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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05화 (105/160)

105화. 귀족 상해

집정관에 오르는 과정은 이러하다.

먼저 마을에서 가장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사람들 혹은 지원자를 후보로 추린 뒤 집정관을 뽑는다는 공고 낸다. 공고에는 후보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후보의 이력이나 관련 설명이 쓰여 있다.

공고 게시 기간은 도시마다 다 다른데, 소포니악은 놀랍게도 대강 공고가 이쯤 걸렸으면 이제 뽑을 때 됐다는 방식으로 진행한다고 했다. 소포니악은 계속 단일 후보로 필레만 나왔기에 특별한 부적격 사유가 없는 이상 그가 당선되었고, 그 덕에 그는 세 번이나 연임한 상태였다.

집정관 결정 날, 마을 초입이나 커다란 연회장같이 대중이 모이기 쉬운 곳에 사람들을 모아 필경사가 각 후보에 대한 설명을 낭독하고 후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설명을 한다.

그리고 현장에 모인 사람들이 누가 더 적합한지를 논의하고 집정관을 결정하는 식이었다.

글을 읽는 사람은 본인이 직접, 그렇지 않은 사람은 현장에 있는 필경사를 통해 추천서를 적고 그 수가 가장 많은 사람이 당선되었다.

모아진 추천서는 해당 도시의 파칸에게 보내고 파칸은 황실에 집정관 임명 요청 서류를 발송한다. 그러면 황실에서 임명을 확인하는 직인을 찍어 보내 주고, 그렇게 뽑힌 집정관은 5년간 소도시의 수장이 된다.

연임의 경우 황실 인증 절차는 생략되며 임기를 쭉 이어 갈 수 있다. 임기 중간에 교체된 경우는 극히 드물었는데, 기록상 남아 있는 임기 중 교체는 황제가 집정관의 비위 사실을 알고 직접 나서서 처리했을 때뿐이었다.

“……태자 전하께서 관여하실 만큼은 아닐 테고.”

황실 예산이 멋대로 쓰였다고 고발하기엔 지금이나마 여기저기 뒤늦게 시설들 복구를 하고 있으니 애매했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두자니 괘씸했다.

레이는 마차를 타지 않고 천천히 걸어 다니며 소포니악의 전경을 보고 곰곰이 생각했다.

특별한 처벌 규정이 없다는 건 달리 말하면 ‘어떻게든’ 몰아낼 수도 있다는 소리다. 다만, 소포니악 집정관의 남은 임기는 앞으로 세 달. 그냥 기다려 볼까도 싶은 기한이다.

필레가 여태 연임을 할 수 있던 이유는 후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포니악은 집정관 뽑는 일에 참여율이 낮아 별다른 후보를 내지도, 그를 갈아치울 생각도 않고 있었다.

‘세 달 동안 적당한 후보자를 골라서 그 사람을 키우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골똘히 고민하는 레이의 머리 위로 와르르 소리가 들렸다.

“마님!”

폭설에 부서진 시설 잔해가 녹은 눈과 함께 레이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

“마님, 몸은 좀 어떠세요?”

케이와 엘은 울기 직전의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는 레이에게 물었다.

“……누구, 아, 너희구나.”

하얗게 메마른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음성이 새어 나왔다.

“괜찮아.”

소포니악에 레이의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베르니까지 왔다 갔다 하는 시간도 은근히 걸려서 잠시 동안 소포니악에 머물기로 했는데, 작은 도시라 숙박 시설이 없어 아예 집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루이반 저택이나 베르니에 비할 바 안 되는 2층짜리 자그마한 집이지만, 레이가 머무는 안방만큼은 집무실을 겸했기 때문에 다른 방에 비해 큼직했고, 그녀의 취향에 맞게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잠깐 거처하는 곳이고 케이, 엘과 함께 셋이서 사는 집이니 그리 클 필요가 없어서 레이는 여느 도시민처럼 지극히 평범한 집을 선택했다.

루이반 저택에 비해 굉장히 소박한 작고 귀여운 집을 보며 레이를 제외한 루이반 가솔들은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마님께서 빨리 입주할 수 있는 곳으로 하자고 하셔서 하루 만에 결정된 거처였지만, 허름하다면 허름한 곳에 무방비로 놓인 것 같은 마님을 보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마 이런 곳에 잠시나마 마님이 머무셨다는 걸 공작님이 알게 된다면 기함하실 것이다. 공작님은 아마 베르니를 소포니악에 통째로 옮기고도 남을 분이니 말이다.

그래도 가솔들의 걱정과 달리 마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니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공작께 이곳에 머문다고 알릴 때, 마님께서 직접 선택하시고 만족스러워하신 곳이라고 방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집정관님께서 만나 뵙길 청하십니다. 지금 오셨습니다.”

좋게 말하면 평범하게, 나쁘게 말하면 허술하게 지은 집이라 그런지 목소리를 조금만 크게 내도 방 밖으로 소리가 다 들렸다. 레이의 힘없는 목소리도, 그녀에게 보고를 올리는 소리도 문밖에서 하얗게 질려 초조한 얼굴로 서 있는 필레는 생생히 듣고 있었다.

“들어오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케이가 대답을 하고 문을 열러 걸어가는 동안, 엘은 주머니에서 흰 가루가 섞인 진득한 액체가 든 작은 통을 꺼내 연 뒤 그걸 레이의 입술에 조금 더 발랐다.

한층 더 하얗게 질린 레이에게 엘이 눈으로 ‘완벽합니다.’ 하는 신호를 보내는 사이 문이 열렸다.

“공작 부인.”

필레가 쭈뼛거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레이는 엘의 부축을 받고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시 풀썩 침대 위로 몸을 뉘었다.

“내가 몸이 좀 불편해서…….”

“아이고, 편히 누워 계십시오! 일어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필레가 손을 휘저으며 굽실거렸다.

공작 부인의 이마와 머리에 둘둘 감긴 붕대를 보니 필레는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진다는 심정을 알 수 있었다. 가뜩이나 자신의 비위 사실을 긁어 대던 사람인데 이런 사고까지 당했으니 얼마나 화가 날까.

회심의 뇌물은 먹히지도 않았다. 이미 구매 예약이 되어 있던 걸 사려고 웃돈까지 얹어 주고 가져온 것이었다. 고생해서 얻어 온 걸 고스란히 꿀꺽 먹힌 것도 분통이 터져 죽겠는데, 지금 이렇게 눈치를 보며 벌벌 기어야 하는 것도 미칠 노릇이었다.

여간한 귀족이라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집정관도 꽤나 명망 있는 자리고 귀족들도 집정관을 허투루 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눈앞에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사람은 루이반이었다. 황제가 아틸 루이반으로 부르는 그 루이반!

소문을 듣자 하니 공작이 공작 부인을 제 목숨처럼 아낀다는데, 하필이면 그 공작이 토벌전에서 명성을 날린 무장이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필레는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 부랴부랴 레이에게 달려온 길이었다.

긴급히 찾아온 집은 루이반 공작 부인이 살기에 몹시 초라해 보이는 지경이었으나 그 사실이 필레를 더 두렵게 만들었다. 얼마나 상처가 위중하면 제대로 된 집을 구하지도 못하고 이런 데로 모셨겠는가.

레이는 그저 아주 잠시만 머물 예정이라 비용 절감 차원에서 그런 것인데 필레는 제대로 오해를 했다.

“소식을 듣고 어찌나 놀랐던지. 열일 제쳐 두고 안부 여쭈러 왔습니다.”

“이러지 않으셔도 됐는데. 얘들아, 손님 오셨는데 차라도…….”

“아닙니다! 전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문안을 온 것이니 차 대접 같은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집정관님이 이리 찾아와 주시기까지 하니……. 제가 그냥 있으면 안 될 것 같군요.”

레이의 말에 필레의 귀가 번쩍 뜨였다. 바보가 아닌 이상 저 말을 못 알아듣는 이는 없을 것이다.

목걸이는 먹히지 않았지만 ‘순수하게 인사를 하러 온’ 것이 먹히고 있다. 루이반 공작 부인은 공명정대하지만 진심과 인정에는 약한 듯했다.

‘괜히 돈 썼잖아?’

그래도 이렇게나마 공작 부인의 마음을 돌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시설 정비를 담당한 자는 모두 해고하고 빈민가로 내쫓아 버렸으니 노여움 푸시고 소포니악을 잘 돌봐 주십시오.”

필레는 몇 번이나 안부를 묻고 잘 부탁드린다며 머리를 조아린 뒤 집을 나섰다.

“사라졌습니다.”

저 멀리, 필레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침묵을 고수한 세 사람은 그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담당자를 모두 해고해? 웃기네. 그럼 자기부터 집정관 자리에서 내려와야지.”

뒤늦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대강 정비한 게 제대로 됐을 리가 없다.

애초에 레이에게 보여 주고자 보이는 곳만, 그나마도 대충 정비했기에 사고가 벌어진 것이다. 이런 명령을 내린 당사자는 명령을 수행한 말단 인부를 자르는 것으로 일을 해결한 모양새였다.

“그 사람들을 만나 봐야겠지?”

“예, 마님. 준비하겠습니다.”

무너지는 시설 때문에 다친 건 엘과 케이였다.

그들은 마님을 온몸으로 막아 내느라 상처를 입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상처가 아주 가벼운 것도 아닌지라 케이의 팔과 엘의 등에는 레이가 머리에 둘둘 말고 있는 것 같은 붕대가 감겨 있었다.

두 사람이 재빨리 몸을 날린 덕분에, 그림자 기사들은 나설 틈도 없었고 레이는 이마를 아주 살짝 스친 정도에 그쳤다.

굳이 레이가 큰 상처를 입은 듯 연극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필레를 잡기 위해서였다.

외부인인 레이가 필레에게 소포니악의 행정 부재와 부패를 계속 따지고 들 순 없었다.

지금이야 지은 죄가 많아 찔리는 필레가 레이에게 벌벌 떤다고 해도 사실 집정관은 꽤나 높은 자리였다. 세금 징수권과 도시 운용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건 귀족이 본인의 영지를 다스리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실제로 집정관은 준귀족인 사람들이기에 귀족 사회에서도 그들과 비슷한 정도의 대우를 받곤 했다.

그렇기에 언제까지고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외부인이 필레의 부정을 물고 늘어질 순 없었다. 필레를 들이받기로 결심했다고 해도 명분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도시 관리 부실로 인한 사고가 발생했고, 레이는 이 건을 써먹기로 했다. 귀족 상해라는 좋은 명분이 생긴 것이다.

그렇기에 레이는 중상을 입은 것처럼 행동해 필레를 속여야 했다.

“가자.”

엘이 내민 모자를 푹 눌러써 머리에 감긴 붕대와 얼굴을 반쯤 가린 레이가 문을 열었다.

***

누군가가 빈민가를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소식에 다시금 불안감이 엄습하던 때, 리체는 모자를 푹 눌러쓴 인영 뒤의 낯익은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빈민가를 찾은 이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누군가 했더니, 알렉스 님?”

“리체, 오랜만이야.”

“모자는 왜 그리 눌러쓰고 오셨어요? 알렉스 님인지도 모를 뻔했네요.”

“으응, 사정이 좀 생겨서……. 저기, 리체, 최근에 이 동네로 들어온 사람들이 있지 않아? 그 사람들을 찾고 있는데.”

“아……. 그 사람들. 이쪽으로 오세요.”

“리체 지금 일해야 하는 시간이잖아. 바쁘지 않아?”

“그렇긴 한데 제 설명만으로는 여기서 집 절대 못 찾으실걸요. 같이 가는 편이 훨 나아요.”

빈민가는 집과 집끼리 어설프게 얼기설기 엮여 있는 탓에 복잡했고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특정 집을 찾기 어려웠다.

겉으로 보이는 집들은 그나마 집의 형상이라도 갖추고 있었지만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집이라고 말하기에도 애매한, 판자들을 엮어 만든 가건물 수준의 집들이 즐비해서 외부인이 찾아내기가 힘들다.

리체의 뒤를 따라가는 동안 점점 레이의 표정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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