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소포니악 집정관 (2)
“무슨 일인지 이제 말해 줄 수 있습니까.”
라미엘이 내민 손을 잡으며 레이가 대답했다.
“음, 집정관으로서의 행정력이 의심되는 저 남자를 조지려고 했는데. 내가 그래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나서 멈췄어요.”
레이는 그간의 상황을 상세하게 라미엘에게 이야기했다. 정비되지 않은 도시와 황실 명령 미수행 정황과 며칠째 소포니악에 없던 집정관까지.
“내가 루이반 가주가 됐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뭔 줄 압니까.”
레이의 이야기를 다 들은 라미엘이 천천히 말했다.
“루이반 밖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습니다.”
전대 루이반 후작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만 해 줄 사람들을 만났고 내부 사람의 말만 들었다.
루이반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의 말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건 맞지만 모든 것에 다 정답일 순 없었다.
루이반 후작은 외부에서 들리는 소문이나 조언은 무시했고, 본인 심기에 언짢게 느껴지거나 그가 듣기에 허튼소리가 나오면 루이반의 이름으로 상대를 공격하기도 했다. 두세 개 상단이 망해 없어져도 워낙 거대한 가문이기에 크게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수 하나만 믿고 외교를 개판으로 하다가는 그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무너지게 마련이다. 외부에서 들리는 소문이나 교류 관계를 무시해선 안 됐다. 내부 일을 잘해도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닌 이상 외부의 연결은 반드시 필요했다.
루이반 후작은 바깥 평판이 꽝인 사람이었고, 그 평판은 그대로 루이반 가문의 명성에도 조금씩 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아마 라미엘이 바로 고쳐 잡지 않았다면 지금쯤 벌써 상단 십여 개는 공중분해 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지금 레이의 상황과는 조금 다른 영역이지만 외부에서 들리는 객관적인 이야기가 필요한 순간이라는 공통점이 있기에 라미엘은 루이반 후작의 이야기를 꺼내 든 것이었다.
집정관은 여론이 무척이나 중요한 자리다. 그런데 외부인이 봐도 무언가가 잘못 돌아간다는 것이 보일 정도인 상황이라면 조금만 사실을 지적해도 잘 몰랐던 내부 사람들도 그 사실을 인지할 것이다.
그것은 곧 여론이 될 것이고, 외부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멋대로 일하는 집정관이라면 차기 집권은 물 건너가게 된다. 그러니 여론이 무서워서라도 무언가 조치를 취할 것이다.
“어떨 때는 제삼자의 평가가 더 정확할 수 있어요. 내부에서 모르던 사실을 외부의 사람이 짚어 준다면 소포니악 사람들도 분명 문제를 알아차릴 겁니다.”
라미엘의 말을 들으니 레이는 조금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문제는 자신이 수도 귀족이라는 점이었다. 어쩌면 소포니악 사람들이 일 안 하는 집정관보다 더 거북해할 상대다.
“그런데 라엘, 내가…….”
집정관이 레이가 루이반 공작 부인이라고 떠들고 다닐 텐데 그건 어쩌나.
“지금 같은 경우, 레이는 아주 외부인이라고도 할 수 없잖아요. 소포니악 양성소 소장인데.”
“아뇨, 그게 아니라 이제 필레가, 아, 필레는 그 집정관이에요. 결혼 세 번 한 대머리.”
집정관의 집을 찾다가 듣게 된 그의 과잉 정보 중 하나였다. 저딴 뚱뚱한 대머리가 결혼을 세 번이나 했다는 게 너무 놀라워서, 수많은 사실 중 그것 하나만 기억에 남았다가 지금 불현듯 불쑥 튀어나왔다.
“그 사람이 내 정체를 소포니악에 다 말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내가 귀족이라…….”
“그럴 일 없을걸요.”
아까 필레의 행동을 보고 확신하건대 그는 절대 자기 입으로 레이가 루이반 공작 부인이란 걸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지금 레이의 신분 때문에 겁을 먹은 상태다. 고위 귀족이 자신을 찾는다는 사실 하나로 겁을 먹는 걸 보면 본인의 과오를 알고는 있는 모양인데, 그런 사람의 다음 행동은 뻔했다.
레이의 신분을 절대 주변에 퍼뜨리지 않고 조용히, 은밀하게 그녀를 자기편으로 포섭하려 들 것이다.
“라엘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비슷한 사람을 많이 만나 봤습니다. 그리고 그가 설령 당신의 정체를 발설한다 하면 또 어떻습니까. 레이는 변하지 않을 거고 예전과 똑같이 사람들을 대할 거잖아요.”
“그들이 날 다르게 볼 텐데요.”
별것도 아닌 걸 걱정하는 공작 부인을 보니 마냥 귀여웠다.
라미엘은 테일러에게 루이즈 새벽시장의 일을 상세히 보고받았었다.
“제가 귀하신 분을 잘 몰라뵈었습니다.”
덧붙여 테일러의 속마음까지도.
귀족 신분을 드러내 놓고도 시장 상인들에 녹아들던 레이다. 그런 그녀가 고작 정체 하나 밝혀졌다고 외면받을 리 없다고 라미엘은 강하게 확신했다.
“그것까지 레이가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그건 그 사람의 그릇이 거기까지란 얘기니까요.”
라미엘과 역사를 천천히 걸으며 시작한 이야기는 마차 앞에 도착해서 끝이 났다.
“뭐든 해요. 들이받아요.”
그리고 레이가 제대로 맞부딪칠 수 있게 그녀의 세계를 조금 더 튼튼하게 확장하려면 자신의 법안 역시도 함께 달려갈 준비가 되어야 했다.
여성 작위는 레이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펼치고, 세상의 편견과 싸우기 위한 시초가 될 것이다.
“레이, 당신은 루이반입니다. 뭘 해도 다 수습 가능해요.”
레이가 원한다면 우호적인 여론을 만드는 것까지도 해낼 수 있다. 그녀가 바라는 일은 아니겠지만.
“하고 싶은 건 다 해 봐요.”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하는 얼굴로 라미엘이 레이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불안함이 일말의 티끌도 남기지 않고 모두 가셨다. 불안이 가신 빈자리에는 눈앞의 남자에 대한 마음이 찬다.
“라엘, 빨리 마차에 좀 타 봐요.”
요 앙큼한 남자 같으니. 마차에 타 봐. 상으로 진하게 이런 것 저런 것…….
“안녕하세요, 공작 부인.”
레이의 엉큼한 계획에 제동을 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하필 지금 날 부르는 것이냐.
“케이틀린 영애?”
“공작 각하께서도 안녕하신지요.”
케이틀린의 인사에 라미엘이 눈인사로 답했다.
“지나가는 길에 두 분 계시는 걸 보고서 인사라도 하려고 찾아뵈었습니다.”
그냥 지나쳐도 됐을 것을 천사답게 직접 찾아와 인사까지 하고 있다. 마그스너 가문이라면 킹크랩은 진즉 먹었을 테니, 이건 순수하게 만나서 반갑다는 인사일 것이다.
“영애, 그동안 잘 지냈어요?”
그때 보았던 후보군 중 케이틀린의 신랑감이 정해졌는지 궁금했는데 공개적인 공간이라 차마 물어볼 수가 없다.
“네. 킹크랩 때문에 고생을 조금 했지만요.”
천사 케이틀린이 전직 마녀였던 루이반 공작 부인과도 사이가 좋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연을 대 달라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녀는 그 요청을 거절하느라 고생을 좀 했다.
그 때문에 케이틀린 수호대로 불리는 영애들은 지금 그녀와 조금 소원해진 상태였다.
“소문이 참 빠르네요.”
둘이 티파티를 한 것뿐이라면 소문이 그리 돌진 않았겠지만, 마그스너 후작 부부와 루이반 공작 부부가 함께 저녁을 먹었다는 이야기는 소란스럽게 퍼졌다.
중립을 유지하는 것 같던 마그스너 후작이 완전히 친공작파로 돌아섰다며 사교계가 조금 시끄러워졌지만 그 소문은 이내 킹크랩에 묻혀 버렸다.
“공작 부인을 만나 뵙고 싶었지만 시기가 좀 그래서…….”
케이틀린도 루이반 부부가 킹크랩 광풍이 잦을 때까지 칩거 아닌 칩거를 했단 걸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조만간 만날 날이 올 거예요. 그때 우리 오늘 못다 한 이야기 나눠요.”
레이의 말에 케이틀린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연락 기다릴게요.”
짧게 안부를 나누고 케이틀린이 인사를 하며 사라졌다.
케이틀린을 보내고 부부는 마차에 올랐다. 집으로 갈 시간이었다.
레이는 옆에 앉은 라미엘을 보며 어떻게 다시 분위기를 잡을지 심각하게 고심했다.
당장 입술부터 들이밀면 되려나. 아니면 손으로 쓰담쓰담을 먼저…….
“레이.”
“음? 네? 왜요?”
“당신이 헬라에 가 있는 동안 내가 할 일이 생각났는데, 허락해 줄 수 있어요?”
“무슨 일인데요?”
얼마나 거창한 일이기에 내 허락씩이나 필요한 거지?
아니, 애초에 루이반 수장이 굳이 허락까지 받아서 할 일이 뭐가 있나. 한다면 하는 거지.
“마그스너 영애를 단둘이 만나고 싶어요.”
뭐, 인마?
그래, 케이틀린이 예쁘긴 하지.
사랑스러운 분홍 머리카락에 신비로운 보라색 눈동자까지. 한국에서는 소설 여주나 가능한 색이더라. 저런 외양은 절대 엑스트라 안 주더만.
심지어 사람이 강단도 있고 자기 주관도 뚜렷한데 착하면서 저번에 보니까 부모인 마그스너 후작 부부도 사람 괜찮아 보이더라. 아주 애를 똑 부러지게 잘 키우게 생겼어.
그래도 그렇지 지금 내 앞에서 둘이서 만난단 얘기를 해?
“그, 레이가 생각하는 거 아니니까 손 좀…….”
레이는 라미엘의 발언 직후 잡은 줄도 모르고 움켜쥔 멱살을 풀었다.
공작님은 마님께 멱살을 잡히는 수모를 겪었어도 개의치 않는지 바들바들 떨리는 레이의 손을 꼭 잡아 주며 이야기했다.
“내 법안을 밀어붙이려면 다음 회기까지 이 법안에 대한 좋은 여론을 만들어 둘 필요가 있어요.”
라미엘이 씩씩거리고 있는 레이를 토닥여 달래며 말을 이었다.
“그전에 작위 승계에 뜻이 있어 보이거나 가능성이 있는 여러 사람을 만나서 그에 대한 의견을 직접적으로 들어야 할 것 같아요.”
다음 회기에 여성 작위 승계에 대한 보완점을 내놓지 않으면 여론 형성도 힘들 수 있었다.
“남자는요? 여자가 작위를 받으면 남자 작위는 어찌합니까?”
“아이를 낳으면 누구 작위를 받나요?”
“여자가 그거 받아서 뭘 할 수 있죠?”
라미엘이 작위 안건을 내놓은 뒤 여자들조차 회의적인 반응이어서 앞으로의 길이 험난할 것이라 예상이 되고 있다. 수백 년을 이어 오던 관습 탓에 당사자들도 당황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라미엘은 정공법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작위 계승 가능성이 있는 여성들을 직접 만나 최대한 외부인을 차단한 채 이야기를 나눠 보기로 한 것이다.
여성 작위에 대한 외부의 시선이 좋지 않아, 듣는 사람이 많으면 속마음을 제대로 털어놓지 못할 사람들이 많을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최대한 만나는 인원을 배제해 법안을 낸 당사자와 단둘이서 만나면 솔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케이틀린 같은 경우는 그가 생각한 가장 좋은 후보였다.
무조건 마그스너 영애를 첫 순위로 만나야 했다. 모두가 기함하는 법안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던 유일한 사람이 마그스너 후작이었기 때문이다.
후작의 반응을 보면 그도 이런 생각을 어렴풋이나마 해 본 적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마그스너 집안에서 자란 여성이고 지난번 식사 시간 때 케이틀린이 보인 기색을 생각해 보면 이만큼 좋을 사람은 없었다.
마그스너 영애의 경우 저 혼자서 가는 것보다는 레이와 함께 가는 것이 더 좋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레이가 저보다 더 바쁘다는 사실이었다. 그 일정을 기다리기엔 비는 시간이 아깝고 귀했다.
법안 하나를 제정하거나 개정하는 데에는 본디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문제가 많은데 유독 여성 작위 승계 법안에만 문제가 많은 것처럼 몰아가는 분위기였다. 안 좋은 여론이 생기고 더 퍼지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라미엘은 차근차근 이 사실을 레이에게 이야기했다.
자신의 계획을, 구상한 일을 사전에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게 처음이라 평소처럼 말이 부드럽게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야기 중간에도 말을 끊고 생각을 정리한 뒤, 차분히 이어 나갔다.
신뢰 가득한 레이의 따뜻한 눈빛이 바라보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의 뜻과 생각을 천천히 말해도 초조하지 않게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어 그는 조금 더 상세하게 계획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럼 앞으로도 라엘은 단독으로, 단둘이 많은 여성들을 만나 보겠네요?”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거예요. 다른 사람한테 맡길 수 없으니까.”
미혼 남녀가 단둘이 한 공간에 있는 걸 꺼리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둘이 만나는 일이 쉽지 않은 와중에, 라미엘이 결혼을 했다는 게 다행이었다.
유부남인 공작 각하는 극성이라고도 해도 될 만큼 아내 사랑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그나마 만남이 성사될 가능성이라도 열리게 될 것이었다.
레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나직이 한마디를 했다.
“……라미엘 공작은 내 거라고, 주인 있는 사람이라고 표시 좀 남겨 둘 필요가 있겠네요. 앞으로 계속.”
레이의 허락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