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02화 (102/160)

102화. 라미엘의 법안

“루이반이 올해 계속 날 놀라게 하는군.”

태자가 맞은편에 앉은 루이반 공작 부부를 보며 말했다.

대신전에서 보내진 연구 보고서를 받고 태자는 한동안 자신이 글을 제대로 읽는 게 맞는지 의심해야 했다.

제로석. 마력이 아닌 에너지로 속을 채울 수 있는 고대 마력석이라니.

루이반 공작 부인의 의뢰로 시작해 연구가 된 신(新) 광물. 물과 불로 성질 변화가 가능한, 말도 안 되는, 믿기 힘든 존재다.

그 존재가 지금 태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 레이가 광산에서 가져온 제로석 샘플이었다.

신전에서 보고서와 함께 보낸 주머니에는 가공된 제로석이 들어 있었다. 가공된 제로석의 색은 기존의 붉은 마력석의 가공품과는 조금 달랐다. 선명한 파란색 가공 마력석과 달리 제로석은 본래 색인 녹색이 섞여 청록빛을 띠었고, 열 성질로 가공한 것도 촛불 같은 색이 아닌 선명한 자주색이었다.

태자는 초록색이 선명하게 빛나는 제로석과 루이반 공작 부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레이알렉시스가 갖고 있는 광산의 광물인데 이상 현상이 보여 대신전에 분석 의뢰를 했고, 신전 산하에서 진행되던 연구에 최종 결론이 나와 황실에 보고를 올린 것이라 했다.

킹크랩에 이어 제로석이라니.

라미엘 루이반이 오랜 세월 가문에서 방치당하고 살아온 그간의 보상을 몰아치듯 받는 모양이었다. ‘레이알렉시스’라는 큰 보상을.

‘연회 때 눈이 맞아 연애를 시작했다고 했던가.’

부유한 가문의 여식이지만 귀족도 아니고 세간의 평가도 안 좋은 여자에게 빠질 만큼 감정적으로 미련한 남자는 아니었기에 의외의 선택이라 생각했다.

“운이 좋은 남자군.”

“예, 전하.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어찌 들으면 불쾌한 말일 수 있음에도 루이반 공작은 태자의 작은 혼잣말을 넙죽 받으며 제 부인의 손을 꼭 잡는다.

라미엘은 어디에서 어떻게 누굴 만나든 항상 주변 모두를 챙기고 작은 소란이나 분쟁을 조절하느라 바쁘던 남자였다. 그럼에도 뚜렷하게 누구 하나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편을 두려 하지도 않고 언제나 중립을 유지했다.

태자가 본 라미엘은 모두에게 친절하고 모두와 잘 어울리지만 결코 제 곁을 내주지 않는 자였다. 만인에게 천사 같은 남자였지만 정작 본인이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깊이 있고 친밀하게 누군가를 엮는 일 없이 홀로 고고하던 인상이었다.

쉽게 친해질 수 있지만 가장 친해지기 어려운 남자. 그 남자가 이제는 만인의 천사라는 타이틀을 벗어 던지고 사람들과 정면승부를 하고 있었다.

여성 작위 승계.

모두가 반대하는 일에 홀로 나선 이유가 ‘내 아내가 하고 싶어 하는 대로 살게 하기 위해서.’라니.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물론 라미엘은 회의장에서 저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네 작위를 아내에게 줄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지체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그때 회의 분위기상 라미엘의 발언은 아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게 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고, 회의가 끝난 뒤 몇몇에게 아비 닮아 여자에 미친놈이라는 험담이 오가게 했다.

결혼 후 라미엘은 아내 하나를 위한 천사로 살기로 결심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 레이알렉시스가 가져온 것들을 보고 나니 라미엘의 심정이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이게 어디 보통 일인가. 자원의 판도가 바뀔 참이다. 아내가 마음대로 하지 않았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광물을 얻게 될 일은 없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건 운이 아주 좋은 경우였고, 보통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이 단편적인 예로 여성 작위를 생각할 순 없는 노릇이다.

태자는 시선을 다시 제로석으로 돌렸다.

‘이걸 황실 연구부에서 먼저 발견했어야 했는데.’

하필 사냥제 때 이런 일이 생겼고, 왜 하필 올해 사냥제 참석을 못 할 상황이었는지 타이밍이 원망스러웠다.

“공작 부인 땅에 제로석 시설을 짓는다고.”

“예, 전하.”

레이는 벼락이 떨어지는, 광산 근처의 너른 땅에 제로석을 다시 채울 시설을 지을 예정이었다.

시설은 벼락을 감당할 수 있도록 튼튼하게 지어야 했고, 벼락이 떨어져 충전이 되는 곳과 사람들이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만들어 관리하기로 했다. 이제 더 이상 벼락으로 인한 피해는 없을 것이다.

차후 베롬에 시설이 완공되면 라비던에서 벼락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에너지를 채우고, 베롬으로 보내 충전과 가공을 진행할 것이다.

“충전 시설이 완공되는 대로 상용화할 예정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당장 상품이 되는 것은 아니군. 베롬에서 말하는 수력, 화력 시설 설계도를 보니 최소 3년은 걸릴 것 같으니.”

“제 부지에 짓는 시설은 1년 정도면 완공이 가능합니다. 완공 전에 제로석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게 고지해 벼락으로 인한 사고를 막고, 가공은 베롬 시설 완공 전까진 기존 마력석처럼 마력으로 하려고 합니다.”

제로석 일은 보고서대로 완벽하게 준비됐고, 황실에서는 판매 허가나 내리면 될 듯했다. 태자는 사람을 불러 레이가 가져온 제로석들을 황실 연구부로 보냈다.

시장에 꽤나 충격을 줄 물건이니 발표는 바로 하지 않고 어느 정도 시설이 설치될 즈음의 시기에 맞춰 알리기로 협의했다.

제로석에 관한 논의가 끝나고, 태자는 라미엘을 바라보았다.

“공작은 어떤가. 그 법안, 계속 진행할 것인가?”

웬만하면 파기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말투였다.

“네. 진행하려 합니다.”

“자네가 아내에 그, 미쳐 있는 건 알겠는데 이건 너무 한쪽에 편파적인 건 아닌가.”

남성만 작위를 받고 있는 현실이다. 현재가 기울어져 있는데 여성도 작위를 받게 한다고 편파적이라니, 어불성설이다.

레이는 이를 지적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태자뿐만 아니라 모두가 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 사회 분위기가 그랬다. 더불어 태자와 공작이 대화 중이다. 허락도 없이 끼어들 순 없었다.

“이 법안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자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남자라고 모두 작위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작위를 받지 못한 자는 그대로 가문에서 지워지지만, 그런 자들이 작위를 받은 여성과 결합을 하게 되면 귀족으로 살아갈 길이 열립니다.”

라미엘의 말에도 태자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그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가 펴지는 것이 보였다.

태자 역시도 다른 사람들처럼 라미엘의 법안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거부감이 들어 반대에 가까운 의견만 내비쳤을 뿐이었다.

격렬한 반대와 소란 탓에 라미엘은 지금 말한 것 같은 법안의 필요성을 언급하지도 못했다. 아수라장이 된 회의장을 바라만 봐야 했다.

그런데 지금 라미엘의 말을 듣고 태자는 무턱대고 반대할 안건은 아니란 걸 알았다. 반대한다 하더라도 어떠한 이유로 실행이 어려운지 자신부터도 확실히 알아야 했다. 이건 생각해 볼 문제였다.

법안 발의 이후 처음으로 태자가 루이반 공작의 의견을 염두에 두었다.

“지금 미리 물꼬를 터 두면 언젠가 미래의 황녀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실 때도 잡음 없이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황녀가 가지는 황위 계승권은 있으나 마나 한 겉치레식 권한이었다. 대륙을 통일한 황제이기에, 그런 황제의 피를 가진 자식들은 모두 계승권을 가진다는 사실로 황가의 위대함을 높이고자 한 것뿐이었다.

실제로 리담 역대 황제 중 여성 황제는 젠달 단 한 명뿐이었다. 그마저도 황위 계승을 할 만한 황족 남자가 없어 온갖 잡음을 낸 끝에 어쩔 수 없이 황제로 세운 경우였다.

아무리 황녀가 우수하고 먼저 태어났어도 황자가 없으면 방계의 인물이라도 데려다 후계로 삼는 게 일반적인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 라미엘이 한 말은 태자를 흔들기 충분했다.

태자 파르베제는 아직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아이를 너무도 사랑했다. 이 아이에게 목숨을 걸 각오도 되어 있고 벌써부터 귀해 죽을 지경이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에 태자비 복중의 아이가 황녀인지 황자인지 알 수 없지만, 아이가 만약 황녀이고 자신의 뒤를 잇겠다고 한다면 그 소원이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뒤늦게, 아주 어렵게 가진 귀한 아이였다. 르누아가 후에 또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 없을지도 현재로선 알 수 없었다.

태자비 부부도 여타 권력자들처럼 정략혼으로 맺어진 사이였으나, 두 사람은 여느 부부 못지않게 서로를 존중하고 살았다.

태자는 황제가 되어도 이전 황제들처럼 여럿의 황비를 두거나 정부를 가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 앞으로 후계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태자 당신의 후계자가 없다고, 빨리 황자를 낳아야 한다며 걱정 어린 소리만 몇 년째 듣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말이었는데 만약 태어날 아이가 하나뿐이라면. 그게 황녀라면.

이전 젠달 황제 때처럼 시끄럽게 보위에 올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태자에게 새로운 고민이 생기고 있었다.

***

부부 침실을 나서기 직전, 레이가 라미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한테 라엘 전용 게이트 있는 거 알죠?”

“네.”

“그게 무슨 뜻인지도 알고?”

“네.”

“나 불시에 찾아올 거예요. 하루에도 막 수십 번씩.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나타나서 감시할 거야. 헤덴 예하가 쓰러지시더라도 날 막을 순 없어요!”

자기를 감시한다는 소리에도 라미엘은 굉장히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이거, 보이게 다닐게요.”

라미엘이 레이가 목에 남긴 표시를 가리켰다. 지금은 옷깃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곳이다.

“뭐야, 그거 보여 주려면 단추 풀어야 하잖아요. 누구 맘대로 당신 속살을 남한테 보여 줘? 조신하게 싸매 둬요.”

어딜 감히 남자가 목을 절반 이상 드러내 놓고 다녀? 꽁꽁 싸매고 있다가 부인한테만 조심스레 보여 주란 말이다!

이글이글한 레이의 눈빛에 라미엘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레이는 그의 법안을 찬성하고 응원하는 최고의 지지자였다.

“난 당신이 아주 멋지게 잘 해낼 거라고 믿어요. 가서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나고, 다음 회의에 아무도 찍소리 못 할, 잘 다듬은 법안을 내놔요.”

지난밤 레이가 라미엘에게 해 준 말이었다. 믿는다고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의 행동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일이었지만, 직접 말로 들으니 느낌이 남달랐다.

“내가 도울 일 있으면, 흐음, 언제든지 말해요. 다른 일, 읏, 다 미루고라도 올 테니까.”

라미엘의 폭풍 같은 키스 세례를 받으면서도 레이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라엘이 하려는 일이 그만큼 가치가 있는 일이니까요.”

그 이후로 공작 부인은 신음밖에 낼 수 없었다. 공작이 그야말로 말할, 아니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쾌락 속으로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고분고분 말 잘 듣던 라미엘은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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