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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06화 (106/160)

106화. 빈민가 사람들

내부를 처음 들어와 봤는데 사정이 심각했다.

이곳은 집에서 물이 새는 수준이 아니라 집이 무너진 곳에 그 잔해들을 엮어 살아야 하는 수준이었다. 라 헬라 빈민가는 적어도 집의 형태는 갖추고 있었다. 이 정도는 아니었다.

발에 뽀각대며 밟혀 부서지는, 집 같지도 않은 집의 잔해가 느껴질 때마다 레이는 분노에 차올랐다.

“저기, 안에 있어요?”

리체가 어느 한 골목 구석에 판자들과 천막으로 급히 쌓아 만든 집을 보며 외쳤다.

“여기인 거지? 리체, 고마워. 이제 내가 알아서 할게. 공부는 할 만해?”

“네. 이제 간단한 단어 정도는 눈에 들어와요!”

리체의 자랑에 레이가 엄지를 추켜세웠다.

“오, 리체 멋지다!”

“그게 뭐예요?”

레이의 손동작에 리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아, 이건 최고라는 뜻이야. 무언가가 아주 대단할 때 써.”

레이의 말인즉 이 표식은 극찬이라는 뜻이었다.

“헤헤. 감사해요.”

레이디의 칭찬에 리체가 활짝 웃었다.

“오늘 밤에도 수업 있지? 열심히 하고 와.”

“넵! 아차, 돌아가실 수 있죠?”

리체는 그러면서 레이 뒤의 전담 하인을 향해 물었다. 그 누구도 레이가 길을 외웠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기억했습니다.”

“걱정 말고 가셔도 됩니다.”

하루아침에 필레의 손에 빈민으로 전락된 사람들은 이곳에 온 뒤로 내내 겁에 질려 있었다.

빈민가로 쫓겨 오면서도 덜덜 떨었고, 험악한 소문이 들려오는 곳이기에 여기서도 해코지를 당할까 봐 걱정했다.

그런데 빈민가 여자들은 소문과 달리 별 거부 없이 그들을 받아들였고, 해코지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이곳에 적응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도왔다.

그렇다고는 해도 집이라고 할 수 없는 공간과 빈민들의 처지에 눈앞이 캄캄했다. 평생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빈민의 삶에 연타로 충격을 먹고 그들은 몇 날 며칠을 울었다.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하나 하면서.

그런 와중에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높은 사람이 등장한 것 같아 더럭 겁이 났다.

이곳으로 와서 내내 이 동네 사람들이 해 준 말이 귀족을 조심하라는 조언이었다. 그들은 잔뜩 긴장한 상태로 바깥의 대화를 들었다. 그런데 안심해도 되는 사람이 나타난 듯 보였다.

“저기, 안에 있지? 잠깐 이야기 좀 듣고 싶은데.”

문이랍시고 막아 놓은 천을 살며시 걷으며 파란 눈동자의 레이디가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아고, 피곤하다.”

레이가 침대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증거와 증인도 확보했고 처리할 것도 서명했으니 내일부터 확실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푸엥과 푸둥이 신난 발걸음으로 레이 주변을 방방 돌았다.

“잘 있었어? 아무도 없는 데 있으려니 심심했지?”

잠시 침대 위에서 쉬던 레이가 몸을 일으켜 침대 아래로 내려와 두 마리 동물을 품에 안았다. 풍채가 똑같은 두 마리는 레이의 품을 꽉 채웠다.

어쩜 이렇게 두 마리가 체격이 똑같은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푸둥은 중형견만 했는데.

“음……. 푸둥아, 우리 푸둥 얼마나 컸니? 지금 이게 본래 몸 맞아?”

도리도리. 품 안의 푸둥이 대답을 했다.

“아니야? 혹시 지금보다 더 큰 거야? 아니면 작은데 일부러 푸엥한테 맞춰서 몸을 키운 건가?”

푸둥이 레이의 품을 벗어나 방 가운데로 뒷걸음질했다.

“어머나.”

푸둥이 고갯짓을 몇 번 하자 압축 팩에서 이불이 꺼내지는 것처럼 몸집이 커졌다. 대형견 정도의 크기인가 싶더니 쑥쑥 커지다 송아지보다 조금 더 큰 크기에서 멈췄다.

“울 아가……. 많이 컸네?”

얼굴도 갸름해 강아지 느낌은 전혀 나지 않았다. 땅을 디딘 네 다리가 한눈에 보기에도 두툼하고 단단하다. 내쉬는 숨에서도 아주 작게 그르르 소리가 울렸다.

놀라운 사실은 푸엥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푸둥이 갑자기 몸을 키웠는데 놀란 기색도 없이 레이의 품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푸엥한테 보여 준 적 있어?”

끄덕끄덕.

요 녀석들, 베프구나.

“푸둥, 이리 와.”

푸둥은 레이의 말에 고분고분 다가와 품에 안겼다. 정확히는 안겼다고 하기보다는 머리만 품에 들이민 거였지만.

“우리 막둥이, 엄청 잘생겼네.”

이렇게 금방, 잘생기게 클 줄 알았다면 이름을 푸둥이 아니라 엑스칼리버나 라미엘 2세 정도로 지었어야 했다. 푸둥이란 이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모였다.

레이는 푸둥의 이마와 미간에 쪽쪽 뽀뽀를 했다.

“푸둥아, 혹시 다 큰 거야?”

도리도리.

푸둥의 본모습은 처음 보는지라 이만큼 자랐을 줄은 몰랐다. 강아지만 했던 시절을 떠올려 보면, 지금 모습이면 청소년은 된 것 같은데.

‘이 정도 컸다면, 설마…….’

“푸둥아, 혹시 각인할 줄 아니?”

레이의 질문에 푸둥이 두 가지 대답을 했다.

도리도리, 끄덕끄덕.

할 수 없지만, 할 수 있다?

“아직 제대로 못 새긴단 뜻인가? 그래?”

끄덕끄덕.

심장이 철렁하는 심정이었다. 울프 드래곤의 성장이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는데. 옆에 끼고 잘 키워서 그런지 푸엥이 크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커 가고 있었다.

“우리 애기는 계속 애기일 줄 알았는데.”

그 말에 푸둥은 불안한 눈으로 레이를 바라보았다.

“무럭무럭 잘 크고 있었네.”

레이는 기특하단 얼굴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인간들 틈에서 성장기를 보내는 푸둥이 울프 드래곤으로서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까 항상 걱정이었는데 잘 크고 있는 듯 보여 마음이 놓였다.

“푸둥, 앞으로 각인을 할 수 있게 되더라도 절대 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각인은 하면 안 돼.”

이미 인간 사회에 발을 들였고 사람 손을 탄 아이기에 레이는 걱정이 되었다.

“각인을 하면 네가 힘들어질 수 있으니까. 난 우리 푸둥이 인간들에게 흔들리지 않고 곧게 잘 자랐으면 좋겠거든. 절대 안 하는 거다? 알았지?”

레이의 말에 푸둥은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레이가 걱정할 일은 자신도 절대 안 하겠다는 의지가 눈빛에 보였다.

“아유, 착해라. 말도 잘 듣지. 몸을 작게 만들고 있는 건 힘들지 않아?”

도리도리.

“다행이네. 불편하면 루이반 동산에 풀어 두려고 했는데.”

푸둥은 기분 좋게 컁컁 웃으며 바닥에 누워 배를 보였다. 울프 드래곤이 부모나 반려에게 보이는 최고의 신뢰 표현이었다.

레이는 알 길이 없었지만.

***

사람들이 마을 한가운데에 모였다. 이번 폭설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집정관 추천 날에도 많아야 십여 명 남짓 정도가 모이는데, 서른 명이 넘는 인원이 왔다는 것은 소포니악에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람들은 왜 모였는지 영문을 몰라 했고, 이 모임의 주최자가 최근 필레의 집이 어딘지를 묻던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집정관님 집이 어딘지 묻더라고요. 저쪽에 보이는 집이라고 말해 줬는데, 사실 그 집에서 집정관님 본 지는 꽤 된 것 같아요.”

“저 집이라고요? 아이고, 그러니 당연히 못 본 지 꽤 됐지. 집정관님, 빨간 지붕 집에 살잖아요.”

“에엥? 무슨 빨강? 필레 우리 옆집에 사는데?”

집정관 집 이야기를 하는데 사람들은 서로 당황했다. 말하는 사람마다 칭하는 필레의 집이 다 달랐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래서 필레 그 사람 집이 어디지?”

“정답은 모두 다, 입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가르며 엘이 외쳤다.

“다들 모이셨어요? 이번 눈으로 고생하신 분들 맞으시죠?”

“그렇긴 한데 우릴 왜…….”

“그나저나 다 정답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죠?”

중년 여성의 질문에 엘이 대답했다.

“소포니악 집정관께선 이곳에 집을 열네 채 구해 두고 계셔요.”

“예에? 열네 채? 그게 무슨 소립니까? 왜 그렇게 집이 많은 건데요?”

“필레 그 사람이 그렇게 돈이 많았던가?”

레이는 병중으로 위장된지라, 사람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빈민가를 제외하고 공식적인 자리에는 나올 수 없는 설정이었다.

그래서 케이가 마님 곁에 남고 엘이 대신 나서서 사람들에게 필레의 도시 관리 부재로 손해를 입은 사람들을 만나는 중이었다.

“네, 무지 부자세요. 수도에 좋은 집을 사 두고 거기서 소포니악을 왔다 갔다 하고 계실 정도니까요.”

“뭐라고요?”

“뭐어?”

“수도에서 왕래한다고요?”

“세상에. 맙소사. 그게 사실이야?”

사람들의 목소리가 확 커졌다. 여기저기 상흔이 보이는 사람들은 집정관이 소포니악에 살지 않고 집만 열네 채를 두고 라비던에 산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 떠들썩했다.

눈 때문에 우리 마님이 다쳤고, 그 마님은 너희가 아는 검은 머리 여성이며 이번 시설 관리를 제대로 못 한 일에 크게 낙심하셔서 소포니악 세금을 알아봤더니 집정관이…….

사전에 짜 놓은 대본을 읊어 소포니악 집정관의 부정을 말할 것도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여기 모였는지도 다 잊어버린 채, 격렬한 성토를 시작했다.

그들은 필레의 사치와 행정 부재에 대해 처음으로 인지한 상태였다. 막연히, 그리고 당연히 집정관이 일을 하고 있다고만 여기던 사람들은 분노에 찼다. 필레를 치우는 일이 생각보다 빨리 진행될 것 같은 광경이었다.

엘은 마님의 언질대로 사람들 사이에 껴서 열심히 필레의 부정을 어필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필레는 공작 부인이 자기편이 되었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마음 편히 소포니악을 떠나 수도에서 희희낙락 놀고 있었다.

그 시각 레이는 빈민가에 와 있었다.

빈민가로 막 쫓겨난 이들은 지금 사람들과 함께 필레의 만행을 곱씹고 있을 것이고, 남은 이들은 레이가 익숙해진 사람들뿐이다.

죄지은 것도 아니지만 막상 고백을 앞두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무슨 대단한 일이기에 다 불러 모았냐며 생글생글 웃는 사람들을 보자니 섣불리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후. 사실…….”

어차피 지금쯤이면 엘이 소포니악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다 이야기했을 것이다. 외부에서 소식을 알게 되는 것보다 자신이 먼저 밝히는 게 이들에게 실례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 귀족이야.”

레이는 눈을 꼭 감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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