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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98화 (98/160)

98화. 오늘따라 유독

“나 좀 안아 주고 가요.”

세상이 미쳐 도는구나.

라미엘 차이제임스 아틸 루이반이 지금 나한테 안아 달라고 했어? 눈가가 빨갛게 물들어서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요.

진짜 라미엘 맞는가. 혹시 그거 아냐? 한국에서 들었던 손톱 먹은 쥐?

믿을 수 없어 하는 레이의 눈빛이 대차게 라미엘의 얼굴에 날아들었다. 그 눈빛에 라미엘은 다시 웃음이 나왔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참 자신이 할 법한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집무실을 나서는 레이의 뒷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안아 달라고.

본심이 머리를 거치지도 않고 입으로 바로 튀어나갔다.

그만큼 무언가 생각할 겨를도, 막아 낼 자제력도 없었다. 매번 레이가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처음으로 하나씩 선물할 때면 머리부터 온몸이 전부 요동을 쳤으니까.

“……잠깐. 잠깐 여기 있어 봐요. 아주 잠깐이면 돼.”

바로 답삭 품에 안아 줄 것 같던 레이가 오히려 라미엘을 혼자 집무실에 두고는 밖으로 나갔다.

“테일러!”

집무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레이는 급하게 테일러를 찾았다.

한시가 급했다. 그녀는 집무실 근처에서 대기하며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던 하인들에게 지시를 내리지도 않고 직접 발로 뛰어갔다.

근처 자신의 사무실에서 일을 하던 테일러는 마님의 다급한 호출 소리에 손을 멈추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테일러!”

“예, 마님. 무슨 일이십니까.”

“오늘 헬라 스케줄 취소야! 내일로 미뤄 줘!”

하인들이 안내를 하기도 전에 직접 사무실에 행차하신 마님은 한마디를 외치시고 그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바로 사무실을 나갔다.

여간해서 일정을 취소하기는커녕 변동도 않던 마님께서 갑작스레 변경을 외치시는 걸 보니.

“……공작께서 오늘 유독.”

미모에 물이 더 오르신 모양이다.

이 세상에서 마님을 흔들 수 있는 건 공작뿐이다. 그 반대 역시도 그렇고.

“아니, 오히려 반대가 더 심하지.”

공작 각하는 마님이 숨만 쉬어도 흔들리는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

테일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방금 전 마님께서 주신 퀘스트, 일정 변경에 대한 일부터 처리하기 위해 대기 중인 하인을 불렀다.

헬라로 가는 기차표 취소 명령을 받아 든 하인이 테일러의 사무실을 나섰다.

“라엘!”

다시 라미엘의 집무실로 돌아온 레이가 척척 뛰듯이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나 오늘 일정 취소예요.”

레이의 눈빛이 이글이글했다.

“가만 안 둬. 라엘 정말 가만 안 둘 거야.”

“취소해도 괜찮아요? 내일 대신전도 가 봐야 하잖아요. 거기 가면 시간 꽤 걸릴 거라면서…….”

“라엘, 지금 뭐 해요?”

라미엘의 말을 뚝 자르고 레이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뭐 하냐고요?”

“응. 라엘이 커튼 빨리 안 치고 뭐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 말과 동시에 레이가 라미엘의 셔츠를 양손으로 꽉 잡더니 찢을 것처럼 벌렸다.

투두둑.

“단추 하나하나 어느 세월에 다 열어, 그치?”

레이가 방긋 웃었다.

그와 동시에 라미엘이 집무실 창문의 커튼을 쳤다.

“레이, 정말 여기에서요?”

목에 닿는 라미엘의 숨이 뜨거웠다. 벌써 입술부터 들이밀면서 뭘 묻는 거람.

“다른 데로 갈 때까지 참을 자신은 있어요?”

라미엘이 레이의 드레스를 벗겨 내며 그 자리에 입술을 댔다. 맞닿은 곳에 변화가 뚜렷하게 느껴지는데 목소리만큼은 평온을 가장하는 라미엘이 앙큼하다.

“……없습니다.”

뭉개진 발음으로 라미엘이 가까스로 대답을 한다.

“으흠. 그것, 흣, 봐요.”

뜨거운 혀가 레이의 몸을 훑었다. 라미엘의 셔츠와 레이의 드레스가 바닥으로 동시에 툭 떨어지고 두 사람의 숨이 얽혔다.

“하아, 라, 으음, 라엘. 나 오늘 스케줄 취소한 거.”

레이가 살랑거리는 라미엘의 은발을 손으로 쥐었다. 손가락 사이를 부드럽게 스치는 감각은 다른 자극이 오자마자 하얗게 지워져 버린다.

“후회하지 않게 해 줘요.”

레이의 요청은 라미엘이 간신히 쥐고 있던 것을 놓게 만들었다.

투둑.

뭔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저 멀리서 작게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레이야말로.”

라미엘의 목소리는 지독하게 낮고, 습하고 야했다. 난폭한 짐승이 우는 것 같은 소리로 그가 말했다.

“지금 한 말, 후회하지 마요.”

***

라 헬라의 양성소 분위기는 아직 서로가 낯설고 어색함이 느껴졌다. 평소에 이웃 간 교류가 적은 탓에 아직 친분이 쌓이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을 배우겠다는 열정 하나만큼은 모두가 똑같았고 진지하게 수업에 임하고 있었다.

소포니악은 한 동네에 오랫동안 쭉 살던 이들이 학생이라 그런지 수업 분위기가 즐겁고 가볍게 통통 튀었다.

‘분위기가 반대인 것도 신기하네.’

레이는 두 군데 빈민가에서 모두 낭독회를 했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제 손으로 일궈 낸 소포니악 양성소 쪽에 조금 더 마음이 가긴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라 헬라 양성소는 샤메인과 집정관인 델마가 일을 너무 잘해 주기 때문에 신경 쓸 일이 없지만, 소포니악은 집정관이 자리에 있지도 않으니 레이가 알아서 관련된 전반의 일 모두를 처리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게 소포니악 양성소의 학생들과 계속 만나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 이 사람 또 없어.”

여전히 양성소로 가는 길은 엉망이고, 날이 많이 풀려 가는 탓에 녹아내린 눈이 건물 여기저기에서 머리 위로 뚝뚝 떨어졌다.

문제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게 녹은 눈뿐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눈 무게에 부서진 지붕의 잔해도 함께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뒤늦은 폭설로 피해가 발생하자 황실은 귀족들과 각 지역 파칸에게 긴급 시설 점검 명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루이반은 황실의 명령이 아니었어도 이미 공작령 시설을 점검하고 있긴 했지만 후에 내려온 명령으로 다시 한번 시설 확인 보고를 받았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소포니악의 꼴이 이렇다는 건 황명을 어겼다고 말해도 될 수준이다.

라 헬라 집정관은 황실 명령도 내려왔으니 더 꼼꼼하게 정비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헬라의 파칸이 집정관들에게 황실의 명령을 전했음에도 소포니악 집정관이 독단적으로 일을 안 한다는 이야기밖에 되질 않는다.

“여기 길이랑 다른 곳 빨리 수리 안 하면 사람들 다치겠는데. 소포니악 집정관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안전 조치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확인하려고 찾아왔건만 집정관은 이번에도 자리에 없었다.

“이럴 거면 집무실은 왜 둔 거지?”

레이의 말에 엘이 대답했다.

“여기서 오래 살았다고 하니 자기 집에 있는 건 아닐까요?”

토박이니 자기 집이 일하기 더 편할 수도 있다. 오랜 세월 지역 유지로 인근에서 유명하다면 집무실보다 그의 집을 찾아가는 게 사람들은 더 편할 수도 있으니 재택근무를 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툭하면 자리를 비울 수가 없는 노릇이다.

“혹시 집정관 집 아는 사람은 없어?”

물어보고 나니 레이를 비롯한 모두가 수도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자.”

***

소포니악 집정관, 대체 뭐 하는 놈이지.

“분신술이라도 하나? 아니면 몸이 열 개가 넘나?”

본의 아니게 소포니악 전 지역을 돌아다닌 것 같은데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집정관님 집은 여기예요.”

“집정관 집이요? 저기 저 하얀 건물인데, 왜 그러십니까?”

“소포니악 집정관? 아아, 필레. 필레네 집은 여기예요. 그 녀석 결혼하고 쭉 여기 살았어.”

“저기 저 빨간 지붕일걸요?”

집정관의 집이라는 게 열 채가 넘었다. 여기 토박이라더니 숨 쉬듯 이사만 하면서 살았나 싶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말하는 집은 전부 텅 비어 있어서 집정관은 만날 수 없었고 소포니악을 돌아다니며 라 헬라와 딴판인 광경만 수두룩하게 보게 되었다. 집정관 과잉 정보는 부록이었다.

얻은 것 하나 없이 소포니악 사람들의 불편, 불평과 불만만 듣고 시간은 시간대로 낭비했다.

‘소포니악에서 이렇게 시간을 많이 쓸 예정이 아니었는데.’

이제 한시 빨리 대신전에 가야 했다. 제로석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당장 가고 싶지만 그럴 순 없었다.

레이에게 전용 게이트가 있다는 사실은 루이반의 최측근들만 아는 사실이었다. 개인에게 대신관이 본인 권한으로 게이트를 줬다는 게 알려지면 좋은 소리가 나올 수 없는 일이기에 비밀이었다.

하여 급하지만 지금 당장 게이트를 열 수는 없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열어야 했기에 베르니로 가야 했다. 일단 양성소를 둘러본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해 뒀으니 행정 문제는 차후에 이야기할 일이었다.

베르니에 도착하자마자 레이가 바로 게이트를 열었다. 대신전에 가기로 약속했던 시간보다 늦은 시간이었다.

“샤메인 님께 말씀 올려 두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마님.”

“응, 루이반에서 봐!”

소포니악 집정관의 거처 찾기를 맡겨 두고 레이는 대신전으로 향했다.

“어머? 어디 계시지?”

헤덴의 집무실도 조용했다. 혹시 나 모르게 집무실 비우는 게 유행이라도 됐던 걸까.

“흣, 레이.”

당분간 집무실에서 일 못 할 것 같다고 생각한 어제 일이 떠올라 버렸다.

‘정말 여러 의미로 죽는 줄 알았는데.’

라미엘 품에서 내내 울고 소리 치고 매달리던 순간들이 주르륵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라미엘이 중간에 비싼 마법 회복약을 먹일 때부터 각오하던 일이긴 했다. 다 끝나서도 아니고 중간에 먹이다니.

그러길 잘했지만.

“이거, 뭐야…….”

박하사탕처럼 화하고 시원한 무언가가 라미엘의 손가락에서 레이의 입 속으로 굴러들어 왔다. 라미엘의 검지를 살짝 깨물며 묻자 그가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이걸 먹어 둬야 내일 레이가 일을 할 수 있을 거예요.”

후에 레이의 수발을 드는 라미엘의 등엔 그녀가 새긴 흔적들이 가득했다. 지금도 공작 각하 셔츠 안엔 마님이 발버둥친 흔적들이 고스란히 살아 있을 것이다.

“틈이 생기니 비집고 나오는구나.”

덕분에 이렇게 힘내서 일을 하고 있지만 본의 아니게 떠오른 루이반 집무실 생각에 온몸에 열이 확 올랐다. 레이가 뺨을 찰싹 쳤다.

음란 마귀야, 물러가라!

“헤덴 예하! 예하, 여기 안 계세요?”

“……오셨습니까.”

“으엇, 깜짝이야!”

집무실 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며 토마가 나타났다.

그는 레이를 반기며 웃고 있었다. 헤덴의 등쌀에 항상 퀭해 있던 사람이 맑은 표정을 짓고 있으니 조금 어색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예, 공작 부인. 오랜만입니다. 어서 4연구부로 가시죠.”

토마는 단박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예하께선 안 계시나요?”

“지금 4연구부에 가 계십니다. 어서 가시죠.”

토마가 조금 빠른 걸음으로 레이를 연구부 쪽으로 안내했다. 그의 뒤를 따라 레이도 바지런히 다리를 움직였다.

“예하께서 저한테 알려 주실 게 있다고 하셨는데…….”

“네, 맞습니다. 공작 부인. 그 마력석 말씀입니다만 매장된 양이 많습니까?”

“무슨 일…….”

그때 레이의 말을 뚝 자르며 헤덴의 목소리가 들렸다.

“왔니, 아가 조련사야.”

4연구부를 막 나오던 헤덴이 레이를 불렀다. 그리고 그 뒤로 연구부 신관이 바로 따라 나왔다.

“공작 부인! 제발, 저희랑 협약을 맺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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