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본격적으로 (2)
마그스너 후작 부부의 허락을 받고 라미엘은 케이틀린을 찾아왔다.
그가 자신을 만나고자 한다는 말에 케이틀린은 몹시 의아했지만, 법안 관련해서 가장 먼저 의견을 듣고 싶어 하는 게 자신이라고 했다는 말에 바로 수긍했다.
마그스너 후작 부부는 레이를 제외하고 라미엘의 법안을 지지하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그가 법안 때문에 자신의 딸을 만나고자 한다는 말에 부부는 당연히 허락하려고 했다.
그런데 루이반에서 온 연통을 잘 보니 공작이 공작 부인 없이 혼자서 온다는 것이었다.
‘공작 부인이 킹크랩 때문에 바쁘신 건 잘 알지만 요즘은 그래도 이전만큼 바쁘진 않을 텐데, 어찌 공작이 혼자?’
레이의 광산은 아직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공작 부인이 킹크랩 사업만 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레이가 잠시의 틈을 낼 수도 없이 바쁘다는 핑계는 믿기 어려워했다.
하여 라미엘은 사실 레이가 요즘 헬라에 있는 빈민가를 돕는 일을 하고 있으며, 이제 시작 단계라 할 일이 많아서 오지 못한다는 이야기까지 꺼낼 수밖에 없었다.
부부가 나란히 좋은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여 공작의 법안과 공작 부인의 사회 환원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작 부부는 라미엘의 초대에 응했다.
“그런데 공작 부인께선 왜 라비던이 아니라 헬라에서 빈민을 돕고 계시는지…….”
“헬라에 있는 킹크랩 사업장에서 일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습니다.”
일을 하면서 어려운 사람까지 돌본다는 말이었다.
“세간의 루이반 공작 부인에 대한 평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마그스너 후작 부부는 딸아이의 말을 다시 한 번 더 믿을 수 있게 되었다.
후작 부부와 먼저 인사를 하고 간단히 담소를 나눈 뒤, 라미엘은 케이틀린을 찾았다.
“루지, 나가 있어.”
케이틀린의 말에 전담 수석 하녀가 난감한 얼굴을 했다.
상대가 아무리 기혼 남성이라고 하지만 미혼 여성과 단둘이 한 방에 있겠다니, 쉽게 물러나지지 않는다.
“저 아가씨…….”
“잠깐 자리 좀 비켜 달라고.”
차갑게 들릴 만큼 단호한 케이틀린의 권유에 루지는 머뭇머뭇, 나가진 못하고 불안한 눈으로 주인을 바라보았다.
루이반 공작이 결혼하기 전까지 사교계 내 1순위 커플링이 케이틀린과 라미엘이었다. 재혼법도 없어진 마당이다. 불안한 생각만 주렁주렁 매달렸다.
루지는 최대한 공손한 눈빛을 가장하며 루이반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 각하, 입술은 왜 저러지. 아하. 부인께 제대로 당하셨구나.’
누가 봐도 임자 있는 사람이라는 흔적이지만 계속 두 분이 말을 하다 보면 익숙해져서 눈에 안 보일 수도 있는 일이다.
‘공작 각하가 조금 몸을 움직일 때마다 목덜미에 슬쩍 보일 듯 말 듯한 저 야시시한 자국도 당연히 공작 부인 작품이겠지? 어후, 부인 정말 대단하시네.’
입술 말고 목에도 있는 주인 흔적에 공작 각하께선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유리알 같은 눈빛으로 케이틀린 아가씨를 바라보고 있다.
더불어 목소리도 딱딱하기 그지없이 사무적인 데다가 아가씨가 공작 부인 이야기를 꺼낼 때만 그제야 살짝 얼굴에 미소가 어린다.
‘공작 부인 이름만 나와도 저 차가운 얼굴에 미소가…… 응?’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오래 안 걸려. 걱정할 일 없어.”
“예, 나가 보겠습니다.”
오랜 세월, 여러 사람들을 중매 서 본 루지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아가씨 말대로 걱정할 일 없겠다고.
레이의 걱정과 다르게 라미엘의 따뜻한 눈빛은 루이반 공작 부인 한정의 것이었다. 일부러 눈빛을 다르게 한 게 아니라 그 자신도 모르게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레이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의 시야에 레이가 없으니 평소처럼 지극히 건조하고 사무적인 눈길만 남을 뿐이었다.
“지난번, 공작 각하께서 법안을 말씀하신 이후…….”
루지가 나가고 응접실에 단둘만 남자 케이틀린이 차로 목을 한 번 축인 뒤 말을 했다.
“약혼을 잠시 미루기로 했습니다.”
고생해서 같이 후보를 골라 준 레이에게 미안하지만 루이반 공작이 법안 이야기를 꺼낸 이후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작위.
아들이 없는 마그스너의 미래를 걱정하는 소리는 어릴 적부터 지겹게 들어왔다. 다들 세 살을 채 넘기지도 못하고 별이 된, 기억에도 없는 세 오빠들과 케이틀린을 비교했다.
정작 마그스너 후작 부부는 살아남은 딸아이 하나를 잘 키우기 위해 노력했는데 주위에서 케이틀린을 가만히 두질 않았다.
“어쩜 이렇게 명석할까. 마그스너 아들들이 살아 있었다면 정말 대단했겠어.”
케이틀린이 잘해도 칭찬은 죽은 오빠들에게 돌아갔다. 그들이 살아 있었다면 더 훌륭했을 거라는 비교였다. 일찍이 죽어 제대로 겪어 본 적도 없는 오빠들에게 미안하지만 케이틀린은 그들이 지긋지긋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더 이상 죽은 셋을 언급할 필요가 없어질 무렵이 되어서야, 케이틀린이 사교계를 집어삼키고 나서야 비교는 멈추었지만 마그스너에 후계가 없다는 현실이 남아 있는 사실도 끔찍했다.
‘이 일로 또 얼마나 시끄럽게 굴까.’
이제야 멈춘 오라비들의 이야기가 다시 수면 아래에서 위로 꺼내질 게 뻔했다.
그런 중에 여성 작위 안건이라니. 오빠들 그림자에 진절머리 치던 케이틀린조차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케이틀린은 마그스너를 사랑했다. 이 가문이, 부모가 좋았다. 자기 대에서 가문이 이대로 없어지기를 원치 않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 상대를 잘 골라야 했다. 데릴사위로 들여도 괜찮을, 별 볼 일 없는 남자가 필요하면서도, 마그스너 가문의 이미지를 위해 어느 정도 명망은 있어야 했다.
이런 깊은 속마음까진 차마 털어놓지 못했지만 레이는 후보군을 고르며 얼추 그 사실을 눈치챈 듯 보였다. 다만 절대 그걸 내색하지 않고 케이틀린의 마음을 배려한 가장 적합한 후보군을 열심히 골라냈다.
보면 볼수록 좋은 사람이었다. 사냥제 때, 절벽에서 추락한 게 아무래도 신이 안배한 선물이 아닐까 싶은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남편이 자신을 찾아왔다.
케이틀린은 루이반 공작이 여성 작위에 관한 일로 자신을 찾는다는 소리에 눈앞에 놓인 약혼자 후보 다섯을 치워 버렸다. 그보다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 우선순위를 바꿔야 했다.
“……아직 아무에게도 약혼을 미뤘다고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요.”
케이틀린의 말에 라미엘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마그스너 가문의 유일한 후계이자, ‘막내딸’인 것은 공작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요?”
“네, 그렇습니다.”
“공작 각하께서 의견을 듣고자 오셨다고 했으니 제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라미엘의 예상대로 시작은 마그스너 영애가 아주 적합한 듯했다.
***
“필레 집정관은 수도에 으리으리한 집을 사 놓고 출퇴근을 해요. 그리고 소포니악에 집이 없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관사를 열네 채나 샀더군요?”
소포니악 토박이고 어릴 적부터 살던 집이 버젓이 있으면서 저런 소릴 하다니, 웃기지도 않는다. 알면 알수록, 까면 깔수록 소포니악 집정관의 비리가 나왔다.
저런 사람이 여태 연임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소포니악에서 가장 가까운 바로 옆 도시가 라 헬라다 보니 더 극적으로 비교가 되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요?”
레이의 질문에 라 헬라 집정관, 델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포니악 집정관에게 문제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심각하지만 옆 도시에서는 어쩔 수 없는 애매한 문제였다.
“제가 손을 대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나서면 소포니악 사람들이 불편하게 생각할 수 있거든요.”
집정관은 해당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직접 추천을 해서 올리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그리고 그런 제국민의 선택을 존중하기 위해 각 도시의 집정관은 철저하게 각자의 영역만 지켰다.
다른 도시에 잡음이 나도 여간하지 않은 일엔 신경을 쓰지 않았고, 해당 도시도 자신들의 도시에 문제가 있으면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지금처럼 타 도시의 일을 외부인이 나서서 도와달라고 하는 경우는 몹시 이례적이고, 델마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제가 말을 제대로 안 했나 봐요. 집정관께서 나서 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혹시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집정관들이 해결하는 공식적인 방법이 있는지를 묻는 거랍니다.”
레이의 말에 델마가 머뭇하며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했다.
“저, 갑자기 이런 말씀드리기 좀 그렇지만 절 편히 불러 주십시오. 너무 깍듯하게 대해 주시니 제가 조금 불편해서요.”
레이가 말을 할 때마다 라 헬라 집정관이 안절부절못하기에 케이와 엘은 설마 저자가 마님께 마음이라도 품었나 의심했는데, 전혀 다른 이유로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다들 집정관님을 ‘델마’라고 부르고 있던 거였군요?”
일 잘하고 싹싹한 사람이라 도시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는 줄 알았더니 그것과 별개로 호칭까지 편하게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그건 그냥 그분들이 좀 놀리려고 그런 겁니다. 안 어울리니까 재밌어서 절 델마라고 부르는 거죠. 레이디께선 그ㄹ…….”
“모든 분들이 그리 부르신다니, 저도 델마라고 부를게요.”
“예? 예에? 아, 아아. 네, 네. 그렇게 하십시오.”
레이디께선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하려던 걸까.
케이와 엘이 다시금 의심 쌓인 눈초리로 집정관을 바라봤으나 마님의 해맑은 태도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공작 각하 외의 모든 것을 쳐 내 버리는 무의식의 벽을 촘촘히 쌓는 광경을 보며 안심했다.
“특별히 처벌 규칙 같은 건 없습니다. 도시 내에서 일어난 일은 그 안에서 해결하는 게 원칙이라서요. 그래도 지금 드러난 사안이 심각하니 파칸께서 움직이실 겁니다. 파칸께는 제가 말씀 올려 보겠습니다.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바쁘실 텐데 매번 찾아와 귀찮게 구는 걸 맞아 주시는 것으로도 감사한걸요. 차도 잘 마셨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소문대로 델마가 내리는 차는 정말 맛이 좋았다. 떫은 맛 하나 없고 차 본연의 달큼한 맛까지 느껴졌으며 향긋한 향만 맴돌다가 목구멍을 넘어갔다.
“시간 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 인사드립니다.”
“저야말로 만나 봬서, 즐거웠습니다.”
델마는 적당한 단어를 고르느라 잠시 쉬었다가 말을 했지만 하고 나니 즐거울 만한 일이 아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즐거운 게 아니라, 그, 어…….”
“풉. 네, 저도 즐거웠어요.”
허둥지둥 당황하는 델마의 모습에 레이의 웃음이 터졌다. 가볍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델마가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