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처음 선보이는 순간
소포니악 사람들 그 누구도 자신들을 돌보거나 바라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동네 으슥한 곳에서, 저 구역만 없어지면 더할 나위 없겠다는 차디찬 시선만 받아 보며 살았다.
그런데 레이가 말만이라도 이렇게 챙겨 주고 있다는 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물론 레이는 말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필경사로 키우겠다는 말을 지키기까지 하고 있었다.
레이가 라 헬라까지 오가며 정신없이 바빠 보이는 건 그들도 잘 알았다. 그런 와중에도 레이는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보듬고 있다. 그녀의 이런 마음이 고된 삶의 한 줄기 위로같이 느껴졌다.
“무슨 소리예요. 바쁜데 억지로 오지 말고, 우리 애들 책은 내가 읽어 줄 테니까 걱정 마세요.”
리첼의 말에 레이가 그거 참 좋다며 웃었다.
“네가 동화책 읽어 주는 거 기다리다가 리리가 먼저 글자 배우는 거 아냐?”
“그럼 리리가 낭독회 하는 거나 듣게 되는 거지.”
여자들이 즐겁게 수다를 떨었다.
‘괜히 돈 쓰는 거 아닌가 했는데.’
이들을 보고 있자니 양성소가 잘 정착된 것 같아 레이는 뿌듯함을 느꼈다.
“롭, 너도 잘 배우고 있지?”
양성소의 유일한 남학생인 롭은 베르니에서 잡일을 하며 월급을 받고 저녁에는 소포니악에서 수업을 듣는 중이었다.
레이의 배려로 베르니에 잡부로 취업이 되었지만 명목상으로나 베르니 하인이지, 잡다한 소일거리나 맡기고 있어 베르니는 거의 숙박을 제공하는 곳에 불과했다.
롭은 거의 소포니악 양성소에서 살다시피 했다. 라 헬라의 양성소는 집정관 델마가 신경을 잘 써 주는 덕에 추가 인력이 필요하진 않았다.
그래서 롭은 소포니악 양성소에서 공부를 하며 잡부처럼 모든 일을 도우려 애썼다. 제 나름의 보은을 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네! 저 이제 제 이름 쓸 줄 알아요!”
“야, 이번 이틀간 배운 게 이름 쓰기니까 당연히 알아야지!”
리체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뭘 해도 웃음이 나는 즐거운 공간이었다.
순조롭게 잘 진행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
“됐어. 완벽하다.”
방금 쪄 낸 냉동 킹크랩도 풍미는 훌륭했다. 예상했던 대로 충분히 상품화 가능이다.
헬라에 설치한 킹크랩 창고에 마력석이 설치됐다. 이제 반절은 냉동 창고가 되어 급랭한 킹크랩을 보관하게 되었다.
특이 식재료의 등장에 베르니의 주방장 피터는 처음엔 몹시 당황했지만, 뛰어난 요리사답게 곧바로 킹크랩을 재료로 한 요리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사흘 후면 킹크랩을 들고 황실로 가야 하는 레이를 위해 짧은 시간 최선을 기울인 결과.
“원래의 맛이 워낙 좋아 굳이 다른 양념을 첨가할 필요가 없는 듯합니다.”
다른 여러 레시피가 나왔지만 본연의 맛을 해치지 않도록 그냥 쪄 낸 살을 먹는 게 가장 좋다는 결론이 났다.
본디 피터가 추구하는 건 재료 본연의 맛을 가장 맛있게 살려 내는 일이었다. 이는 레이의 요청과도 일맥상통했다.
비린 맛이 살짝 느껴지는 것 같으면 레몬즙을 조금 뿌려 주고, 해산물 맛에 예민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기존의 게 요리처럼 버터에 볶아 내는 것으로 충분했다. 거기에 레이가 말한 대로 치즈를 살짝 녹여 올리면 그 이상의 요리는 없을 듯했다.
“피터, 수고했어. 진짜 맛있다. 확실히 요리사가 찌는 게 다르네.”
“아닙니다. 다 마님께서 알려 주신 대로만 만든걸요.”
“그래도 확실히 내가 한 것보단 피터가 한 게 맛있어.”
온갖 재료를 다 만져 보고 맛보는 전문가의 눈썰미는 놀라웠다. 시범 한번 보인 것뿐인데 그 이후로 척척 킹크랩 요리가 진행되었다.
요리가 만들어질 동안 실패한 작품들은 베르니 식솔들이 나눠 먹었다. 말이 실패지 기본 맛이 워낙 충실한 식재료다 보니 다들 즐겁고 신나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제 수도로 가 볼까?”
레이는 다른 요리사에게 킹크랩 요리법을 알려 줄 피터를 데리고 라비던으로 출발했다.
루이반에 왔는데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보이질 않았다.
라미엘이 첨탑 공사 마무리를 위해 자신의 광산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레이는 곧장 다시 마차를 타고 그리로 향했다.
“라엘!”
라미엘이 레이의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레이. 어서 와요.”
“라엘 일도 바쁠 텐데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첨탑은 어제 설치를 모두 완료했다. 그런데 라미엘은 오늘도 여기까지 와서 다시 검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피뢰침 설치 끝나자마자 엄청난 광경을 봤는데, 레이가 오면 가장 먼저 알려 주고 싶었어요.”
“무슨 일이었는데요? 설마 피뢰침이 터진 건 아니죠?”
워낙에 벼락이 잦게 떨어지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지금 의뢰한 것보다 더 강력한 피뢰침을 꽂았어야 하나, 같은 생각을 하는데 라미엘이 레이의 손을 잡고 광산으로 걷기 시작했다.
“조금 다른 게 터졌습니다.”
“다른 거라니. 설마 피뢰침이 아니라 첨탑이 터진 건, 아니겠죠?”
라미엘은 대답 대신 광산 입구까지 묵묵히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문 앞에 도착했을 때야 입을 열었다.
“레이가 더 바빠질 것 같아서 벌써부터 걱정이 되는데…….”
끼이익.
몇 달은 닫혀 있던 거대한 광산 문이 열렸다.
그리고.
“세상에…….”
레이의 입이 벌어졌다.
광산이 온통 초록빛이었다. 언제나 빛 하나 없이 거무죽죽하게 죽어 있던 어두운 공간은 꽉 찬 제로석이 내는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작 이렇게 벼락을 흘려보냈어야 했나 봅니다.”
값비싼 피뢰침으로 상쇄시키지 말고 적당히 평범한 피뢰침을 꽂았으면 일찍이 발견했을 수도 있었다. 그간 비싼 돈을 들여 이 대단한 발견을 늦추고 있던 것이다.
“레이 사업이 제대로 터졌어요.”
대박이 터졌다.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체감되는 수준이 너무도 달랐다.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라엘, 지금 이게 꿈은 아니겠죠? 아냐, 꿈이어도 돼. 안 깨면 되니까.”
레이는 가까이에 있는 작은 제로석 조각을 하나 집어 들었다. 검지 두 개를 합친 정도의 작은 크기인데도 선명하게 녹색으로 빛이 난다.
피뢰침 설치 공사비가 많이 들었는데 그게 한순간에 상쇄되는 걸 눈으로 보는 기분이었다.
설치 작업 자체는 간단하고 쉬운 일인데 혹여나 작업 중에 벼락이 떨어져 인부들이 다칠까 봐, 벼락을 막아 주는 마법을 건 특수 제작 의상을 제공했기 때문에 공사 비용이 상당히 오른 상황이었다.
“레이는 이제 광산 인부들 뽑고, 보안 전문가도 영입해야겠네요.”
귀한 광물이니 보통의 마력석 광산보다 보안에 한층 더 신경 써야 할 것이다.
“그러게요. 준비할 게 많겠어.”
“그전에 킹크랩도 있네요. 연회 때, 황실에 올릴 거죠?”
“네. 피터도 데려왔어요. 확실하게 보여 드릴 거예요.”
레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라엘, 연회 준비하러 가요.”
이제 시작이다.
***
봄맞이 연회답게 여기저기가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마법으로 만든 형형색색의 빛 덩어리 나비가 살랑살랑 날아다녔다. 커다란 창밖으로 보이는, 눈이 쌓인 풍경만 가린다면 그야말로 포근하고 아름다운 봄의 광경이었다.
연회장 천장에선 나비처럼 마력으로 만든 벚꽃 잎이 하늘하늘 떨어져 내리다 머리 위에서 사라졌다.
“예뻐라.”
연회장에 들어선 이후 레이의 눈이 천장에서 내려오질 못하고 있다.
“라엘, 우리 정원에도 꽃나무 많아요? 이런 거 심을까?”
분홍빛이 살짝 도는 자그마한 꽃잎이 눈처럼 날리는 광경이 레이의 마음을 흔들었다.
한국에서 유주와 벚꽃축제 하러 갔던 생각이 났다. 수많은 인파에 밀려 꽃은커녕 앞사람 뒤통수 수천 개만 보고 왔던 그 기억. 다신 꽃놀이 안 간다고 결심했는데, 그래도 매년 봄에 핀 벚꽃을 보면 설레고 즐겁긴 했다.
“손으로 잡아 볼 순 없으, 어머.”
떨어지는 벚꽃을 잡아 보려 손을 뻗다가 지나가던 마이클레이 공작을 살짝 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꽃잎을 잡아 보려다 실수했습니다.”
마이클레이 공작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루이반 공작 부인, 공작님.”
사냥제에서 새끼 호랑이를 잡았던 마이클레이 공작의 인사에 라미엘과 레이도 답인사를 했다.
사냥제 이후 마이클레이 공작은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 없이 저택에서 칩거 중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마이클레이 공작 부인의 몸이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그 어떤 모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공작이 나온 걸 보니 부인의 병세가 차도를 보이는 모양이었다.
“부인께선 좀 괜찮으신지요.”
라미엘의 질문에 공작의 얼굴이 펴졌다.
“네, 며칠 전부터 거동을 시작했습니다.”
“어머나, 너무 다행이에요. 이제 곧 쾌차하실 겁니다.”
레이의 말에 공작이 미소로 고맙다 답하며 자리를 떠났다.
레이의 기억에 마이클레이 부인은 화려한 걸 좋아하는 듯했고, 언제나 그녀 주위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유쾌하고 즐거운 수다로 주변을 즐겁게 만드는 입담 좋은 사람이었다.
“확실히 마이클레이 공작 부인이 안 계시니 연회가 조금 조용한 느낌이에요.”
레이의 말에 라미엘도 동의했다.
“음, 뭔가 다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차이였군요.”
케이틀린의 무리와 메리엔 무리가 합쳐지면 파티가 떠들썩해졌다. 분위기도 한층 오르고 흥겨움이 물씬 퍼져 웬만한 연회라면 초대 1순위가 마그스너 영애와 마이클레이 공작 부인일 정도였다.
“공작님.”
그때 이즈만 백작이 다가오며 라미엘에게 인사를 청했다. 그 모습을 보니 본격적인 연회의 느낌이 물씬 나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과 한창 인사를 나누기 시작할 무렵, 태자와 태자비가 등장한다는 안내 소리가 들렸다.
두근두근.
레이는 라미엘의 팔짱을 좀 더 꼭 끼며 심장을 달랬다.
만인에게 킹크랩을 처음으로 선보일 순간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