 제한적이다.
그나마 가장 좋은 건 부자 가문의 하인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헬라엔 그들을 수용할 만큼의 귀족이 많지 않고, 수도는 잘 배우고 집안도 좋은 지원자들이 수두룩해서 경쟁이 되지 않는다.
귀족이나 부자들, 상단에서 의뢰하는 빨래방에 취직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루 종일 손이 부르트게 빨래를 하고, 옷을 수선하고, 다리다 보면 허리 한 번 제대로 펼 틈도 없다. 일이 정말 많을 때는 옷감을 집으로까지 가지고 와서 작업을 해 일정에 맞춰야 했다. 이마저도 경쟁이 치열해 일당이 점점 내려갔지만 먹고살려면 해야 했다.
“그나저나 알렉스 님 참 대단해요. 춥지 않아요? 길거리에서 매일 책 읽는 거?”
레이가 냉큼 말을 받았다.
“그래, 맞아. 좀 춥긴 했어. 앞으로 실내에서 해야 할 것 같아.”
그러려면 그곳을 이용하기 위해 대금을 지불해야 하거나 헬라 역 같은 특정 구역에서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 말은 곧, 더 이상 낭독회를 무료로 들을 수 없다는 걸 뜻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지만 언제까지고 무료 봉사를 해 줄 순 없는 노릇일 테니 서운해도 보내 줘야 했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가장 먼저 레이의 낭독회를 찾아와 준 어른인 티아가 말했다.
“……자주는 못 가더라도 여유가 생기면 꼭 들으러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