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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91화 (91/160)

91화. 잘생긴 내 남편

“……자주는 못 가더라도 여유가 생기면 꼭 들으러 갈게요.”

“아니? 너희는 꼭 와. 무조건 와서 들어. 매일 들어. 조만간 완공되니까.”

필경사 양성소 건물이 완공을 앞두고 있다. 기존에 있던 건물을 좀 더 확장하고 용도에 맞게 내부를 고쳤다.

이 재건축 공사를 하기 위해 소도시를 관리하는 리더인 집정관을 만나고 공사 진행 상황을 보느라 사흘간 낭독회도 못 했던 것이었다.

“너희한테 하는 낭독은 돈 안 받아. 그럴 생각 전혀 없었어. 그냥 들으러 와. 너희도 춥잖아. 밖에 있으면.”

“그렇지만…….”

“알렉스 님도 돈 벌어야죠.”

“괜찮아, 나 돈 많아. 걱정하지 마.”

물론 그들이 보기에도 레이는 몹시 귀티가 나 보이고 구김 없이 좋은 환경에서 자란 티가 났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돈이 썩어날 만큼 많지 않은 이상 돈이 되지 않는 일에 끝까지 매달리는 사람은 없다. 지금이야 호의를 베푼다고 해도 그게 길어지면 지치는 법이다. 돈이 사람을 그리 만드는 게 아니라 돈을 둘러싼 상황이 사람을 지치고 힘들게 만든다.

“조만간 결혼도 하고 그래야 할 텐데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빈민가 사람들은 레이를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집에서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자란 미혼의 필경사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인생에서 귀족을 만난 적이 없어서 그들이 풍기는 분위기를 전혀 읽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엉? 나 결혼했어. 눈 튀어나오게 엄청 잘생긴 남편이 있는데?”

해맑은 레이의 얼굴에 여자들은 고개를 저었다. 철이 없다고 여기는, 혹은 허세를 부리는 사람을 보는 표정이었다. 어느 남자가 레이디인 부인이 빈민가를 제집처럼 드나드는 걸 내버려 두겠는가.

“알았으니까 옆에 남편 데리고 얼른 가세요. 많이 늦었네.”

레이 옆엔 사람은커녕 동물도 없다. 허공뿐인데 데리고 가라는 건.

“나 진짜 남편 있다니까?”

“그러게요. 정말 미남이시네요. 너무 늦으면 위험해요. 그러니 얼른 가세요.”

결혼했다는 말, 안 믿는다는 소리다.

“맙소사, 나 거짓말쟁이 됐어.”

“아녜요, 믿는다니까요?”

여자들이 킬킬 웃으며 레이의 등을 떠밀었다.

***

“내 남편이 얼마나 잘생겼는데.”

쒸익쒸익.

“나 돈도 엄청 많은데.”

쒸익쒸익.

레이의 푸념에 케이와 엘은 웃음을 꾹 억눌러 참았다.

베르니에 도착한 마님은 내 이미지가 그렇게 신뢰를 주지 못하냐는 이상한 소리를 하셨고.

“그게 오늘…….”

레이를 따라 나갔던 롭이 상황을 설명하고 나서야 그들은 마님의 작고 귀여운 분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중에 보고 놀라 자빠지지나 마라.”

그런데 라엘은 누가 봐도 너무 귀족적으로 잘생겼는데.

빈민가 사람들은 귀족을 두려워한다. 만약 라미엘이 모습을 보인다면 정말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고 마을을 버리고 떠나 버릴 수도 있다.

정체를 끝까지 숨기려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밝힐 때가 아니었다.

“저, 그런데 마님.”

“응?”

“얼른 방으로 가셔야 합니다.”

“무슨 일 있어?”

레이의 질문에 모두는 그저 웃기만 하고 빨리 올라가시란 말만 반복했다.

“설마?”

다들 레이만 보며 싱글벙글하고 있다.

‘맞구나!’

레이는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침실 문을 있는 힘껏 벌컥 열었다.

“라엘!”

라미엘은 자신에게 달려오는 레이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왜 말도 안 하고 왔어요!”

“음, 레이처럼?”

단단한 몸이 빈틈없이 꼭 레이를 끌어안는다. 푸근하고 안정적으로 느껴지는 익숙한 온기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다.

“어떻게 된 거예요? 라엘 일은 다 끝났어? 아니면 잠깐 온 거예요?”

질문마다 라미엘의 입술에 레이가 입술을 부딪었다.

“일은 거의 다 끝냈고, 레이가 더 바빠 보여서 왔어요.”

테일러가 왔어도 전체적인 업무 강도는 낮아지지 않았다. 라미엘이 쉬지 않고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느슨하게 잡았던 예정보다 이르게 일은 마무리가 되었고, 헬라를 왕복하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런 대단한 남자가 있는데 그 사람들이 정말…….”

“무슨 일이 있었나요?”

“당장 꺼내 보일 수도 없고.”

“레이?”

“나중에 두고 봐. 그 무적의 옷을 입혀서 선보일 거야.”

뭔지는 모르지만 레이의 눈이 이글이글했다.

“라엘, 크레하한테 어디까지 이야기 들었어요?”

“창고 공사랑 필경사 여러 명을 키워 낼 양성소를 만든다는 이야기만 대강 들었어요.”

레이는 그동안 루이즈와 헬라에서 했던 일들을 라미엘에게 차근차근 전했다.

냉동 저장 기능이 있는 창고를 만들어서 올해 추이를 살피고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에 돌입할 거라는 이야기, 헬라에서 1대 다수 가르침을 받는 귀족들의 학술원인 아카데미와 형식이 비슷한 필경사 양성소를 차릴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주 대상으로 선정할 거예요.”

“어려운 사람들? 그럼 무료인가요?”

“아뇨. 아주 소액의 금액을 받으려고 해요. 값을 지불해야 더 열심히 빨리 익히려고 하지 않겠어요?”

“음, 빈민가에서 그게 가능하겠어요? 돈이 들면 안 할 것 같은데.”

“맞아요. 그래서 후불로 하려고요.”

그들이 필경사가 되어 수익이 생기면 그때 소정의 금액을 받으려는 계획이었다. 담보도 없고, 은행 대출도 아니고 그냥 사람만 믿고 하는 후불. 수강료를 받지 않는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다 됐다.”

이야기를 하며 라미엘의 단추를 슬슬 풀어냈는데 그 끝이 보였다.

그의 셔츠를 벗겨 낸 레이가 씩 웃었다.

“라엘, 이제 내 이야기는 다 끝났어요.”

밤이 펼쳐질 차례였다.

***

수도로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헬라 일 마무리는 샤메인에게 맡겨야 했다. 라 헬라와 소포니악을 오가야 하니 샤메인 역시도 조금은 바빠질 것이다.

소포니악 필경사 양성소 건물에서 이어진 레이의 낭독회는 필경사 수업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너희 생업에 지장 안 가게 일 다 끝나고 밤에 딱 한 시간만 해 보자.

일주일에 세 번, 하루에 한 시간씩 글자 공부. 강습료는 나중에 필경사가 되면 지불.

“그런데 만약에 필경사가 안 되면 어떡해요?”

“그럼 다른 걸로 갚으면 되지. 수강료 지불 기한은 양성소가 망하기 전까지야. 언제든 내기만 하면 돼.”

괴상한 양성소였지만 일단은 무료로 글을 가르쳐 준다는 말에 다들 솔깃해했다.

“완결 내용, 알고 싶지 않아?”

레이가 마지막 승부수로 읽어 준 <불같은 사랑>은 역시나 역대 최고의 반응을 끌어냈다. 이런 열의를 이용해 레이는 3부의 대본을 절반만 읽고 그만두기로 했다.

“나머지는 너희가 배워서 읽어 봐. 난 잠시 여길 떠나야 하거든.”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레이는 그들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한껏 돋우고 떠났다. 실제로 시간이 없기도 했다. 테일러가 황실 마법부와 시간을 잡았다는 연락을 했기 때문이다.

이제 선택은 오롯이 그들의 몫이었다.

“……열차는 여전하네.”

오랜만에 탄 헬라와 수도 간 르아넬로 열차 1등석 칸이었다. 그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동승자와의 마음의 거리였다.

간밤의 후유증으로 레이는 열차의 커다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중이었다.

“에고고.”

레이는 새로운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처음의 라미엘은 자신을 아주 극진하고 상냥하게 대했다는 것을.

어제 먼저 옷을 벗긴 게 잘못이었을까. 라미엘이 살짝 제 몸을 주체 못 하고 덤벼든 것 같았는데.

죽는 줄 알았다.

좋아서.

조금 거친 것도 좋아한다는 본인의 취향을 알게 된 레이는 시선을 올려 코앞에 있는 라미엘을 바라보았다.

“라엘이 너무 예뻐서 문제야. 정말.”

라미엘은 레이를 꼭 껴안은 채 미동도 않고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그간 일이 정말 많이 고됐는지 라미엘이 이동 중에 잠을 자고 있다. 신기하면서도 이 강철 체력의 남자가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나 싶어 짠했다.

그는 레이가 없어 예전처럼 잠시 눈만 붙이다시피 자고 일어나 몰려드는 일들을 쉬지 않고 처리해야 했다. 레이를 빨리 만나려고 무리한 일정이었다.

잠시나마 그가 편안한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레이는 조금 불편한 자신의 몸을 다독이며 최대한 미동 없이 라미엘의 품에 안겨 있기로 했다.

열차가 막 라비던에 도착했을 때, 하차 준비를 위해 침대를 벗어나는데 레이의 목걸이에서 빛이 났다.

헤덴이 보낸 신호였다.

“라엘, 나 오늘 대신전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라미엘이 레이의 몸을 살피며 물었다.

“괜찮겠어요?”

라미엘이 주체 못 했어도 그나마 경험치가 조금이나마 오른 모양인지 처음보단 거동이 수월했다.

“내가 걱정이 될 것 같으면 좀 조신하게 하든가요.”

“……그거 참은 건데.”

레이가 황당한 얼굴로 라미엘을 바라보았다.

“그, 그게?”

저는 거칠었다고 느꼈습니다만?

“레이가 너무 약하니까 마음껏 하고 싶어도 자제…….”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거기까지만 말해요.”

라미엘의 말에 열이 화악 올랐다.

‘그래, 맞아. 이 남자 마물 잡던 사람이었지. 어디 보통 체력이겠어.’

그때 열차 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내리실 시간입니다.”

일단 루이반에 도착해서 일정을 확인한 뒤 베롬으로 움직이기로 하고 레이는 열차 문손잡이를 잡았다.

테일러가 잡아 온 황실 마법부 면담 일정은 이틀 뒤였다. 최대한 빠르게 해 달라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잡힐 줄은 몰랐다. 테일러의 능력을 보면 그가 사실 황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덕분에 레이까지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게 되었다. 신전, 황실, 르아넬로까지 세 군데를 돌고 나서 다시 헬라까지, 앞으로 보름 동안 라미엘보다 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난 그럼 대신전 다녀올게요.”

라비던에서의 일정을 확인한 레이가 라미엘에게 인사를 했다.

“레이, 오래 걸리나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아마 오래 걸릴 일은 없을 거예요.”

“잘 다녀와요.”

“응. 얼른 올게요.”

레이는 게이트를 열어 순식간에 대신전으로 이동했다.

“예하. 저 왔어요.”

순식간에 대신전 헤덴의 집무실에 도착한 레이는 큰 소리로 인사를 하며 자신의 도착을 알렸다.

“아가 조련사야, 너 대체 뭘 준 거니?”

“네?”

도착하자마자 헤덴이 대뜸 이상한 질문을 했다.

“4부 녀석들 난리가 났더구나.”

4부라면 빈 마력석을 연구하는 곳이다.

“뭔가 밝혀진 게 있나요?”

“고대 기록에나 있던 광물이야.”

“예?”

작년에 워크산에서 발굴된 고대 유물 중 유일하게 책이 하나 발견되었다. 그 책은 오랜 세월 진흙 속에 묻혀 있어 공기에 닿지 않아 손상 없이 보존이 됐으나 흙 때문에 한 덩어리가 되어 들러붙어 있었다.

최대한 손상이 가지 않도록 신중히 복원한 책은 표지에 「벨라」라는 고대어가 적혀 있어 <벨라 서적>이 되었다.

복원 후 해독한 서적의 내용은 고대, 마력이 풍부하던 시절을 담고 있었는데 이 책에 레이의 마력석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공작 부인!”

빈 마력석 분석 의뢰를 받은 연구 신관이 레이의 모습을 보자마자 뛰어나왔다. 그녀 옆에 있던 다른 연구 신관도 덩달아 함께 뛰어온다.

“이 마력석 어디서 얻으신 거예요?”

“저기, 대체 무슨 일인지 제게 설명을 좀 해 주셔야 할 것 같은데.”

“일단 빨리 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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