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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03화 (103/160)

103화. 본격적으로 (1)

이제 레이는 헬라로, 라미엘은 라비던에서 각각 앞에 놓인 일을 향해 움직일 시간이다.

라미엘 대신 레이와 함께하는 파트너는 이번에도 푸엥과 푸둥이었다.

대형견답게 부쩍 자란 푸엥만큼이나 푸둥도 자랐다. 이제 두 마리가 엇비슷한 크기였다. 레이의 양쪽에 털 달린 보디가드가 든든히 동행하는 셈이었다.

“진짜, 확 요기, 요기에 새겨 버려?”

루이반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에 오르려던 레이가 휙 뒤를 돌아 자신을 에스코트하는 라미엘을 바라보았다.

‘울대뼈 저 부분에 딱 보란 듯이 내 거란 표식을 남겨 둘까.’

라미엘이 허튼짓은 안 할 것이란 사실과는 별개로 상대방의 마음가짐이 문제였다.

‘이런 남자랑 독대하는데 어떻게 반하지 않고 배겨?’

예전처럼 날카로운 기색은 씻은 듯 사라지고 눈빛에 다정함이 어리는 남자였다. 진짜 천사가 된 라미엘을 두고 가자니 그 주인 된 입장에서 속이 터지는 것이다.

아무리 기혼자인 루이반 공작이라고 해도 항간에 아직 레이를 탐탁잖게 여기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은 이제나저제나 라미엘만 노리고 있을 것이다.

재혼법도 개정된 마당이다. 이혼한 라미엘? 이건 흠도 아니다.

저 같아도 라미엘 루이반이 다시 결혼 시장에 나왔다면 무조건 물 텐데 남들은 오죽하겠나.

“해 주고 가요.”

레이가 뭘 해도 다 된다는 남자는 눈에 띄는 곳에 야시시한 자국을 낸다는 말에도 마냥 좋은 얼굴이었다.

“라엘은 믿는데, 다른 사람은 못 믿겠어요!”

“레이 원하는 대로 다 새겨 놓고 가라니까요.”

미치겠다. 이 남자 지금 자기가 어떤 얼굴로 웃는지 모르지?

“당신이 문제예요.”

“어떤?”

“왜 이렇게 잘나서는. 사람이 미모에 ‘적당히’가 없어. 정도껏 잘생겨야지, 도가 지나쳐서 왜 이렇게 사람 미치게 해? 라엘, 저기 저 대리석 조각상 옆에 서서 가만히 있어 봐요. 사람들이 라엘도 작품인 줄 알 거야.”

공작 각하 어깨를 껴안고 주절주절 주접에 가까운 찬사를 꺼내는 마님을 보아하니 최소 15분 이상은 이별 시간이 걸릴 듯 보였다.

이미 마님 배웅은 다 극진히 마친 상태여서 윌포프는 하인들을 원래 자리로 돌려보냈다. 돌려보내는 사람도, 보내지는 사람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마부는 아예 마차에서 내려 마님께서 쥐고 있는 목줄을 받아 두 마리 동물과 함께 자리를 비키기에 이르렀다. 그 누구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평소에 으레 겪어 왔던 일상이었다.

“이리 와요. 안 되겠다. 라엘, 마차에 타 봐.”

레이 손에 이끌려 마차에 탄 라미엘은 문을 닫자마자 입술에 닿는 따뜻한 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레이가 탄 마차가 완전히 떠나고서야 라미엘이 저택에 모습을 보였다. 조금 흐트러진 옷차림에 빨갛게 부어오른 입술이 눈에 띄었지만, 감히 그 누구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저렇게 뜨거우신데 왜 아직 2세 소식이 없으실까.

─저런 광경을 보고 무슨 걱정이야. 조만간 생기겠지.

차마 소리 내어 할 수 없는 말을 눈빛으로 주고받은 하인들이 각자 맡은 일을 찾아 몸을 움직였다.

***

소포니악이 분주했다.

이전에 몇 번이나 정비를 요청한 길이 이제야 정비를 시작, 더불어 다 부서진 처마들도 긴급 보수하고 있었다. 레이가 부서진 지붕 잔해로 다친 사람들을 확인하고 돌아다니면서 보게 된 일이었다.

소포니악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길과 폭설에 대한 정비만 안 된 게 아니라 도시 발전을 위한 모든 게 미비했다.

라 헬라는 행정 관리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외부인인 레이가 요청만 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자료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소포니악은 자료는커녕 본인들이 쓰는 예산도 파악을 안 하고 있었다.

“집정관님, 이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레이의 말에 필레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시선을 피했다. 라비던 역에서 공작 부인을 맞닥뜨린 이후 필레는 그야말로 조심, 또 조심 했다.

라미엘의 예상대로 필레는 루이반 공작 부인의 정체를 발설하지 않았다.

수도 귀족이 자신을 찾아다녔다는 소문이 나면 절대 긍정적인 말이 나올 수 없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오게 될 게 분명했다. 그에게 가장 두려운 건 고요한 소포니악에 큰 소리가 나게 되는 것이었다.

소포니악으로 돌아온 그는 당장 레이가 요청했던 모든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집행 내역은 비공개입니다. 라 헬라는 집정관이 독단으로 저지른 일이지요. 그에 대해선 제가 따로 이야기를 나눌 예정입니다.”

라 헬라 집정관, 그 애송이 녀석은 헬라 집정관 회의를 할 때마다 되바라진 소리를 지껄였다.

관리 내역을 잘 정리해 두자는 것뿐만 아니라 공개를 하자고 하질 않나.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했다. 웃긴 건 그가 자신의 헛소리를 실제로 지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헬라의 파칸은 그가 무슨 짓을 해도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헬라 열두 도시 중 평가 1순위 도시의 특혜 아닌 특혜라고 필레는 생각했다.

파칸이 라 헬라 집정관에게 무른 게 불만이었으나, 그가 워낙 압도적으로 일을 잘하니 무어라 불만을 표출할 수도 없었다.

“내역 공개가 자율적인 건 알겠으나 내가 말한 건 그게 아닌데. 황실 예산은 그런 게 아니라면서요.”

황실에선 각 도시의 파칸들에게 긴급 명령을 내린 것뿐만 아니라 특별 예산까지 하사했다.

제국민들은 황실에 내는 세금인 제국세와 본인 거주지 도시 지역에 내는 거주세 두 종류의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 원칙이다.

황실 세력이 가장 크게 힘을 뻗는 곳은 수도인 라비던이고 그 외 도시는 파칸의 지휘 아래 자율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렇기에, 파칸은 황실을 통하지 않고 자신의 도시 전체에서 직접 세금을 걷고 본인들의 방식에 따라 통치했다.

대신 분기별로 황실에 보고서를 올려 세금 운용과 도시 실태에 대해 알렸다. 황실은 딱 그 정도만 관여하며 그들의 자율성을 존중했고,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접촉하는 일이 없었다. 해당 도시에서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큰일이 생겨 황실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기 전까지는 나서지 않았다.

이런 관계에서 황실이 특별 예산까지 각 도시 파칸에게 내렸다는 것은 제국민들이 불편하지 않게 폭설을 잘 처리하라는 암묵의 명령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파칸들은 황실에서 먼저 보낸 예산을 각 도시로 잘 배분해 재난 처리 비용으로 사용했고, 먼저 나서서 제국민과 도시를 보우한 황실에 예를 갖추기 위해 황실이 요구하지 않더라도 특별 예산의 쓰임을 상세히 보고하는 것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래서 다른 예산은 몰라도 이 부분만큼은 각별히 사용해야 했는데, 소포니악 집정관은 이 꼴인 것이다. 오랜 시간 집정관 일을 하며 처음으로 황실 예산을 받아 본 필레는 황실에 예우를 다하기 위해 보고해야 한다는 수칙을 다 무시하고, 보너스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보고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이었다. 예우라고 하나 몇 번 있었던 일도 아니고 보고를 허술히 한다고 황실에서 무어라 할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보고는 어디까지나 예의 문제였다.

그렇게 생각해서 필레는 가볍게 넘기고 있었는데, 파칸도 아닌 생판 외지인인 수도 귀족이 여기서 그걸 걸고넘어지니 어이가 없었다.

“그건 공작 부인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그런 골치 아픈 일은 제가 다 알아서 할 터이니 부인께서는…….”

필레는 널찍한 이마를 연신 손수건을 닦아 낸 후,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옆의 하인에게 손짓을 했다.

잠시 후 레이와 필레가 마주 앉은 테이블 위로 작은 상자가 하나 놓였다. 붉은 벨벳으로 감싸인 상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웠는데 평범한 내용물을 담고 있을 것처럼 생기지 않았다.

“이게 뭔가요?”

레이의 질문에 필레가 상자를 열며 말했다.

“공작 부인께서 저희 도시에 이리 많은 관심과 애정을 주신 게 감사하여 도시를 대표해 작은 선물을 하나 마련했습니다.”

엄지손톱 크기만 한 다이아몬드가 주렁주렁 엮인 목걸이였는데 한가운데에는 손톱 여섯 개 정도를 합친 크기의 큼직한 푸른 다이아몬드가 달려 있었다.

“……도시가 제게 준 거라고요?”

“예, 예. 저희의 마음입니다.”

레이가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알들이 워낙 커서 그런지 묵직한 무게의 목걸이는 불순물 하나 없는 투명한 빛을 내며 반짝였다.

그녀의 긍정적인 반응에 필레는 급히 아부성 멘트를 추가했다.

“수도에 갔을 때 공작 부인의 눈동자와 잘 어울리는 보석을 발견해 선물로 마련했습니다.”

“흐음.”

레이는 목걸이를 다시 상자에 내려놓았다. 앞에서 손을 비비고 있는 필레의 의도가 눈앞의 다이아몬드처럼 투명하게 보였다.

‘이래서 자꾸 단둘이 있자고 한 거구만?’

엘이랑 케이까지 내보내라고 난리여서 왜 그런가 했더니.

“뇌물이에요?”

“예에? 아니, 무, 무슨, 뭐, 무슨 그런 마, 말씀을…….”

너무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통에 크게 당황한 필레는 다시 솟아오르는 땀을 닦으며 손을 내저었다.

‘뇌물이냐고? 그걸 몰라서 묻나! 이런 건 알아도 모르는 척 조용히 슬쩍 웃으며 주머니에 넣어 가는 거라고!’

수도 귀부인이 세상 물정 모르고 해맑게만 살아서 그런가. 직설적이다 못해 위험할 수도 있는 발언을 이리 직구로 내뱉는 걸 보니, 조금만 잘 구슬리면 넘어가겠다 싶으면서도 어디 가서 홀랑 불어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동시에 들었다.

“아니에요?”

“아유, 아닙니다. 이건 그저 약소한 제 마음입니다. 결코! 그런 게 아닙니다.”

“진짜 뇌물이 아니란 거죠? 그냥 ‘선물’이라는 거 확실하죠?”

오호.

이제 보니 고단수인 모양이다. 신나게 발설한 게 아니라 부러 크게 물은 거다. 확실하게 뇌물이 아니란 소릴 주변에 듣게 하려고.

“선물입니다. 절대! 다른 의도는 전혀 없으며, 빈민가까지 돌보시는 공작 부인의 마음 씀씀이에 감격하여 드리는 겁니다.”

예상대로 공작 부인은 필레가 그저 선물이라는, 뇌물을 부정하는 말을 몇 번이나 한 후에야 상자를 챙겨 들었다.

“좋아요. 그럼 선물은 고맙게 받죠.”

필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예, 예에. 받아 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그건 정말! 아무런! 의도가 없는! 순수한 선물입니다. 그냥 편히 받으시면 됩니다.”

“알겠어요. 아무 의도 없는 거.”

레이가 씩 웃었다.

비싼 선물? 받으면 좋은 거지 뭐.

뇌물용으로 산 것이니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고 비밀스레 조심히 구입했을 것이다. 막 쓰기에 이만큼 좋은 것도 없다.

“그럼 이제 본론 좀 이야기할까요? 아까 못다 한 황실 특별 예산에 대해서.”

“네? 그게 무슨……?”

필레의 표정이 웃는 그대로 굳었다.

“케이, 엘!”

레이는 지체 없이 문밖에 있는 충실한 자기 사람을 불렀다.

“예, 마님.”

“이거 챙겨 둬. 귀한 선물이야. 소포니악을 잘 돌봐 줘서 고맙다고 집정관께서 특별히 챙겨 주신 거니 소중히 두렴.”

“예, 알겠습니다.”

“아, 맞아. 집정관님, 당신 집 이야기도 좀 해야겠어요.”

샤메인에게서 보고가 올라왔었다.

“마님, 사람들이 말한 것들은 모두 사실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말씀하신 집, 열네 채는 모두 소포니악 집정관의 관사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관사 열네 채에, 수도에 있는 집은 또 뭔가요?”

레이가 더더욱 화사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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