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99화 (99/160)

99화. 거상 레이알렉시스

“공작 부인! 제발, 저희랑 협약을 맺어 주세요!”

갑작스러운 연구부 신관의 부탁에 레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시설은 수도보다 사방이 물인 베롬이 좋습니다. 운송비를 제해도 이쪽이 더 나아요.”

협약을 해? 시설? 운송비?

“저, 죄송하지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레이의 영문 모를 얼굴에 헤덴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말 안 했나?”

토마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사라지고 속병이 도진 것 같은 표정이 드러났다. 그의 미소는 헤덴이 있는 한 몹시도 귀하겠구나 싶어졌다.

“예하, 이걸 말씀드리려고 공작 부인을 부르셨습니다.”

레이가 갸우뚱하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시기에.”

“공작 부인, 대발견입니다! 매장량 얼마나 되죠? 눈으로 직접 보고 싶습니다.”

“뭐가 또 있는 거예요?”

“고대 마력석은 아주 귀하고 특이한 성질을 지녔습니다.”

번개로 마력이 차는 것도 이미 귀하고 특이한 성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관의 말은 그게 전부가 아니란 뉘앙스였다.

“제로석에 번개로 계속 에너지를 채울 수 있다는 것보다 더한 게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제로석이요?”

“언제까지고 계속 고대 마력석이라고 부를 수 없으니, 이름을 지었어요. ‘제로’는 아무 것도 없는, 영을 뜻하는 말이래요.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굉장한 게 될 수 있는 자원이라 그렇게 명명했답니다.”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지금 설명하려던 것과 딱 맞습니다.”

들뜬 신관과 달리 차분한 헤덴이 말했다.

“이 마력석은, 아니지, 제로석이라고? 제로석은 성질을 바꾸는 면에서 마력석과 다른 점이 있더구나.”

“어떻게요?”

기존의 마력석은 마력이 있는 자가 마력을 써서 성질을 바꿨다.

보통의 붉은 마력석은 기본적으로 불과 빛의 성질이 있어 석유나 석탄처럼 광물 연료로 쓰인다. 여기서 약간의 마력을 가해 가공을 하면 일상에서 쓸 수 있었다. 실내 온도를 따뜻하게 하거나 무언가를 태울 때 쓰거나, 빛의 성질을 이용해 조명으로 사용하는 등.

그다음으로 대중적인 가공 마력석은 푸른 마력석으로, 차가운 물의 성질을 가졌다. 이건 주로 레이의 냉동 창고에 쓰는 것처럼 생물을 얼려 보관하거나 식재료들을 보존하는 데 쓰였다. 이세계의 에어컨처럼 여름에 시원한 온도를 유지하는 데에도 쓰였다.

주된 쓰임이 붉은색과 푸른색의 마력석인 셈이었다.

“마력 없이도 성질을 바꿀 수 있어. 마력 없이 속이 채워지는 것처럼.”

헤덴의 말에 연구 신관이 바로 해석을 달았다.

“부인께서도 아시다시피 마력석은 가공해서 붉은색, 푸른색 이 두 가지 종류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로석은 마력으로 가공하는 방법 외에 마력을 사용 않고도 가능합니다.”

“마법사의 마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가공을 할 수 있다고요? 저 이해가 잘…….”

“제로석은 어떠한 에너지에도 충전이 되며, 심지어 가득 찬 제로석을 낙차가 있는 물에 두면 푸른 가공 제로석, 불에 태우면 붉은 빛을 띠는 가공 제로석이 됩니다.”

신관의 말에 레이는 저 멀리, 하늘 어딘가에서 돈 다발이 우수수 떨어지는 배경 음악이 들리는 것 같았다.

예전에 마력이 넘치던 시절에는 마력으로 빈 마력석을 채웠지만 이후 마력이 점차 사라지면서 고대 마력석은 자연물에서 생기는 거대 에너지를 끌어들이게 되었다.

짧은 시간에 에너지를 채우는 자연물은 번개가 유일했기에 벼락을 동반했지만, ‘에너지’로 충전이 가능하다면 수력이나 화력 등을 이용해 얼마든지 제로석을 재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었다.

다 쓴 제로석을 수력이나 화력으로 다시 녹색 빛 가득하게 채우고 그걸 다시 수력이 발생하는 곳에 넣으면 푸른색 가공 제로석이 된다. 붉은 성질로 가공을 하려면 제로석을 불에 태우면 되는 것이고.

벼락을 이용하는 것에 비해 에너지를 채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수력과 화력으로도 빈 제로석을 다시 채울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제로석은 에너지가 차 있으면 벼락을 부르지 않는다. 그러니 색이 희미해질 즈음, 벼락을 부르기 전에 시설로 회수해서 에너지를 다시 채우면 된다.

신관은 이러한 제로석의 에너지를 다시 채우고 가공할 시설을 베롬에 짓자는 협약을 제안한 것이다. 이게 연구 신관들과 토마가 해맑게 웃고 있는 이유였다.

장삿속 없는 헤덴은 제로석 연구에만 관심이 있고 그걸로 뭘 어찌해 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게 막대한 돈이 된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관련 연구 신관들과 토마는 철저히 헤덴을 배제한 채 공작 부인을 만나고자 했다.

그런데 예상보다 공작 부인이 늦게 도착을 해서 하필 딱 헤덴과 마주친 상황이었다.

“예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리 무겔 잡느냐.”

“여기서 말씀드리긴 곤란하고 집무실로 가시는 게…….”

헤덴이나 돈 버는 데 생각이 없지 항상 연구비 부족에 시달리는 신관들은 지금 시설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하여 토마의 숭고한 희생으로 헤덴은 자릴 비웠고 연구실 응접실엔 레이의 제로석을 핵심으로 연구했던 신관과 그 휘하의 신관 두 명, 대신전 곳간지기가 앉아 있는 중이었다.

아주 몹시 간절한 눈을 하고서.

***

곤히 자고 있는 레이 위로 햇빛이 들이쳤다. 라미엘은 손으로 그녀의 얼굴에 쏟아지는 빛을 가리고 살짝 벌어진 커튼을 꼼꼼하게 닫았다.

요즘 레이는 라미엘보다 더 바빠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중이었다.

최근 제로석 광산을 본격적으로 정비하기 시작했고, 근처 너른 땅에 제로석 에너지를 채울 시설을 짓는 공사 계약을 마쳤다.

제로석은 수력과 화력으로도 에너지를 채울 수 있었지만 벼락을 이용하는 것에 비해서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래서 번개를 이용해 에너지를 채우는 전용 시설을 따로 하나 짓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하여 베롬에는 벼락을 관리하고 에너지를 채울 시설, 가공을 위한 수력과 화력 시설 세 개가 설치될 예정이었다.

제로석은 보통의 물줄기나 열기로는 변화하지 않았다. 폭포수 같은 엄청난 낙차의 거대 물줄기에 꼬박 엿새를 놓아두어야 했고, 수천 도의 화력으로 나흘에서 닷새는 돌려야 성질이 바뀌었다.

그래서 인공적으로 거대 폭포를 만드는 시설과 끊임없이 내뿜는 과한 열기에도 꿈쩍 않는 시설, 벼락이 특정 부분만 건드릴 수 있게 하는 시설 세 종류를 베롬에 짓고, 레이는 이 중 마지막에 말한 벼락 시설을 제로석 광산 근처의 땅에도 짓기로 했다.

가공 시설은 건설하는 데 몇 년이 걸리지만 충전 시설은 비교적 간단한 원리로 작용해서 시설 설계 후 열흘 만에 바로 시공에 착수할 수 있었다.

마력을 이용하는 것에 비하면 긴 시간이지만 마력은 한 번에 한두 개씩 순차적으로 가공을 하기에 맡기고 찾아오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대신 제로석은 다량으로 한 번에 가공이 가능해 결과적으로 소요 시간이 그리 길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레이는 이렇게 베롬의 대신전과 제로석 에너지 시설 제휴를 하고, 양성소 수업을 늘렸으며 때때로 소포니악을 찾아가 도시를 둘러보고 다녔다. 그 와중에 킹크랩 관리도 해야 했다.

그런 레이에게 간만에 겨우 찾아온 휴식 시간이었다.

“이것만, 이것만 확인하면 난 자유야.”

발간 눈으로 중얼중얼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하던 레이는 관리자 서류에 최종 확인 사인을 마치자마자 책상 위로 엎드렸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머리가 닿자마자 잠이 들 정도로 피곤했으면 일을 넘겨 버릴 만도 한데 우는소리를 하면서도 열심히 매달렸다.

라미엘이 도우려 했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자기 힘으로 해 보고 싶다고 해서 섣불리 돕지도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레이의 일에 있어 라미엘은 철저히 업무 보조자의 입장이었다. 적극적으로 돕고 싶어도 명령이 없으면 얌전히 기다려야 했다.

“라에엘. 힘들어어.”

레이는 피곤할 때면 라미엘을 찾아 그의 품 안에서 쉬곤 했다. 바쁜 일정 속, 부부가 잠시 안정을 찾는 시간이었다.

레이는 안아서 침대로 옮겨도 미동조차 없었다. 그야말로 기절한 것처럼 쌕쌕 잠이 들었다.

전날 저녁도 안 먹고 그대로 잠든 레이는 다음 날 점심때인 지금까지도 취침 중이었다.

“식사까지 거르고.”

먹는 걸 좋아하는 레이는 한입에 먹을 수 있는 간식을 두고 먹으며 업무를 보곤 했는데 요새는 그럴 시간조차도 없어 물만 마시며 일을 했다.

‘간식도 안 먹고 끼니까지 두 번 걸렀으니 체력이 더 떨어질 텐데.’

곤히 자는 걸 보면 깨우고 싶진 않지만 레이의 체력을 생각하면 깨워서 뭘 먹여야 할 듯싶었다.

잠시 고민하던 라미엘은 살며시 레이를 깨웠다.

“레이, 일어나요.”

몇 번을 불러도 고요하던 레이의 눈이 한참 만에 느릿하게 뜨였다.

끔뻑끔뻑.

오늘 아침의 맑은 하늘처럼 청명한 눈동자에 조금씩 빛이 들어왔다.

“……아침이야?”

레이가 저를 흔들어 깨우던 라미엘의 손을 꼭 쥐고 다른 한 손으로 눈을 비비며 물었다.

“점심 지나고 있어요.”

“점심이라고요?”

몸을 천천히 일으킨 레이가 양팔을 벌리자 라미엘이 자연스레 제 품에 레이를 꼭 안는다.

“어쩐지 배고프더라. 라엘, 식사는 했어요?”

“아직이에요. 레이와 같이 먹으려고요.”

눈뜨자마자 귀여운 말을 듣자니 절로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잠깐, 점심? 애들 산책!”

“아침 산책 다 했어요.”

마님이 바쁘다는 소식에 모두가 1순위로 생각한 건 마님의 반려동물들이었다.

푸엥 전담 하인들의 연봉이 쭉 오른 뒤, 루이반 내 하인들은 가까이 있는 출셋길이 무엇인지 똑똑히 깨달았다. 루이반에서 검은 개는 더 이상 불길한 존재가 아니었다.

저마다 푸엥과 푸둥, 이른바 ‘푸들’을 돌보기 위해 애를 썼는데, 그 덕에 푸엥은 쉴 새 없이 여러 사람과 다양한 방법으로 노느라 자기 집에 돌아오면 꿀잠행이었다.

푸둥은 이제 곧잘 자기 스스로 게이트를 여닫게 되어서 레이가 많이 바쁘거나 심심할 때면 혼자 워크산에 다녀오곤 했다.

물론 푸둥의 게이트 사용 역시도 밖에 널리 알려진 사실은 아니었다. 영리한 울프 드래곤은 다른 이의 시선 없이 혼자 있을 때나 루이반 부부 앞에서만 게이트를 사용했다.

“이러다 레이 쓰러지겠다고 모두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마님이 킹크랩 말고도 광산 사업과 필경사 양성소까지 운영하기 시작했다는 말에 다들 경악을 했다. 뭔가 바쁘신 건 알고 있었지만 광산같이 큰 사업을 들고 오실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다들 걱정 안 하게 잘 먹어야겠네. 얼른 씻고 식당으로 갈게요.”

레이가 라미엘 품에서 벗어나 이불을 걷었다. 휴일의 시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