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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00화 (100/160)

100화. 소포니악 집정관 (1)

“어머나.”

눈이 녹은 가지에 녹색 빛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길가에 눈이 아직 남아 있어도 봄은 소리도 없이 조용히 다가오고 있다. 서늘한 바람 사이로 이따금 느껴지는, 조금은 훈훈한 기운이 레이의 볼을 스쳤다.

“라엘, 이거 봐요. 봄이 오려나 보다.”

줄 없이 푸엥, 푸둥 두 마리와 산책을 나온 레이는 나뭇가지를 가리키며 방긋 웃었다.

부부는 푸엥 전용 공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음? 그런데 여기 이런 나무가 있었던가?”

너무 오랜만에 저택 정원을 나와서 그런가. 이곳에 이런 나무가 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루이반 저택을 감싸는 정원은 워낙 크고 방대해 여기저기 이런저런 나무들이 많았다. 그래서 원래 있던 걸 착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평소와 달리 어색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꽃나무를 몇 그루 더 심었어요.”

라미엘의 말에 레이가 활짝 웃었다.

“달라진 게 맞았네요. 와. 꽃나무? 너무 기대된다. 봄에 꽃이 피면 이 나무 아래에서 티파티라도 열어 볼까 봐요.”

레이는 아직 공식적으로 루이반 공작 부인의 이름으로 파티나 사교 행사를 연 적이 없었다. 사냥제 이후 요청이 꽤나 있었으니 명단을 잘 추려 두었다가 봄에 활동을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레이가 워낙 다망해서 시간이 있을까요.”

“이제 바쁠 일 없어요. 앞으로 관리만 틈틈이 잘 하면 돼.”

“당신 이틀 뒤에 황실에 가야 하는데도?”

“아이, 그것만 빼면 이제 별일 없어요.”

대신전을 통해 새로운 광물의 출현과 연구 진행 상황이 황실과 공유 되었다.

제로석은 새로이 발견된 품목이기에 황실에 보고를 올려 앞으로 판매를 할 것이라는 최종 승인을 받아야 했다.

레이가 만약 대신전을 통하지 않고 제로석을 발견했다면 전매권을 신청하거나 황실에 사전 허가를 받았어야 한다. 하지만 제로석은 레이의 의뢰로 대신전이 먼저 발견했고 이후 그를 주도적으로 연구하고 나섰기 때문에 황실이 손을 댈 수는 없었다.

리담 땅에 있는 모든 자원은 황실의 소유라는 법이 있지만 대신전이 연구를 위해서 나선 상황이라면 예외가 인정되었다. 대신전과 그 산하의 연구를 존중한다는 의미였다.

만약 제로석 같은 엄청난 상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관련 시설을 황실에서 선점했을 것이다.

황실은 대신전에서 공유해 준 정보를 받고 레이에게 판매에 관한 최종 승인을 직접 받으러 오라고 연락을 한 상태였다. 이 최종 승인을 받으면 세상에 제로석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앞으로 별일이 없을 거라고 하지만 제로석의 성질을 생각해 보면 절대 레이가 조용히 있을 수 없을 터였다.

“더 바빠질 텐데요. 지난번 테일러 반응 못 봤습니까. 세상이 모두 레이에게 닿길 바랄 겁니다. 킹크랩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제로석이라는 신종 마력석의 소유자가 레이란 소식에 테일러는 몇 번이나 탄성을 질렀다. 윌포프조차 마님, 마님, 하며 레이의 양손을 차마 붙잡지는 못하고 제 주먹을 꼭 쥐며 어디서 이런 복덩이가 굴러왔나, 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라미엘이 이것은 오로지 레이의 사업이고 그녀의 권한이라고 했지만 주인이 누군지 여부는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었다. 누구의 소유이고, 권리이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루이반 부부의 관리하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점이었다.

“아무래도 킹크랩보단 더하겠죠? 흠, 당분간 또 못 나가겠네.”

지금도 여전히 킹크랩의 인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다만 처음보다는 조금 기세가 누그러들었다. 광풍에서 열풍 정도가 되었다고 할까. 웬만한 귀족들이 적어도 한 입쯤은 맛이라도 봤기 때문이었다.

“어우, 그럼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 라엘, 우리 나가요.”

루이반 저택이 워낙 크고 있을 게 다 있어서 나갈 일은 잘 없지만 막상 못 한다고 하니 하고 싶어지는 청개구리 심보가 작동했다.

“지금?”

“응. 지금요. 라엘 오늘 시간 있다면서요.”

“레이, 어딜 가고 싶어요?”

“그건 모르겠어요. 그런데 앞으로 또 며칠은 밖에 못 나간다고 생각하니 지금 나가야 할 것 같아. 라비던 역에라도 갈까요?”

세 개의 열차 회사는 철로를 공용으로 같이 쓰고 관리해도, 역사를 각 회사별로 따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각 역으로 가는 짧은 길목의 철로는 각자의 사비로 운영을 한다.

헬라에 르아넬로 역 말고 텔덱과 위먼의 역이 각각 존재하는 것처럼 열차가 드나드는 도시 구심점엔 세 개 역사가 있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그러나 수도인 라비던은 타 도시와 달리 세 개 회사 합작의 커다란 역 하나만 존재했다.

앞으로 계속 열차들은 수도와 연을 이으려 할 것이고, 어쩌면 새로운 열차 회사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래서 역을 계속 짓느라 토지가 낭비될 수 있다고 판단한 황실이 통합 역사를 지으라고 명했다.

수도의 비싼 땅값을 생각해 보면 세 개 회사에도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니기에 라비던의 유일한 역은 세 회사의 힘으로 빠르게 완공되었다.

3사가 모여 있기에 역 건물은 엄청나게 컸고 르아넬로의 헬라 역처럼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오락, 쇼핑 등 즐길 거리가 가득해 관광 명소처럼 사람들이 즐기는 곳이었다.

“난 괜찮지만 레이가 피곤하지 않겠어요?”

“내일도 쉴 수 있는걸요. 오늘 밖에서 놀고 내일 침대 밖으로 안 나갈래요.”

급히 부부 외출이 결정되었다.

여느 제국민처럼 역사에서 평범한 데이트를 즐길 예정이니 옷도 최대한 평범하게 입었고 마차도 루이반 문장이 없는 것으로 준비해 나왔다.

역 근처는 눈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다. 이용객의 편의를 위해 눈이 쌓이기도 전에 재빠르게 치웠고, 유동인구가 워낙 많다 보니 헬라의 길처럼 눈이 쌓일 틈도 없이 흩날렸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역은 놀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결혼 이후 열차를 탈 때나 라비던 역에 왔고, 와서도 바로 승강장으로 갔기에 역 자체를 즐겨 본 적은 없었다. 실로 오랜만에 놀러온 것이었다.

“피터가 해 준 게 제일 맛있긴 하다. 이건 좀 별로네.”

레이가 한 입 남은 핫도그를 입으로 밀어 넣었다.

“두 개 먹고 그런 말하면 별로 믿음이 안 갑니다, 레이.”

라미엘이 레이의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손으로 톡톡 털어 내며 말했다.

두 사람은 귀족들이 으레 머무는 특별 전용 공간으로 가지 않고 사람들 속에 뒤섞여 평범한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귀족들 사이에 섞이면 보나 마나 킹크랩 이야기가 나올 게 너무 뻔해서 자리를 피한 것이었다.

특별 공간은 아니어도 부부에게 꽂히는 시선들이 엄청났지만 접근하는 사람은 없으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나만 먹으면 부족해서 맛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니까요.”

레이의 엉뚱한 소리에 라미엘이 피식 웃음을 터트린 때였다.

“어? 저 사람…….”

레이가 미간을 찌푸리고 어딘가를 뚫어지게 응시하기 시작했다.

“레이, 무슨 일이에요?”

“저기 보이는 저 대머리 분명 소포니악 집정관인데.”

소포니악을 샅샅이 뒤져도 감감무소식이던 남자가 수도에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의아했다.

“왜 여기 있지?”

“볼일이 있어서 잠시 수도로 온 게 아닐까요?”

“아뇨, 잠시 왔을 리 없어요. 소포니악을 얼마나 뒤졌는데. 지금도 샤메인이 찾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연락이 아직도 없으니…….”

잡자. 일단 잡아서 그간의 행적을 족쳐 보자.

“라엘, 잠깐 여기 있어요.”

“레이?”

라미엘이 뭐라 말을 할 틈도 없이 레이가 빠르게 집정관을 향해 달려갔다. 공작 부인이 공작을 역에 세워 두고 맹렬히 달려 나가자 그림자처럼 숨어 있던 수호 기사 둘도 급히 마님의 뒤를 쫓았다.

“거기! 잠시만!”

느릿한 걸음으로 승강장으로 향하던 필레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한 여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흐익? 히에에엑!”

그러더니 괴상한 소리를 내며 허둥지둥 역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뭐야? 왜 저러지?”

레이는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는 집정관의 뒷모습을 보며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저렇게 새파랗게 질려서 도망갈 일인가.

레이는 행정 부재와 황명에 따른 정비를 하지 않은 일로 집정관을 만날 것이라 단 한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다. 외부로 드러난 행동은 집정관의 집을 찾는 것뿐이었는데, 고작 자기 집을 알아내려는 사람을 이렇게 피한다?

찝찝한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다. 자기가 생각해도 좀 찔리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아서 저러는 걸로밖에 보이질 않는다.

“저 사람 잡아.”

레이의 한마디에 수호 기사 하나가 번개 같은 속도로 달려 나갔다. 뚱뚱한 남자는 허둥지둥 달리는 것에 비해 느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기사에게 뒷덜미를 잡혔다.

“누, 누구야! 이런 건방진!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이런 짓을 해!”

“소포니악 집정관이요.”

발악하듯 발버둥 치는 필레를 보며 레이는 기사 대신 대답을 했다.

제 손에 목덜미를 잡힌 남자가 집정관이라는 말에 기사가 살짝 당황한 눈빛을 했다. 마님의 명령에 좀도둑이나 소매치기인 줄 알고 막 잡았는데 집정관이라니. 그런 줄 알았다면 길만 막아 세웠을 것이다.

“아, 아아. 그, 어, 안녕하십니까.”

집정관이 목덜미를 잡힌 채, 어벙한 얼굴로 레이에게 인사를 했다. 레이의 눈신호에 기사가 잡고 있던 목덜미를 놓았다.

“실례했어요.”

레이가 기사 대신 사과를 하자 필레가 눈에 띌 정도로 크게 움찔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 아닙, 아닙니다……. 그, 고, 공작 부인.”

저 멀리 보이는 여자가 양성소 건으로 자신을 찾아오던 ‘그 사람’이란 걸 눈치채자마자 소포니악 집정관인 필레는 빠르게 몸을 피했다.

양성소 소장이 루이반 공작 부인이었을 줄이야!

대체 수도 귀족이 왜 소포니악까지 와서 설치고 돌아다니는 건지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황실과 접촉도 가능한 대단한 가문이라는 점에서 뜨끔 대잔치였다.

필레는 자신의 집을 수소문하는 사람이 있다기에 별놈이 다 있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 그러고는 귀족이라면 당연히 먹어야 하는, 입에서 살살 녹는다는 소문의 킹크랩을 먹기 위해 루이반에 접촉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지난번 사무실에 찾아온 여자가 루이반 공작 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루이반이신데.”

필레의 말에 레이는 새삼 루이반의 위력을 실감하면서 동시에 양성소가 안정기에 접어들 때까지 헬라에 절대 라미엘을 내놓지 말아야겠다고 다시금 굳건히 다짐했다.

“여기서 뭐 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죠?”

“예? 아, 예에. 수도에는 볼일이 좀 있어서……. 그런데 왜 물으시는 겁니까.”

“대체 며칠짜리 볼일이셨기에? 내내 소포니악에 없던데요.”

레이의 추궁에 필레는 식은땀을 훔쳐 내다 문득 내가 왜 여기서 이런 소릴 듣고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 상관 없잖아.’

외부인이고 자신의 소포니악 업무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비록 황실과 접촉을 할 가능성이 높은 대단한 가문이라고는 하나 그 건으로 자신을 찾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처럼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저기, 공작 부인. 그런데 대체 여기서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제가 뭘 어쨌다고…….”

필레의 말을 들은 레이는 그가 지금 공작 부인이라는 지위가 거북해서 이러는 건지 켕기는 게 있어 이러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집정관을 보자마자 일단 그가 자리를 비운 기간의 행정 공백을 따져 물으려 했는데, 잘 생각해 보니 이게 맞는 일인가 애매해졌다.

자신은 소포니악 사람이 아니고 특별 예산을 배분한 황실도 아니었다. 어설프게 소포니악에 발을 슬쩍 걸치고 있는 외부인인데 나서서 따져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발목을 잡는다.

레이가 멈칫하는 기색이 느껴지자 필레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그걸 빠르게 잡아냈다.

“아, 이런. 기차 시간이! 공작 부인, 죄송합니다만 저는 이만 소포니악으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에 오시면 극진히 대접할 터이니 그때 뵙겠습니다.”

깍듯하게, 어찌 보면 비굴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필레가 굽실거리며 레이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던 라미엘은 남자가 사라지자마자 레이 곁으로 왔다.

“무슨 일인지 이제 말해 줄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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