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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96화 (96/160)

96화. 세상에 하나 더

드레스 품이 헐렁하고 넓었음에도 봉긋하게 솟아오른 태자비의 배는 가려지지 않았다. 봄맞이 연회는 모든 이들의 예상대로 태자비의 임신 축하연이었다.

몇 개월째 태자의 눈 밑에 붙은 광대가 내려가질 않는 이유가 공식적으로 명확히 밝혀졌다.

제법 오랜 시간 황실에 후계가 생기지 않아 걱정이었는데, 그 불안은 모조리 씻겨 나갔다. 태자가 이제야 밝히게 되어 속이 후련하단 얼굴을 했다.

“역시 맞았네요. 후계자 잉태라니.”

“저래서 태자께서 계속 웃으셨나 봅니다.”

“태자비께서 너무 대외 활동을 안 하신다 했더니 조심하느라 그러셨구나.”

모두 예상하던 바였다. 황실의 후계 잉태 소식에 모두가 한마음으로 축하의 말을 건네고 박수를 쳤다.

남은 식순은 간단했다. 선물을 공개하고 그 뒤로 만찬을 즐기면 끝이었다. 태자와 태자비에게 올리는 선물은 다들 눈치챈 것처럼 아기에게 미래의 축복을 비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미 세상에 좋은 웬만한 물건은 전부 소유하고 있을 황실이니 마음과 정성이 담기되 다른 사람과 겹치지 않을 선물이 필요했다.

루이반 부부는 고심 끝에 레이의 최고 인맥 중 하나인 헤덴을 생각해 냈고, 레이는 대신전을 찾아가 헤덴과 이세계 정보 하나를 맞교환해 축복이 가득 담긴 아기 팔찌를 선물로 올렸다.

레이는 투덜거리면서도 축복을 내려 준 헤덴과 사적인 일로 찾아갔어도 그를 만나도록 배려해 준 대신전 측에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 기부도 했다. 헤덴은 당연히 돈 받을 생각이 없을 테니 그에게 적당한 금액을 묻지도 않고 바로 신전 곳간지기를 찾아가 그와 이야기한 뒤 직접 전달했다.

“그런데 공작 부인께선 혹시 좋은 소식 없으십니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만찬 시작 직전, 루이반 부부에게 다가와 인사를 한 보베 후작 부부가 슬쩍 운을 뗐다.

‘소식? 무슨 소식?’

2초 뒤 깨달음이 왔다.

‘좋은 소식이라.’

생각해 본 적 없는 분야의 일이긴 했다. 레이가 잠시 말을 않자 보베 후작 부인이 바로 말을 이었다.

“두 분께서 워낙 사이가 좋으시니 한 말입니다. 제 말은 그냥 무시해 주십시오.”

루이반 부부가 이렇다 저렇다 답을 하지 않으니 보베 후작 부인이 바로 말을 거두었다. 하지만 후작 부인의 말로 레이는 귀족들의 생각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젊고 사랑이 넘치는 부부니 결혼을 하자마자 바로 아이가 생길 것 같았는데 몇 개월이 지나도록 2세 이야기가 없으니 그것 나름대로 또 말이 나오려는 듯했다.

“생각도 못 한 부분이네요.”

멀어지는 후작 부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레이가 라미엘에게 속삭였다.

“내가 거부가 될 거라는 좋은 소식이 있긴 있는데.”

그 말에 라미엘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레이 자신이야 이런 방면을 아예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기에 그렇다 쳐도 라미엘은 어떨지 모른다. 한 번도 가족계획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해 본 적은 없으니 이제라도 좀 진지하게 나눠 봐야 할까.

“라엘, 혹시 생각이……?”

“그건 레이가 결정해요. 이 문제에는 내 생각이 중요하지 않아요. 오롯이 레이가 생각하고 결정할 문제니까.”

라미엘의 말에 레이가 놀랐다.

‘이 남자, 생각이 정말 선진적이다. 아니면, 날 너무 좋아하는 건가. 어쩜 이런 말을 다 하지?’

그러고 보니 라미엘은 단 한 번도 계약 차후의 일에 대한 언급을 한 적이 없었다.

이전에야 서로 계약 이후의 일까지 간섭을 안 하는 게 맞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같이 미래를 보고 있는 중이다. 언젠가 한 번은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할 주제이긴 했다.

‘그런데 라엘은 본래 계약이 끝나면 어쩔 생각이었지?’

자신이야 낙향해서 사는 거였고 이 남자는 수도에 혼자 남아 대체 뭘 하려고 했을까.

재혼을 염두에 둔 것 같지는 않았다. 마치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것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아, 라엘이 아이를 싫어할 수도 있겠구나.’

실제로 라미엘은 피임을 하고 있었다.

리담의 피임법은 남성이 약을 먹는 방식이었다. 정자의 운동성을 억제시키는 약으로 독초를 잘 정량해서 다른 약초와 섞어 만든 작은 환을 거사 직전 물과 함께 삼켰다.

맹독으로 만들기 때문에 자칫 조금만 잘못해도 몸에 이상이 생길 수 있어 피임약은 황실에서 인정을 받은 약 제조에 능한 약사만이 제조할 수 있었다.

보통 약혼을 하게 되면 집안에서 받는 것 중 하나가 잘 제조된 피임약이었다. 파혼을 하게 될 수도 있는데 임신을 하면 상황이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아마 라미엘은 계약 결혼인 걸 안 윌포프나 테일러가 챙겨 주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걸 먹었었단 말이지.’

레이가 라미엘의 얼굴을 흘끗거렸다.

─아이 싫어해요?

지금 상황에선 절대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니, 언젠가 날을 잡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할 것 같다.

‘나와 라엘의 아이…….’

레이 역시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임신과 출산은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도, 출산 전후 과정이 너무나 고되다는 것도 배우긴 했지만 내 일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에 제대로 와닿진 않았었다.

‘음, 세상에 라엘이 하나가 더 생긴다?’

“……미쳤네.”

상상만으로도 세상이 한층 더 풍요로워졌다. 물론 낳고 키우는 과정이 훈훈하고 마냥 즐겁지만은 않겠지만 기분이 굉장히 묘하고 들뜨긴 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요, 레이?”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내 피가 섞인 라엘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설레서요.”

레이의 말에 라미엘은 조금 충격을 받았다.

‘레이가 하나 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언제나 현재만 보며 살았다. 미래를 바라본 적이 없었기에 계약 이후의 일도, 미래의 루이반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당연지사 후계에 대한 것도 고려하지 않았다.

아이는커녕 결혼도 싫었으니 후일을 논의하는 건 한참 후의 일이라 여겼다. 자식이 없으니 윌포프가 나서 양자라도 데려올 수도 있겠다고 막연히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에게 미래란 이런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에게 미래와 기대를 알려 준 사람이 저런 말을 해 주니, 처음으로 생각하게 된다.

‘세상에 레이가 하나 더 있다면.’

어떤 감정인지 짐작조차 되질 않는다.

하지만 레이의 눈에는 본인도 모르는 그의 감정이 보였다. 라미엘의 표정을 보니 미래 가족계획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할 듯싶었다.

“앞으로 이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이야기도 많이 나눠야겠고.”

레이는 포옹 대신 라미엘에게 팔짱을 더 깊숙이 꼈다. 그런 레이의 손 위로 라미엘이 자신의 손을 겹쳤다.

다정해 보이는 루이반 공작 부부에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가볍게 꽂혀 들었다.

모두의 축하 속에 연회 만찬이 시작되었다.

레이가 가장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황실에 미리 연락해 루이반이 축하 음식을 하나 태자비께 올리겠다고 요청해 둔 뒤로 계속 심장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거상 레이알렉시스가 세상에 드러나는 때였다.

황족이 앉는 단상 위 자리는 연회장 내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위치였다.

원래는 귀족들 파티에서 킹크랩을 선보이고 조금씩 입소문을 낸 뒤 정식 봄 연회에 황실에 올려 정점을 찍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봄맞이 연회가 먼저 열려서 킹크랩 판매는 처음부터 강력한 한 방을 갖고 시작하게 되었다.

운이 너무 좋다며 싱글벙글하는 레이에게 테일러가 말했다.

“모든 일에 있어, 특히나 사업은 운이 중요한 성공 요소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운이 좋아도 그걸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수익을 내기 어렵습니다. 마님께서 철저히 준비를 해 오셨기 때문에 허둥대지 않고 운을 맞이하신 겁니다.”

테일러의 다정한 한마디에 레이는 응원을 받는 것 같았다. 아마도 예전의 테일러였다면 이런 말을 절대 안 해 줬을 것이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대하는 테일러의 태도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깍듯한 건 여전했고 정중했지만 분명히 이전에 느끼던 바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기색이었다. 뿌듯했다.

레이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태자 부부가 앉아 있는 단상으로 시선을 보냈다. 마침 태자와 태자비 앞으로 킹크랩이 놓이는 중이었다.

태자비 르누아는 제 앞으로 놓이는 돔을 보며 물었다.

“이게 무엇이냐.”

“오전에 말씀드린, 루이반에서 올린 특식입니다.”

황실 주방장이 은빛 돔을 열자, 마력석을 이용해 열이 식지 않도록 만든 특수 접시 위로 처음 보는 모양새의 무언가가 모습을 보였다. 음식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랐고, 고소한 향이 김과 함께 퍼져 나갔다.

시각적인 거부감을 없애기 위해 킹크랩 살을 일일이 다 발랐고, 익숙한 맛을 즐길 수 있도록 보통의 게 요리처럼 버터에 볶아 낸 뒤, 그 위로 녹인 치즈를 올렸다.

집게발 살은 접시 위 또 다른 접시에 담아 다리와는 다른 식감을 느낄 수 있게 하면서 버터나 치즈를 올리지 않고 본연의 풍미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포크로 찍거나 떠서 드시면 됩니다.”

레이와 피터를 통해 조리법을 배웠고 함께 먹어 보기도 했기 때문에 황실 주방장은 킹크랩의 풍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주방장의 설명에 태자는 포크로 킹크랩을 푹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하. 이건…….”

입 안으로 달달하고 고소한, 즙 많은 음식의 풍미가 가득 퍼졌다.

황실에 올리는 요리니 수많은 검증을 거쳐 기미도 마치고 올라온 요리였다. 하지만 혹시 몰라 르누아는 안전에 만전을 기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태자의 표정을 보아하니 꼭 먹어 봐야 할 것 같았다.

르누아는 포크를 들고 루이반에서 올라온 음식을 맛보았다. 그리고 태자와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절대 홍보의 장으로 만들지 않으려 했는데.”

루이반에서 축하 음식을 바친다기에 태자는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따낸 전매권 게를 이용할 것이라는 예상은 쉬웠다.

그러나 그 게가 이렇게 대단한 맛을 낼 거라는 기대는 전혀 없었다. 게 양념법이나 연구해 와서 게를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여러 사람에게 알리겠지, 생각했다.

감히 황실을 자기 상품을 홍보하는 데 이용하겠다는 야심과 포부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괘씸하고 불쾌했다. 황실 모독죄를 걸 수 있는지까지 생각이 미칠 지경이었다.

태자는 당연히 거절하려 했으나 주방장이 제발 이건 꼭 전하께서 드셔야 한다, 지금 시기가 가장 맛있는 때라고 한다며 몇 번이나 간곡히 청을 올려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것이었다.

그래서 루이반이 올린 음식을 먹어도 절대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아 홍보가 안 되게끔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먹고 나니 알 것 같았다. 이건 황실의 홍보가 없어도 될 상품이다.

태자는 다른 접시 위에 담긴 붉은 살덩이를 보았다. 메인 요리와 달리 버터에 볶아 내지도, 치즈도 없는 본연의 음식을 한 입 먹었다.

“드신 부분은 집게살입니다. 이쪽에 요리된 것과 식감이 조금 다르고 맛도 조금 다릅니다.”

집게살을 한입 가득 먹은 태자는 저도 모르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

“루이반 공작 부인을 불러와.”

태자의 명에 시종이 말을 전하러 자리를 비우고, 이어 르누아도 집게살을 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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