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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07화 (107/160)

107화. 레이의 게이트

“나 귀족이야.”

레이가 눈까지 질끈 감고 말한 것치고는 시시한 반응이 돌아왔다.

“아아. 난 또 뭐라고.”

뭐지, 이 평온한 분위기는.

“……그 반응은 뭐야?”

“알고 있었어요. 같이 다니시는 분들 보니 짐작은 갔어요.”

처음엔 레이가 엘과 케이를 잘 데리고 다니지 않아서 귀족까지는 아니고 그냥 부잣집 따님인 줄 알았다.

크레하가 사라진 뒤 다시 레이의 밀착 전담 수호 기사가 된 둘은 루이반에 있을 때보다 더 철저히 마님을 지켰는데, 이들이 레이의 정체를 눈치챈 건 두 사람 때문이었다.

귀한 집 여식이라 전담 하녀를 붙여 주었다고 하기엔 하녀들이 지나치게 깍듯했다. 심지어 길이 험한 곳이면 먼저 나서 에스코트까지 척척 하며 다니니 보통의 하녀라고 여기긴 힘들었다.

그 덕에 소포니악 사람들은 레이가 귀족이라고 대강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지만 레이가 본인의 정체를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해 모른 척 넘어가고 있었다.

“뭐야, 괜히 쫄았잖아.”

“왜요. 무서우면 저희가 더 무섭죠.”

“맞아요. 귀족이신 줄도 모르고 그, 음, 막, 그러니까 제대로 예의를 갖추지도 못했고…….”

귀족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건 당연했다. 아무리 헬라라고 해도 수도만큼 신분제가 철저한 곳이 아닌 데다가, 귀족 자체도 드물다. 더불어 웬만한 사람들도 모를 귀족 접대 예의를 빈민가 사람들이 알고 있을 리도 없는 노릇이다.

“괜찮아. 너희가 나한테 무례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귀족식 예의를 몰랐다고 해도 저들이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저버린 일은 없었다. 고마움에 대한 감사나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도리를 항상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불쾌한 일이 있었다면 자신이 미리 차단을 했을 것이다.

“다른 귀족을 만나도 이만큼만 하면 돼.”

레이의 말에 다들 가벼이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귀족이라니.

“우릴 이렇게 챙겨 주시는 분이 알렉스 님 말고 또 누가 있겠어요.”

“진짜 특이하신 거예요.”

“저희한텐 알렉스 님이 황제나 다름없어요.”

리체가 작게 속삭이듯 레이를 황제로 칭하면서 웃었다. 황족을, 황제를 섣불리 입에 올릴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흠흠. 어휴. 그 발언 무서운 거 알지?”

“헤헤.”

“그래도 기분은 좋네. 그럼, 기분 좋으니까 보상 갑니다.”

레이가 주머니에서 필레가 준 선물을 꺼내 들었다.

“소포니악 집정관이 빈민 돌보라고 예산을 내렸네? 너희 집, 이거로 다 고치자. 집에 비가 줄줄 내린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야?”

집정관이 여기까지 돌볼 리 없다. 그는 빈민가 사람들을 벌레 취급했고 어떻게든 자기 도시에서 없애지 못해 안달인 사람이었다.

게다가 저런 값비싼 목걸이를 빈민가를 고치는 데 쓰라고 줬다? 어떤 상황인지 눈에 훤히 보였다.

“알렉스 님, 당신 정말 대단하신 분이에요.”

티아가 눈물을 글썽였다.

***

시끄러웠던 하루를 마치고 레이는 늦은 밤 게이트를 열어 라미엘을 보러 왔다. 오랜만에 라미엘의 품에 안긴 레이는 그의 양손에 볼을 붙잡힌 채 물었다.

“왜 그래요?”

라미엘이 레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더니 이내 손을 놓았다.

“……왜 말 안 했습니까.”

“네? 아아. 이마?”

레이가 전적으로 하는 일이다. 괜히 나섰다가 자신의 도움 없이도 혼자 잘 해 나가는 레이만 우습게 보일 수도 있을까 봐 속은 타는데 나설 수가 없었다.

연락을 늦게 받은 게 가장 아쉬운 부분이었다. 헬라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아무리 빨리 소식을 보내도 최소 한 시간 반은 걸리니 소식을 들었을 땐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후였다.

‘소식이 너무 늦어.’

이 정도로 게이트 이용 허가가 날 리도 없으니, 미칠 노릇이다.

“별로 다친 것도 없는걸요. 라엘이 나설 만큼도 아니었어요.”

레이가 멀쩡한 이마를 보이며 괜찮다고 해도 라미엘의 심기는 영 불편해 보였다.

레이는 방긋 웃으며 그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마음이 풀리는 유일한 특효약에 라미엘이 스르르 인상을 폈다. 하지만 그의 기억에 남은 인상은 결코 펴지지 않을 것이다.

“레이, 일은 어때요?”

“소포니악 집정관, 아마 내일 소포니악 오면 깜짝 놀랄 거예요. 사실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벼르고 있거든요. 내가 나설 것도 없을 것 같아요.”

레이는 말을 할 때마다 테이블 위 시계를 흘끗 쳐다봤다. 왕복 게이트 이용 시간이 너무 짧아서 말을 한 번 할 때마다 시간을 확인하게 된다.

“고생했어요. 이제 곧 돌아오겠네요.”

“네. 라엘은 어때요?”

레이의 질문에 라미엘은 마그스너 영애와 첫 대면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이전에, 알렉스께서 공작 부인이 되시기 전에 말입니다. 연회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중에 정말 귀족이신 분이 있는가. 여자는 작위 안 주지 않느냐고요. 그 이후로 종종 떠오르던 말이었습니다. 아마 공작 부인께선 이 부조리함을 알고 계셨던 거겠죠.”

그때의 케이틀린은 미처 몰랐다. 그런데 레이는 여성도 작위가 필요하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던 것이다. 케이틀린은 비로소 레이가 이전에 했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제게 필요한 건 예전부터 지금까지 작위, 단 하나였던 겁니다. 제가 힘껏 돕겠습니다, 공작 각하.”

“안 그래도 그 일로 레이에게 허락받고 싶은 일이 생겼어요.”

또, 또 뭔데, 뭐길래 내 허락을 받아. ‘단둘이 2탄’이면 정말 가만 안 둬.

“작위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 여성 말고도 여러 방면에서 이야기를 들어 봐야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엘, 혹시 케이틀린하고 둘이서 그 사람들을 만나겠다는 이야기?”

“그렇게 될 일은 잘 없겠지만 혹시라도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미리 말해 두는 겁니다. 더 좋은 다른 방안이 있다면 레이가 알려 줘요.”

법안 발의자로서 라미엘은 당연히 대상자들을 만나야 하고, 케이틀린은 여성들이 남성을 만나기 불편해하는 부분을 해결하면서 법안의 필요성을 더 설득력 있게 보일 수 있는 존재였다.

그리 자주 일어날 일은 아니지만 필요 상황에선 둘이 다니는 게 가장 좋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나니, 남녀 둘이 붙어 있는 꼴이다.

당사자도 그렇지만 마그스너 후작 부부에게도 레이에게도 어려울 일이 될 것이기에 고사하고 다른 방안을 찾고자 했지만, 따로 다니기에 케이틀린은 법안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부족했고 라미엘은 남자라는 점이 계속 걸렸다.

“흐음…….”

그의 말을 듣고 레이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라미엘의 성정을 보아 무슨 사달이 날 것이라는 걱정은 크게 되지 않았다. 레이가 철석같이 그를 믿고 있는 것도 크게 한몫했다. 더불어 케이틀린의 대쪽 같은 성격도 알고 있어 혹시나 하는 불안은 그리 크지 않았다.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이 다니다가 그렇게, 그렇게…….

상상만 했는데도 순식간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가만 안 둬, 둘 다 부숴 버릴 거야. 아주 처참하게 조져 줄 거야.

……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말이다.

바람피우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피운다. 만약 라미엘이 흔들린다면 그는 원래가 그런 사람이고 언제가 됐든 바람을 피울 것이다.

‘일찍 알게 돼서 그런 놈에게서 빠르게 탈출한 게 얼마나 다행이야.’

머리는 그런데 마음도 과연 그렇게 냉정할 수 있을까.

레이가 라미엘을 바라보았다.

‘이 와중에도 미모가 아주 번쩍이네. 미친 거야? 뭘 먹기에 나날이 예뻐져? 눈빛 봐라, 눈빛. 아주 혼자 잘났지. 지금이야 미모로 리담을 씹어 먹고 있는 것 같지? 나이 먹어 봐라. 온 세계를 씹어 먹을 거다.’

레이는 속으로 끙끙 앓다가 물었다.

“라엘, 마그스너 후작 부부는 뭐라고 해요?”

“아직 말 안 했어요. 레이가 최우선이니까 레이 허락 먼저 받고 일을 진행하려고요.”

케이틀린은 수면 아래에서 자신과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자 하고 라미엘은 수면 위에서 귀족들을 상대해야 할 테니 자주 벌어질 일은 아니었다. 어쩌다 함께할 일이 있을 때, 그때를 대비해 미리 허락을 받아 두려는 것이었다.

‘아, 미치겠다. 라엘, 지금 표정, 눈빛 어떤지 모르지? 그치?’

살다 살다 루이반 공작이 꿀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눈치를 보는 광경을 다 본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오랜 시간 라미엘의 온갖 모습을 다 봤던 윌포프나 테일러, 하다못해 라미엘의 모친이 살아 있었어도 보지 못했을 표정일 것이다.

세상 유일하게 단 한 사람, 레이알렉시스에게만 향하는 눈이다.

“잠시만 기다려요. 금방 다시 올게요.”

게이트 시간이 다 되었다. 레이는 급히 게이트를 통해 사라졌고, 빈자리엔 온기만 남았다.

‘게이트를 다시 열려고 하나?’

라미엘은 잠자코 레이를 기다렸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녀는 한참이 지나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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