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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97화 (97/160)

97화. 만감의 월급

태자 부부가 불렀다는 소식에 레이는 잘 넘기던 고기를 뱉을 뻔했다.

만찬을 시작한 뒤, 디저트가 나올 때에 사람들은 자유로이 연회장을 돌아다니며 연회를 즐긴다. 이때나 되어야 태자 부부가 자신을 찾을 줄 알았는데 한창 식사 중에 불쑥 호출이라니. 그것도.

‘루이반 부부도 아니고 나 혼자?’

킹크랩을 먹은 태자 부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퍼지는 것을 본 직후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태자의 단독 호출에 라미엘이 물었다.

“레이, 오늘은 좀 덜 떨 수 있겠어요?”

“네, 어휴. 그나마 두 분께서 웃고 계신 뒤에 불려 가는 거라 좀 낫네요.”

킹크랩을 연회에 올리겠다고 결심한 이후로 머릿속으로 여러 번 상황을 상상해 보며 대본을 만들어 두길 잘했다.

루이반 공작 부인이 식사도 하다 말고 갑자기 자리를 떠나 앞으로 불려 나가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식사 중에 저리 호출을 하시다니.

─아까 음식 올렸다고 했잖아요.

─그게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황실에 요리를 올리면서 문제 될 걸 확인도 안 했을까요.

─부인 혼자 나서는 걸 보니 문제 같지는 않은데.

시선을 한데 받으며 레이가 태자 부부 옆으로 다가갔다.

“태자 전하, 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레이의 인사에 태자는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갔다.

“공작 부인. 이거, 랑크랩이라고 했던가.”

긴장되는 상황에 레이는 웃을 뻔했다. 태자 덕분에 긴장이 살짝 풀렸다.

“킹크랩입니다. 전하.”

“아.”

태자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킹크랩을 먹어 본 적이 있는가.”

“요리를 하면서 몇 번 먹어 봤습니다.”

“아니, 그거 말고 전매권 신청 이전에 먹은 적이 있는지.”

한국에서나 한 번 먹었지 리담에서는 처음이 맞다.

“처음입니다.”

“그런데 어찌 맛있는 줄 알았지?”

맛있다는 태자의 말에 레이는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성공이다!’

그리고 전매권을 따러 갔을 때 긴장한 탓에 게를 좋아한다고 말실수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 실수가 지금 태자의 질문에 대한 가장 정당하고 큰 이유로 떠올랐다.

“전에도 말씀 올렸다시피 제가 게를 너무 좋아하는지라, 큰 게를 발견했을 때 먹을 게 많아서 좋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 게의 맛이 기존 게와 다르고 이렇게 좋을지는 저도 미처…….”

긴장이 조금 풀린 덕분인지 말이 술술 잘도 읊어졌다.

“맛을 보고 가장 먼저 귀한 허가를 승인해 주신 태자 전하와 태자비 전하께 이걸 올려야 하는 게 맞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칭찬을 섞어 가며 레이는 말을 이었다.

“두 분께 올리는 음식인데 조금의 흠도 남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먹고 나서 이상은 없는지, 더 맛있는 조리법은 없을지 연구를 해 본 뒤에야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 연회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고 마침 올리려던 때 지금의 연회가 열려서 이리 되었습니다.”

레이는 태자가 불편해할 부분도 콕 집어 설명했다.

“감히 황실 주최 연회를 제 상품의 홍보 공간으로 만들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루이즈에서 잡혀 올라오는 이 상품을 보관할 수 있는 최적의 창고가 막 지어진 참이라 그런 것인데, 정말 우연입니다. 두 분께서 불편하시지 않게 그간의 공사 기록 내역을 연회 직전에 제출했습니다. 그걸 보시면 시기가 딱 맞았다는 걸 아실 수 있을 겁니다.”

태자가 연 연회를 홍보 수단으로 삼는 대범함이었다. 작위나 목숨이 걸린 미친 짓을 하는데 최대한의 준비는 필수였다. 시치미를 뚝 떼고 홍보가 아닌 척해야 했다.

그래서 레이는 사전에 이 부분도 전부 준비를 해 둔 참이었다.

“전매권 보고서에도 있는 내용이라 알고 계시겠지만 게와 생태 습성이 비슷합니다. 그러니 지금이 가장 먹기 좋은 시기라 생각되어 두 분께서도 이때를 놓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올렸습니다.”

실제로 당장 보름만 지나도 킹크랩은 살이 점점 빠지고 풍미가 떨어지게 된다. 지금이 딱 마지막으로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시기였다. 한국에서도 한겨울에 먹지 않았던가.

“이게 킹크랩이라고? 자네가 전매권을 딴 게?”

르누아가 물었다.

“네. 맞습니다.”

“주방장은 이것과.”

르누아가 집게살을 포크로 가리켰고 이어 버터와 치즈가 끼얹어진 다리살 부분도 가리켰다.

“이 부분의 맛이 다르다고 하던데.”

“예. 이 부분은 조금 더 살이 촉촉하고 단맛이 강합니다. 혹여 두 분께서 처음 드시는 게에 거부감을 느끼실까 양념을 조금 했으나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고 본연의 맛 그대로 쪄 낸 것도 풍미는 상당합니다.”

레이의 설명에 태자비가 포크에 찍힌 게살을 입에 넣고 먹은 뒤 말했다.

“오늘 연회 이후, 내가 양념 없는 것을 먹을 수 있겠는가.”

레이는 미소를 지었다.

“물론입니다.”

***

100트로이에 2,000파브.

무게에 따라 차등 금액을 받는다. 두세 명이서 먹는다면 4,000파브가 넘는 비싼 가격이다. 그럼에도 킹크랩은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지금이 가장 먹기 좋은 시기라는 말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문구에 불과했다. 태자 부부가 먹고 감탄해서 추가로 요청해 먹었다는 사실은 그 어떤 홍보보다도 강렬했다.

3인 가족 열흘 치 식비와 비슷한 금액이지만 귀족들이 사는 수도라는 장소 특성상 이 정도 금액은 사치도 아니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많지 않은지라 구매 경쟁이 치열했다. 그로 인해 뜻밖에 프리미엄 식품이라는 딱지가 붙어 형편이 좋지 않아도 귀족이라면 반드시 먹어야 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이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일 줄은 예상 못 했던 터라 레이는 당황스러웠다. 고용한 일꾼들이 몰려드는 일거리를 감당 못 해 추가 일꾼을 구하고 헬라에서 루이즈까지 오가는 열차를 임시로 증차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킹크랩 흥행에 오스카는 일꾼들을 추가 고용해 일정보다 더 빠르게 직행 열차 공사를 끝냈다. 개통식까지 미루고 킹크랩을 날랐기에 르아넬로 직통 열차는 예정보다 빨리 루이즈와 수도를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수도에서 킹크랩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직행인 르아넬로 열차를 타고 루이즈까지 가는 일도 생겼다. 이런 사람들 덕분에 루이즈와 헬라에도 슬슬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킹크랩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차선으로 꽃게를 택하며 게까지 덩달아 판매 상품으로 급부상했고, 이는 시장에 큰 변화를 만들었다.

게잡이 어부들이 생겨나고 관련한 임대 시설이나 판매처가 속속들이 생겨났다. 인기 폭발에 냉동 창고는 사용할 일도 없었다. 루이즈에서 킹크랩을 잡으면 바로 수도로 직행했기에 창고를 쓸 틈조차 없었다.

루이반에는 킹크랩을 구하는 편지들이 쉬지 않고 밀려들었고, 어떻게든 루이반 부부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몰려드는 초대장 처리와 부부 몰래 팔아 넘겨 달라는 어둠의 요청을 쳐 내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마님이 낸 초대박 상품에 윌포프와 테일러의 얼굴엔 웃음꽃이 가득했다. 못 먹은 사람들이 판을 치는 가운데 킹크랩을 먹어 봤다는 뿌듯한 경험이 그들의 얼굴을 피게 하는 데 한몫하고 있기도 했다.

가족계획에 대한 이야기는 수면 아래로 쑥 들어갔다. 그런 이야기를 할 정신이 못 될 정도로 연회 후 레이는 혼이 빠지게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는 겨울에 주로 판매를 하고 살이 별로 오르지 않는 여름 시즌에는 아예 포획도 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보다 거센 열풍에 이 열기를 이어 나가면 킹크랩 씨가 마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계절 하나를 비우는 전략임에도 그 누구도 걱정을 하진 않았다. 이 정도의 인기라면 다가오는 겨울에 별다른 홍보를 하지 않아도 그때까지 자연스레 사람들 입에 계속 오르내릴 것이다.

조만간 킹크랩 조업을 끝내더라도 이번에 못 먹은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재판매 시기만 노릴 테니 한 시즌 정도는 비워도 크게 상관이 없어 보였다.

“당분간 모임 자제, 집에서 칩거할 거예요.”

전매권을 가진 레이다. 누구와 만난다는 자체로도 말이 나올 게 뻔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레이는 헬라에 가 봐야 하잖아요. 괜찮겠어요?”

라 헬라 필경사 양성소도 개원을 했다. 그런데 상황이 이래서 문을 여는 날 가 보지도 못했다.

“몰래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라 헬라는 집정관이 워낙 일을 잘해 양성소가 레이 손을 탈 일은 거의 없었다.

집정관은 웬만한 일은 자기 선에서 해결을 했고, 관련해서 문의할 일이 생기면 샤메인에게 연락을 해 레이한테까지 연락이 닿을 것도 없이 일이 마무리되었다. 수업 방식이나 진행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이런저런 건의도 한다고 했다.

최근엔 샤메인에게서 별일 없다는 보고만 들어오는 걸로 보아 아마도 잘 굴러가고 있을 테지만, 그래도 명색이 양성소 소장인데 확인은 해야 했다.

요 며칠 쉬지도 못하고 바쁘게 움직인 레이의 얼굴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슬쩍 가서 양성소만 확인하고 바로 올게요.”

여타 해산물처럼 킹크랩도 새벽에 작업을 하기 때문에 레이도 그 시간에 맞춰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일을 시작했다. 게다가 중단된 제로석 광산 채굴 준비를 하느라 밤까지 깨어 있어야 했다. 대신전에서 제로석에 관한 연락이 오면 바로 상품을 캐내기 위해 미리 준비를 해 두는 것이었다.

하여 요 근래는 연례 정산을 마친 라미엘보다 레이가 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레이, 아무래도 같이…….”

“아직 절대 안 돼요. 라엘, 같이 가려면 지금 미모에서 1,000분의 1 정도 수준으로 내려야 돼요.”

지금보다 미모 수준이 좀 낮아지면 귀족 티도 좀 지워질 수 있으려나. 하여튼 아직은 라미엘이 등장할 때가 아니었다.

“맞다. 대신 라엘한테 좋은 걸 줄게요.”

레이가 손뼉까지 짝 치더니 책상 안쪽에 잠금 장치가 되어 있는 비밀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왔다.

“짜잔.”

“이게 뭔가요?”

레이가 내민 건 작은 주머니였다. 꽤나 묵직했고 받아 드니 짤랑, 하고 금속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라엘 근무 수당이요.”

예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냥 가볍게 지나가는 농담을 한 줄 알았는데, 정말 자신의 근무 시간을 계산에 넣고 급여까지 지불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매번 자신이 일을 할 때 레이가 어떤 종이에 사각이며 뭔가를 적는 것 같더니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짤랑이는 주머니를 손에 쥔 라미엘의 얼굴에 웃음이 퍼지더니 그가 이내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라미엘이 이렇게 오랫동안 크게 웃은 적이 있던가.’

레이는 놀라다가 라미엘의 웃음에 동화되어 같이 소리 내 웃어 버렸다.

집무실에 가득 찼던 웃음소리가 잦아든 후 레이가 말했다.

“거절하지 말고 받아요. 시간 얼마나 꼼꼼하게 계산했는데.”

라미엘은 작은 주머니를 보며 또 웃었다.

그의 인생 첫 월급이었다. 너무 귀하고 소중해서 절대 못 쓸 것 같은 그런 월급. 라미엘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다.

“고마워요, 레이.”

조금 시간이 흐른 뒤, 표정을 갈무리한 라미엘이 진심을 담아 인사를 전했다.

“천만에요.”

킹크랩이 예상 이상의 대박을 내고 있는 덕분에 라미엘에게 그간 책정된 급여를 더 빨리 줄 수 있게 되었다.

루이즈나 헬라의 일꾼들, 자신을 도운 베르니 사람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하는 것도 모자라 라미엘 같은 고급 인력에게도 두둑한 월급을 줄 수 있는 사장이 되었다니.

레이는 이 사실이 너무나도 뿌듯했다.

“비싸게 쳐 준다고 했죠? 테일러에게 꼭 이 사실을 알려 줘요. 그럼 다녀올게요.”

최대한 빨리 돌아와서 오늘만큼은 라미엘과 푹 쉬겠다고 다짐하며 집무실을 나서려는데, 레이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방을 나서려던 라미엘이 문이 열리지 않게 손으로 막으며 말했다.

“레이.”

“응? 왜요?”

“가기 전에 잠깐 나 좀 안아 주고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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