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92화 (92/160)

92화. 최고의 거래

“라엘!”

레이가 우렁찬 목소리로 등장했다.

오래 걸릴 일은 없다고 했는데, 자정이 다 되어서야 나타난 레이는 볼이 빨갛게 익은 상태였다.

“음흐흐흐흐. 라엘. 흐흐흐흐.”

집무실에서 일을 하던 라미엘은 레이가 쓰러질 것처럼 몸을 휘청거리자 빛의 속도로 그녀를 품에 받았다.

“자정이 되도록 오질 않아 걱정시키더니 이 꼴로 온 겁니까.”

“응. 네. 아이, 아하하하. 잘생겼어. 울 라엘.”

신전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결혼식 2탄을 찍기 직전이다.

“기분 좋아서 베롬에서 조금 마셨어요.”

“그건 말 안 해도 잘 알겠군요. 무슨 일입니까?”

“라에엘, 난 이제 큰 부자가 되었답니다. 루이반, 이거 돈으로 사겠어요! 얼마야? 얼마면 돼?”

“달라고 말만 하면 공짜로도 줄게요. 무슨 일 있는 건지 말 안 할 건가요?”

“대신전에 의뢰 맡긴 내 마력석 기억나요?”

“네, 그 결과가 벌써 나왔군요?”

“응! 얼마 전에 전에 발견한 고대 서적에서 단서가 나왔대요. 그래서 빨리 끝났어요.”

“고대 서적?”

라미엘의 물음에 레이가 들은 내용을 간략히 전했다.

레이의 마력석을 연구하던 신관은 마력석이 수명을 다해 녹색 빛이 사라졌을 무렵 연구실 폭격을 당했다. 과격한 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라, 신전 끄트머리에 별도로 지어진 공간에서 연구 중이었던 덕에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다.

다른 지역은 폭설이 내릴 때 베롬은 눈발이 살짝 섞인 폭우가 내렸다. 사냥제 때 워낙 비가 많이 온지라 더 이상 큰비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때보다 더 심하게 내렸다.

천둥 번개가 요란하게 울리고 연구실 창문이 덜덜 흔들릴 때, 쾅 소리가 나더니 연구실에 벼락이 쳤다. 큰 벼락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소리에 비해 연구실이 잘못된 것은 없다고 여겼는데 이상 현상이 눈에 띄었다.

공작 부인이 맡긴 마력석은 여러 실험으로 빈 마력석이 되었는데, 그것이 처음 건네받았을 때처럼 선명한 초록빛을 띤 것이다.

난장판이 된 연구실에서 신관은 급히 마력석을 챙겨 와 간단한 실험을 했다.

“맙소사.”

맨 처음 실험했을 때처럼 여느 마력석과 똑같은 에너지를 냈다. 즉, 처음부터 마력이 가득했던 마력석과 지금의 상태가 같다는 말이었다.

“다 쓴 마력석이 다시 차오르다니.”

학계가 놀랄 발견이었다.

“비가 많이 왔었고 번개가 쳤던 거? 아, 곰이 있었어요. 곰이 죽고 나서 발견했는데.”

레이가 말한 곰과 벼락에서 단서를 찾아내려던 신관은 곰의 생명력에 먼저 주목을 했다. 동물의 생명력이 벼락이라는 거대 에너지와 만나 마력석으로 흘러들어 갔다는 가설을 잡고 관련한 실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워크산에서 적당한 짐승을 한 마리 잡아 와 외진 실험실에서 연구 준비 중이었는데, 이즈음 <벨라 서적> 소식이 대신전을 강타했다.

벨라 서적은 고대에 ‘벨라’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쓴 일기였다.

내용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고대인의 생활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귀한 자료였는데, 일부 해석이 된 부분에서 「다 쓴 마력석을 다시 채워 놓고」라는 놀라운 구절이 튀어나왔다.

다시 채우다니.

마력석은 한 번 사용하면 끝이었다. 그 어떤 방식으로도 재활용이 되지 않는 일회성 자원이었다. 그런데 만약 마력석을 계속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건 앞으로의 판도가 바뀔 수도 있다는 엄청난 이야기였다.

고대의 놀라운 마력석으로 추정되는 그것이 연구소에 있는 참이다. 위대한 발견에 대신전은 발칵 뒤집어졌다. 만약 이 고대의 마력석이 잔뜩 발견된다면 영구적으로 마력을 계속 채워서 쓸 수 있는 희대의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말이었다.

하여 공작 부인이 의뢰를 맡긴 마력석이 정말 고대 마력석이 맞는지, 맞다면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가 화제로 떠올랐다.

상품화가 가능할 정도의 양이 있다면 기존 마력석보다 배는 더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심지어 만약 마력석을 다시 채우는 에너지가 마력이 아닌 번개라면!

벼락이 마력석 에너지로 가능한가가 쟁점으로 떠올랐고, 신관들은 급히 번개를 칠 수 있는 마법사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그때 레이가 대신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휑한 땅에 왜 그렇게 번개가 치나 했더니 속이 빈 고대 마력석이 에너지를 부르는 거였어요.”

이 대단한 마력석이 고대에 다 소진되지 않고 아직까지 상당량 남아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 땅이 인간이 살 만한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르아넬로 가문이 자리 잡기 전까지 그곳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수준의 몹시 척박한 땅이었다. 강이나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이라 물과 식량을 구하기도 힘들었고 산으로 막혀 다른 곳으로 이동할 길도 없었다.

자연스레 버려진 너른 땅에 르아넬로의 조상이 터를 잡았고, 훗날 그 넓은 땅에서 검은 물이 흘러나왔다. 그 거대한 마력석 광산은 본격적으로 석유를 캐내기 위해 르아넬로가 자신들의 땅 여기저기를 파내다가 우연하게 발견했다.

예전만큼 마력이 많이 없는 시대에 발견되어 빛을 잃은 상태였기에 현 시대에서 보기엔 쓸모없는 빈 마력석만 가득한 광산이었다.

“그럼 그 마력석은 마력이 아니어도 마력석이 될 수 있고, 심지어 벼락을 맞으면 에너지가 다시 채워지기까지 한다는 말인가요?”

“네, 맞아요.”

르아넬로의 평생 골칫거리이자 레이가 헐값에, 얼결에 산 광산은 리담에서 유일무이한 고대 광물이 나오는 최고의 광산이었던 것이다. 레이가 한 거래는 인생 최고의 거래였던 셈이다.

위대한 발견은 조금의 실험을 더 거친 뒤 세간에 발표할 예정이었다. 이 사실을 아는 건 당사자인 레이알렉시스와 대신전 연구 신관들뿐이었다.

“하버트가 알면 졸도할 거예요.”

레이가 활짝 웃었다.

***

창고의 일정 부분을 다 얼려 버릴 차가운 기운의 마력석과 벼락의 에너지를 모두 흘려보낼 피뢰침.

루이반 공작 부인이 황실 마법부에 의뢰한 용품이었다.

온도를 차게 만드는 마력석이야 비교적 간단한 차원으로 만들어 파는 흔한 용도였지만, 기존의 르아넬로가 요청했던 것이 아닌 평범한 수준의 피뢰침 의뢰가 눈길을 끌었다.

“번개를 상쇄하는 게 아니라 그걸 전부 흡수해서 흘려보낼 수 있는 것, 맞습니까?”

“네. 그것입니다.”

르아넬로의 골칫거리로 유명한 광산과 땅. 그 돈 잡아먹는 광산을 루이반 공작 부인이 맡아 해결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그저 벼락을 흘려보낼 피뢰침을 광산에 달려는 걸 보니, 드디어 르아넬로가 땅과 광산을 포기한 듯했다.

“대신 개수를 늘리려고 해요. 최대한 많이.”

벼락 맞은 땅을 해결하는 게 속이 시원한지 공작 부인의 광대가 눈 밑에서 내려오질 않는다. 그간 어지간히도 속을 썩인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르아넬로의 보라색 마력석 피뢰침 가격은 정말 말도 안 되게 비싸긴 했다. 벼락 한두 개도 아닌 수십 개를 막아 내는 것이니 마력을 압축하고 압축해 넣어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이번 피뢰침은 길고 튼튼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강화 마법을 거는 것 정도야 보라색 마력석 제작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였다.

“개수가 많아도 의뢰하신 것들이 평범한 물건이니 최소 사흘 내로 준비가 될 겁니다.”

발주서에 사인을 하고 의뢰를 마쳤다. 상품은 조만간 광산에 도착할 것이고 이제 남은 일은 르아넬로로 가는 것이었다.

“이제 남은 건 열차 거래 협약이랑 내 흐흐, 내 광산 찾아가 보는 거. 아, 열차 계약하면 당장 헬라랑 루이즈에도 가 봐야 하네.”

일정이 빡빡하게 바빠졌지만 레이는 광산만 생각하면 웃음부터 나와서 바쁜 것도 느끼질 못했다. 오히려 바빠서 좋을 지경이었다.

“많이 바빠지네요.”

“그러게요.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네.”

방싯 웃는 레이의 볼이 복숭아 같다.

“레이가 나한테 살 거냐고 물을 때 얼른 샀어야 했나 봅니다.”

라미엘이 레이의 볼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며 말했다.

“어맛, 맞다. 그랬지? 어휴, 큰일 날 뻔했네요. 라엘, 그때 거절해 줘서 고마워요.”

레이가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눈빛을 해서 라미엘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그러니까 루이즈에 새로 개통될 열차에 화물 계약을 하고 싶다는 거지? 그 뭐냐, 게? 게 전용 화물칸을?”

게 때문이 확실하냐는 질문을 오스카는 몇 번이나 했다.

‘게라니. 그게 화물로 실어 나를 상품인가.’

레이가 찾아온다는 소식을 받은 후, 오스카는 루이반에서 무슨 일이라도 난 건가 덜컥 겁이 나서 종일 아무것도 못하고 다리만 달달 떨어 댔다.

“루이반 부부가 그렇게 뜨겁다고 라비던에 소문이 자자한데, 대체 왜 그리 겁을 먹는 거예요?”

에이나는 그런 오스카를 보며 한 소리를 했지만 그래도 그의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레이가 르아넬로에 오겠다는 말을 하자마자 피로연이 끝난 뒤 레이의 옷차림과 물고기 발언이 확 떠올랐다.

‘그 이후로도 계속 그때처럼 루이반에서 행동했던 건 아니겠지.’

바깥소문이 좋다 해도 내부 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좋아서 결혼한 걸로 유명한 부부 사이에 1년도 채 되지 않아 불화설이 돌면 안 되니 소문만 단속했을 수도 있는 일이고.

오스카가 걱정에 걱정을 거듭한 것과는 달리, 르아넬로에 도착한 공작 부부 사이는 몹시 좋아 보였다.

피로연 때는 이제 갓 결혼을 해서인지 서로 마냥 좋아하는 게 아니라 어딘가 어색한 분위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런 느낌이 없었다. 한시도 서로에게서 눈을 못 떼는 걸 보니 괜한 걱정이었던 듯했다.

그런데 부부 사이와는 별개로 레이가 내민 협약 서류가 영 이상했다.

‘대체 얘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걸까.’

게만 운송할 화물칸 이용 계약이라니.

“공작 부인, 대체 뭘 하시려고 이걸 내민 거죠?”

오스카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재차 물었다.

“게를 판매할 할 예정이거든요. 루이즈 열차 공사는 얼마나 남았어요? 저번에 보니까 거의 마무리 단계던데.”

“뭘, 뭘 해?”

하버트가 있었다면 바로 승낙이 떨어질 수 있었다. 특수 화물칸 이용이라면 금액이 배는 들기 때문에 화물 수송 중에서 가장 높은 수익을 낼 수 있었다.

하여 열차 회사에서는 특수 화물 이용을 1순위로 홍보했고, 그걸 유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영업에 나서고 있었다. 여간한 일이 아닌 이상 무조건 합의될 일이다.

다만 오늘은 하버트가 쉬는 날이라 자리를 비워 오스카가 레이를 맞고 있는 중이었다. 딸의 얼토당토않은 계획에 사업가로서의 오스카보다 아버지로서의 오스카가 먼저 나올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보통 게가 아니에요. 아버지도 드셔 보시면 바로 수긍하실 거예요.”

레이의 말에 오스카의 머릿속에 얼마 전 들었던 소식이 불쑥 떠올랐다.

“혹시 얼마 전 전매권 새로 하나 나온 거, 설마 레이 네가 그런 거니?”

“네. 저예요.”

오스카는 해맑은 대답을 하는 레이를 보다가 저도 모르게 옆에 앉은 루이반 공작을 바라보았다.

눈 마주치기도 불편한 사위였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오스카는 눈빛으로 말했다.

─너 안 말리고 뭐 했니.

오죽하면 저 소심쟁이 아버지가 라미엘을 보며 저런 눈빛을 다 할까.

레이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오스카는 자기가 라미엘을 봤다는 것도, 저런 눈빛을 보냈다는 것도 아마 자각 못 했을 것이다.

“다음에 제가 킹크랩 가지고 오면, 지금 그 눈빛, 아버지 후회하게 될 거예요.”

레이의 말에 오스카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래. 제발 후회하게 해 다오.”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오스카는 레이가 가져온 업무 협약서에 사인을 했다. 이로써 킹크랩 수송 및 상품화 준비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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