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알렉스 아틸
“스무 명 등록했습니다.”
라 헬라에 있는 필경사 양성소에 최종 등록한 명단이었다.
소포니악 집정관은 돈만 주면 네가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기에 레이가 직접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라 헬라는 집정관이 세심하게 도시를 돌보며 바쁘게 일하는 사람이라 그쪽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다행이다. 딱 맞춘 거네.”
라 헬라의 집정관이 내걸었던 최소 인원이 달성되었다.
버려진 건물을 활용하려고 했는데 그 건물은 마을 창고로 사용하려고 계획해 둔 곳이라 했다.
창고 예정 건물은 누구나 지나쳐 가는 길목에 있어 접근성이 좋았다. 다른 곳으로 양성소 위치를 정한다면 접근성이 떨어져 어려운 사람들은 찾아오기 힘들어진다.
양성소가 유명해지면 위치가 조금 구석진 곳에 있어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길 테지만, 시작부터 접근성이 떨어지면 생업에 바쁜 빈민가 사람들은 더욱 오기가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이 근처에 건물을 새로 짓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들고 당장 수업을 시작하기 어려웠다.
레이의 사정을 들은 집정관이 합의점을 내놨다.
“스무 명 정도 모이게 되면 양성소 건물로 사용하세요. 인원이 너무 적은데 그 큰 건물을 양보하면 조금 시끄러워질 수 있어요. 사람들을 설득하기도 어렵고.”
저소득층을 상대로 필경사 양성을 하겠다는 레이의 말에 라 헬라의 집정관은 좋은 취지의 일이라며 적극 돕겠다고 했다.
이미 창고 사용으로 가닥을 잡은 건물이었는데, 라 헬라 사람들의 반발 없이 양쪽 다 수긍할 수 있는 스무 명이라는 기준을 세워 용도 변경을 할 수 있게 만든 유능한 집정관은 젊은 청년이었다.
최연소 집정관으로 유명한 그는 열아홉에 추천받은 후, 연임에 성공한 인재였다.
“다행이다. 이제 이 건물 사용해도 되죠?”
“물론입니다, 레이디.”
소문을 들어 보니 여자는 최근 빈민가를 오가며 낭독회를 하고 있는 필경사라고 했다. 좋은 집에서 귀하게 자란 티가 팍팍 나는 레이디는 수도 억양이 진한 걸 보니 이곳 사람도 아닌데 헬라에 와서 빈민가 여자들을 돕고 싶어 했다.
언젠가는 전국적으로 필경사 양성소를 차려 빈민가를 지원하고 싶다는 포부에 집정관은 그녀가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는 뜻을 내보이는 레이디의 눈빛이 별처럼 반짝반짝했다.
전 도시에 양성소를 세워 빈민가를 돕고 종내는 글 모르는 사람이 없게 하고 싶다니. 이렇게 마음씨 고운 꿈을 꾸는 사람은 처음 봤다.
“사용료는 어떻게 하죠?”
레이의 질문에 집정관은 사무실 책장에서 시설 이용과 관련한 서류를 찾아와 내밀며 말했다.
“1년을 상정한 금액을 받고 있는데, 사정에 따라 분기당 지불도 가능…….”
“그럼 일단 3년 치 지불할게요.”
“3년, 3년이요? 저, 말씀하신 건물은 워낙 좋은 위치에 있어서 가격이 조금 비쌉니다. 한번 보시고 결정하시는 게…….”
레이는 집정관이 준 서류를 쭉 훑어보았다. 라 헬라 주요 거점지에 있는 것치고는 저렴한 편이었다. 애초에 마을의 공용 창고로 쓰려고 했었다니 금액 자체를 높게 산정해 두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 정도 지불할 능력 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곧.
레이는 자신 있게 웃었다.
“흠흠. 그럼 이쪽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집정관의 말에 뒤에 서 있던 여자가 레이디에게 펜을 건넨다. 펜을 건네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어색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혹시 귀족인가.’
레이디를 만날 때마다 항상 그녀의 반걸음 뒤에는 두 명의 여성이 서 있었다. 귀한 집 여식인지 담당 하녀를 하나도 아닌 둘이나 데리고 다녔다.
그가 서류를 읽는 레이디를 흘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럴 만해.’
귀족이 아니더라도 저렇게 곱고 예쁘니 어딜 내놔도 불안할 것이다. 자신이 부모였어도 똑같이 했을 터다. 아니, 저 둘이 아니라 기사를 붙여 두었을지도 모른다.
집정관은 모르는 일이지만 레이 뒤로는 그림자 기사 둘이 항시 마님을 수호 중이었다.
귀족 티를 최대한 내고 싶지 않다는 레이의 요청만 아니라면 라미엘은 전담 하녀 둘과 그림자 기사 둘 말고도 또 눈에 보이는 수호 기사를 한 명 더 두었을지도 모른다.
“……아.”
“레이디? 무슨 문제라도?”
서명을 하려던 레이가 성을 쓰려다 잠시 멈칫했다.
루이반.
너무 유명하다. 리담에서 다른 귀족 가문의 이름은 모를 수 있어도 루이반은 아니었다. 초대 황제 때부터 함께 거론되는 이름이니 어지간한 구석의 작은 도시가 아닌 이상 모를 수가 없다.
심지어 이곳은 헬라다. 라비던으로, 황실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득실득실한 도시. 자신이 루이반 공작 부인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루이반의 이름을 쓴다니. 안 될 일이었다.
르아넬로를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헬라의 명물 중 하나가 르아넬로 역이고, 그 가문 장녀와 루이반이 결합한 것 역시도 쉽게 알 수 있으니 이것도 글렀다.
레이는 잠시 고민 끝에 아틸을 적어 넣었다.
‘아예 없는 이름도 아니고, 틀린 것도 아니니까.’
레이알렉시스 아틸. 약식 서명을 하는 부분에는 알렉스 아틸을 썼다.
집정관은 그녀의 손에서 사각이는 글자를 눈에 담았다.
알렉스 아틸. 이게 레이디의 이름이었구나.
“언제부터 사용할 수 있죠?”
“지금 당장 사용하셔도 됩니다.”
그의 말에 레이는 바로 샤메인에게 알려 주란 말을 하며 엘에게 서류를 전했다.
양성소 내부 공사는 샤메인의 도움을 받아 진행하는 중이었다. 최종 확인은 레이가 하지만 공사 인부를 구하거나 일을 진행하는 건 샤메인의 몫이었다.
이제 라 헬라 양성소 일이 얼추 마무리되었으니, 양성소가 이미 운영되기 시작한 소포니악에 가서 상황을 한번 살펴야 했다.
“벌써 가십니까?”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집정관이 물었다.
“뭔가 더 할 게 남았나요?”
“아, 아뇨. 그건 아닙니다. 보통은 오셔서 차라도 한잔하시면서 천천히 이야기하셨거든요.”
집정관을 찾아온 이들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을 얻어 내기 위해 언제나 차를 한잔 마시며 오랜 시간 머물다 가곤 했다.
집정관은 소도시를 이끄는 최고 지도자다. 그가 행하는 행정에 마을 하나의 흥망이 달려 있기에 권력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를 찾곤 했었다.
“아…….”
집정관의 말에 레이는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너무 흥정도 없이 덜컥 진행했구나.’
3년 치를 한 번에 납부할 테니 조금 깎아 달라고 할 걸 그랬다. 예상보다 저렴한 임대료에 예산을 더 깎아 볼 생각도 못했다. 초보 사업가의 실수였다.
“그럼 다음에 연장 계약할 때, 집정관께서 싸게 해 주는 걸로 알게요.”
“네? 아, 네에.”
그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을 때.
“델마!”
누군가가 집정관 사무실 문을 세게 박차며 들어왔다.
‘델마?’
여기 여자라곤 레이와 엘, 케이 셋뿐이다. 남은 사람이라고는 검게 그을린 피부에 건장한 체격의 남성미 넘치는 집정관밖에 없는데, 델마는 한들한들한 레이디를 연상케 하는 이름이었다.
급하게 들어온 중년 남성을 보며 집정관이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6지구 가는 길목에 마차가 전복됐어!”
“거기서 또? 알겠어요. 바로 가 볼게요.”
델마가 집정관의 이름이었다니.
“급한 일이 생겨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에 오시면 제가 차 한잔 꼭 대접하겠습니다.”
집정관의 인사에 사무실에 들어온 남자가 큰 소리로 델마가 끓이는 차는 맛이 아주 기가 막히니 꼭 드셔 보시라며 추천까지 하고 나갔다.
집정관의 외모는 차를 끓이기보단 차라리 찻주전자를 만드는 게 더 어울릴 법했는데. 역시 사람은 보이는 걸로만 판단해선 절대 안 되는 모양이다.
“델마라고 해서 아저씨들이 기대하고 왔다가 얌전히 차만 먹고 갔던 거 아냐? 그래서 맛있게 느껴진 거지.”
레이의 혼잣말에 케이와 엘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도 이름과 외모의 괴리를 느끼고 있던 듯했다.
***
“잘들 있었어?”
소포니악의 필경사 양성소에 레이가 들어섰다. 수업이 막 끝난 시간이었다.
“알렉스 님! 오랜만이에요!”
빈민가에서 낯을 익혔던 낭독회 청중들이 모두 앞 다투어 레이를 반겼다.
이렇게 늦게 올 생각은 없었다. 수업 전에 선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학생들에게 얼굴만 비친 뒤 바로 가려고 했는데 소포니악 집정관하고 싸우다가 늦어 버렸다.
소포니악에서 오래 살았다는 이유 하나로 집정관에 추대된 늙은 남자는 정말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아는 것도 없었다. 문의를 할 때마다 명확히 돌아오는 답은 없었고, 돈이나 내고 나머진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처음에 양성소 건물 사용 건으로 갔을 때는 쉽게 나는 허가에 편한 줄만 알고 좋아했더니, 그 이후 관련 일로 찾아갈 때마다 계속 이런 식이니 오히려 진척이 없었다.
그나마 만날 수 있기라도 하면 다행이지, 그는 자리에 잘 있지도 않았다. 툭하면 자리를 비우는데 돈만 내면 다 해도 된다는 식이라 레이가 알아서 처리해야 했다.
어쩐지 라 헬라에서 소포니악으로 넘어오는 길이 경계라도 있는 양 차이가 확연하더라니 이유가 있었다. 잘 관리되는 말끔한 길과 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길의 차이였던 것이다.
이 꼴을 보니 수도와 떨어진 공작령도 매끄럽게 잘 돌아가게 하는 라미엘과 루이반 식솔들의 능력과 부지런함에 놀랄 수밖에 없다.
빈민가에서 양성소로 오는 길은 제대로 정비가 되지 않아 걸으면 거의 한 걸음에 한 번씩, 툭하면 돌이 차였다. 바닥에 홈이 파인 건 예사였다.
이런 길은 마차라도 지나간다면 돌이 튀어 사람이 다칠 수가 있고 만약 잘못되면 마차가 전복될 수도 있었다. 올 때마다 건의했지만 여태 변화는 없었고 그 건으로 레이는 소포니악 집정관과 한바탕 하고 온 길이었다.
“그 길을 누가 마차를 타고 다닌답니까.”
“마차가 아니더라도 사람이 다칠 것 같다니까요?”
“아유, 그 동네는 답이 없어요. 정비해 봤자 금방 또 망가질 거, 돈도 없는데 왜 그 짓을 합니까. 세금이 없어요! 세금이!”
라 헬라 집정관이 너무 일을 잘하다 보니 행정력이 상대적으로 더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양성소를 차릴 때도 소포니악에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레이가 했다면, 라 헬라는 레이가 말한 바를 바로 알아듣고 마땅한 건물을 알아봐 주거나 빈민가 여성들에게 가서 소식을 알리는 등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결국 소포니악의 길은 레이의 힘으로 정비가 되었다. 베르니의 인력을 빌려 길거리를 대강 정비해 두고 차후에도 변화가 없다면 다시 소포니악의 집정관과 싸우러 갈 생각이었다. 그때는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끌어모아 압력을 가할 것이다.
“글 배우는 건 어때?”
이제 이틀 차. 아직 글자가 눈에 익지도 않았을 시간이겠지만 레이의 질문에 다들 합창하듯이 재밌고 좋다며 싱글벙글했다. 무언가를 배우고 익히는 것 없이 고된 일만 해 오던 삶에 ‘공부할 기회’가 생겼다는 자체가 그들에겐 기쁨이었다.
“피곤하지는 않아? 다들 일하다가 온 건데.”
“힘들어도 배우다 보면 피로가 가셔요.”
수업이 조금은 늦은 시간이라 엄마들은 일찍 어린아이들을 재우고 나온다. 일이 끝나고 아이가 자는, 유일한 쉬는 시간을 내어 오고 있는 것을 알기에 레이는 무엇이든 더 챙겨 주고 싶었다.
“열심히들 배워. 이거 공짜 아닌 거 알지?”
“알아요, 알아.”
“한가해지면 내가 낮에 또 찾아와서 책이나 재미있는 연극 대본 같은 것도 읽어 주고 그럴게.”
레이의 말에 여자들이 크게 감동받은 얼굴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