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제로에서 백까지
게만 잡는 어부들을 구한다는 말에 루이즈 어시장에서는 이게 무슨 미친 일인가 했지만, 평균보다 높은 보수에 그 미친 일 제가 해 보겠다며 많은 사람이 신청을 한 상태였다.
그중에서 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어부들을 선별해 소속 일꾼으로 만들고 어선에 태워 보냈다.
루이즈에서 잡아 온 킹크랩을 산 채로 이동시킬 수 있는 시설은 없으니 현지에서 마력석으로 급속 냉동시켜 헬라로 옮기면 본격적인 판매 시작이다.
그 일이 일어나는 동안 레이는 킹크랩을 널리 홍보하고, 고대 마력석 광산을 돌보고, 필경사 양성소에 들러 얼굴도 비쳐야 했다.
“그럼 전 ‘제 광산’에 좀 다녀와 볼게요. 광산 잘 있죠?”
피뢰침 없는 그곳은 이제 번개가 광산을 치다 못해 예전처럼 땅까지 침범했다고 들었다.
“그래, ‘네 광산’ 여전히 잘 있더라.”
“아차, 아버지. 저 계약금 3라블 중에 1라블은 지금 지불할 수 있어요. 계약서에 요 항목 추가해 주세요.”
“뭐가 그렇게 급해서? 내년에 완불하기로 했잖니.”
일단 계약금이 오가야 더 확실하게 제 것이 될 것 같아 레이는 우승 상금을 지금 모두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제가 올해 사냥제 우승한 거 아시죠? 그 기념이에요.”
사냥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레이는 한껏 자신감 넘치는 포즈를 취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어김없이 라미엘의 ‘활짝 미소’를 유발하곤 했다.
“그, 어후, 세상에…….”
레이의 우승 소식 때문인지 라미엘의 미소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오스카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심한데.”
인근 땅이 온통 새카맣다. 광산에 떨어지다 못한 벼락이 인근까지 초토화시켰다더니. 피뢰침이 없는 땅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하지만 벼락이 이렇게 심하다는 건 그만큼 고대 마력석이 에너지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말이기에 처참한 꼴을 보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피뢰침 설치만 되면 이 땅 좀 어떻게 정비해야겠어요. 누가 봐도 밟으면 큰일 나게 생겼어.”
“벼락만 광산 내부에 흘려보내게 된다면 복구는 금방 될 겁니다. 원래 풀 한 포기도 없는 곳인 게 다행입니다.”
버려진 황무지라고 내내 원망했는데 아무것도 없는 게 다행인 일이 되었다.
피로연 끝나고 피뢰침 하나가 망가진 이후, 다른 것들도 며칠 지나지 않아 연달아 사망을 했다. 보라색 마력석이 달린 비싼 피뢰침이었기에 돈이 없는 광산주 레이는 소식을 듣고도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내 내버려 뒀더니 이 지경까지 온 것이었다.
지금도 광산 가까이 가 보거나 땅을 제대로 밟고 서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제 벼락이 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눈에 보이는 대강의 상황만 살피는 중이었다. 피뢰침이 없으니 생각 없이 광산 땅 가까이 갔다가 예기치 못한 벼락에 맞게 될 수도 있다. 지금도 광산 근처엔 번쩍이는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피뢰침이 빨리 만들어져서 좋네요.”
오늘 저녁 중으로 황실에 의뢰했던 강화 피뢰침이 설치가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은 저녁까진 르아넬로에서 머무를 예정이었다.
“이제 고대 마력석 개발, 시작이에요.”
레이는 라미엘을 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고대 마력석은 이름이 뭡니까.”
“별도의 이름은 없는 것 같아요. 고대 기록엔 그냥 마력석이라고만 남아 있대요.”
고대의 마력석은 지금의 일회성 마력석이 대중적인 것과 반대로 다시 채워 쓸 수 있는 것이 기본이었으니 별도로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 레이가 이름을 지어 줘야겠네요. 기존의 마력석하고 전혀 다른 새로운 상품이고 지금으로선 유일하게 레이가 소유하고 있으니까.”
마냥 고대 마력석이라고만 불렀지 상품에 새로 이름을 붙이는 건 생각도 못 한 부분이었다.
“역시 광산주는 생각부터 다르네요.”
마력이 없어도 에너지를 내는 신종 광물이니 고대 마력석이라 부르기 애매한 부분이 있긴 했다.
레이는 시선을 돌려 저 멀리에 있는, 문이 닫혀 있다고는 하나 빛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아 어둡게 그늘져 있는 광산 입구를 보았다.
‘아무도 가지려 하지 않았는데.’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석유 때문에 얼결에 발견된 뒤 내내 르아넬로의 골칫덩이로 미움받던 땅과 광산이었다. 한순간에 이렇게 존재 가치가 바뀔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길가의 돌멩이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귀한 자원으로, 180도 환골탈태했다.
지금 대신전에서는 번개 말고 다른 에너지원으로 고대 마력석을 채울 수 있는지도 연구 중이라고 했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다신 없을 귀한 자원이 될 것이다.
레이는 자신 옆에 서 있는 라미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꼭 지금 상황 같네.’
처음 이 남자를 만났을 때만 해도 미래가 이렇게 될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결혼식을 할 때도 그런 생각이었다. 1년만 잘 버티고 수도를 벗어나서 살자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랬는데 지금은 일 때문에 수도와 헬라를 바쁘게 움직이고 있고,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 사업까지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을 하는 데에 아낌없이 지원하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고 대가조차 바라지 않는다. 그 후원자는 제 마음과 감정도 포용하며 항상 묵묵하게, 든든하게 곁을 지키고 있다.
“영애와 결혼을 하고자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이에서 지금은…….
레이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때와 지금의 라미엘의 눈빛을 보면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런 표정을?”
라미엘이 레이의 입술을 톡 건드리며 물었다.
“라엘이 나한테 프러포즈했을 때 생각이 나서요.”
“프러포즈?”
“나한테 결혼 제안하러 왔을 때요.”
레이의 말에 라미엘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감정이라곤 하나도 안 보였죠. 완전 감정 제로였는데 지금은 아주 꽉 찬…….”
“제로?”
라미엘의 질문에 레이가 아차, 하는 얼굴을 하고는 이내 설명을 달았다.
“영(0)이란 뜻이에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이기도…….”
생각났다.
“이름, 정했어요.”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귀한 광물이 된 고대의 유물. 쓸모없던 것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마력석이 된 자원이니 이보다 어울릴 이름은 없다.
“고대 마력석의 이름은 ‘제로석’이라고 부를 거예요.”
***
루이반 부부를 부르는 황실 초대장엔 다가올 봄맞이 연회를 한다고 쓰여 있었다.
계절상으로 봄이 코앞인 건 맞지만 날씨는 겨울이었다. 지난번 내린 폭설은 아직도 응달에 잔뜩 쌓여 있었고 여전히 날은 추웠다. 외출할 때마다 매서운 바람이 볼을 스치곤 했다.
‘갑자기 봄맞이 연회라니.’
날씨가 따뜻해지는 완연한 봄이 되면 황실에선 봄 연회를 열곤 했다. 그런데 굳이 이 시기에 봄맞이 연회를 개최한다니. 이는 황실에 무언가 크게 축하할 거리가 생겼다는 말이었다.
황제가 갑자기 병상을 박차고 벌떡 일어나 정사를 보게 된 것은 아닐 테니 남은 것은 하나다. 태자비가 임신을 했을 것이란 걸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위험한 시기를 넘기고 이제 대중에 공표를 해도 되겠다는 판단이 선 것이겠지. 그러나 황제가 병상에 있으니 대놓고 축하 분위기를 내기 어려워 봄맞이 연회라는 평범한 이름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리라.
“역시 태자 전하의 웃음엔 이유가 있었어. 후후후훗.”
윌포프가 황실 초대장을 줄 때 레이의 심장은 터질 듯 격하게 뛰었다.
황실!
귀부인들의 티파티나 귀족들 모임에 나가서 킹크랩을 홍보하려고 했는데 홍보 끝판왕 황실이 등장했다.
말은 연회지만 축하연인 게 분명한 상황이다. 축하연을 열면 초대객은 축하 선물을 준비하는 게 보통이었고, 선물 개봉식 후에 만찬을 연다.
태자 부부는 높은 단상 위, 상석에서 식사를 하기 때문에 모두의 눈에 띄는 위치에 있을 것이다. 만인에게 상품을 선보일 수 있는 최고의 홍보장이었다.
“레이의 웃음에도 이유가 가득해 보이네요.”
“태자비 전하의 경사가 좋아서 웃는 건데?”
라미엘의 말에 레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박했다.
“손에 쥔 킹크랩 서류나 내려놓고 말해요.”
“아, 들켰다.”
라미엘 혼자 일을 하던 집무실은 레이와 공동의 공간이 되었다.
레이 전용의 집무실이 차려지는 동안 라미엘의 공간을 빌려 쓰는 중이었는데, 루이반 모두는 아마 레이의 집무실이 생겨도 두 사람이 따로 각각의 공간에서 일하는 광경을 보는 일은 잘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대단한 점은 평소에 그렇게 달라붙어 있는 부부가 일을 할 때면 철저하게 일에만 몰두한다는 것이다. 테일러가 보고 놀랄 지경으로 완벽한 공사 분리였다.
그는 공작이 마님 곁에 있으면 일을 제대로 못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했다. 예전의 라미엘이었다면 공사를 확실히 구별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레이가 라미엘보다 위에 있다는 걸 눈치챈 뒤로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테일러는 마님 집무실 공사를 어떻게든 빨리 끝내 주인님 업무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레이를 보는 테일러의 눈은 이번에도 실착이었다. 마님이 정말 진지하고 철저하게 자기 사업을 열심히 하실 줄은 몰랐다.
워낙 주인님 외모에 홀려 사시는 분이니 일을 하다가도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흔들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테일러는 하여 다시금 속으로 자기반성을 해야 했다.
레이가 사업을 한다고 나선 이후, 루이반은 제법 큰돈을 지불하고 있었다. 전매권부터 시설 비용에 이르는 돈은 그렇다 치더라도, 필경사 양성이나 킹크랩과 상관이 없어 보이는 피뢰침 의뢰에 레이가 별도로 쓰려는 것까지 모조리 부담하고 있었다.
이 정도 액수로 루이반이 휘청할 일은 없지만, 아무리 공작 부인이라고 해도 뭔지도 모를 일에 자꾸 돈을 쓰려 하는 건 영 꺼림칙했다.
그런데 마님은 마님 나름대로 뭔가를 열심히 하고 계신 것 같고, 공작 부부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 무언가 확실한 건이 하나 더 있는 듯은 해 보여서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이 이상의 일이 생긴다면 그는 당연히 무슨 상황인지 샅샅이 알아낼 것이고 절대 쉽게 금고를 열지 않을 것이다.
“피뢰침 첨탑을 조금 더 크게 세워야 하나 봐요. 생각보다 벼락 에너지가 많이 큰가 보네.”
레이의 말에 라미엘이 제로석 광산의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들이 오가는 입구 쪽 말고 산 경계로 이어지는 광산 끝부분에 세우면 될 것 같은데요. 이쪽에.”
아직 제대로 완성된 지도는 아니었다. 광산 개발 중에 공사를 멈췄기 때문에 아직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얼마나 더 매장되어 있는지, 안쪽으로 규모는 얼마큼인지, 앞으로 지도는 계속 업그레이드될 예정이었다.
“아차, 헬라 다녀와야 하네.”
“레이, 내가 도울 일은?”
“첨탑 설치만 감독해 줄 수 있어요?”
“얼마든지요.”
테일러는 빨리 마님께도 일을 도울 관리인을 붙여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대로 두면 공작이 그 역할을 하게 생겼다.
“라엘은 최고급 인력이니까, 톡톡히 쳐서 임금 지불할게요.”
레이의 말에 라미엘은 웃었고 테일러는 관리인 채용을 잠시 미루기로 했다.
공작이 웃는 걸 보니 본인이 좋아서 무료 봉사하시려는 모양인데 굳이 거기에 추가 인력을 끼워 넣어 미움받을 필요는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