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집착
“예하!”
헤덴은 갑작스레 대신전 집무실로 불쑥 찾아온 레이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가 조련사야, 내가 아무 때나 오라고 했지만 이 시간은 좀 너무한 거 아니냐?”
“죄송해요. 그런데 사안이 너무 급해서 왔어요. 아직 예하께서 주무시지 않을 것 같기도 했고요.”
지난번에 말한, 전화처럼 대단한 이세계 정보라도 생각이 난 걸까 싶어 헤덴의 얼굴에서 짜증이 사라졌다.
“뭔데, 무슨 일인데 그러냐.”
“저한테 주신 라미엘 전용 왕복 15분 게이트, 시간제한 없는 걸로 바꿔 주세요.”
이게 미쳤나.
백 마디 말보다 헤덴이 지은 표정 한 번에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늦은 시간에 불쑥 찾아와 대뜸 이래서 정말 송구합니다만, 너무 긴급한 상황이라서요.”
모두가 자신 앞에선 쩔쩔매기 일쑤였다. 그나마 한 공간에 있으면서 안면을 계속 익혀 온 대신전 신관들이나 다른 이들에 비해 조금 덜 거북해하는 정도였다.
그 대단한 황제라는 녀석도 자신 앞에 경외를 표하는데 어디서 튀어나온 망아지 같은 녀석이 저를 이렇게 편하게 생각하는 걸까.
“너는 내가 말만 하면 게이트를 열어 주는 문지기인 줄 아느냐?”
헤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레이가 말했다.
“대신전에 도둑이 들어 연구 자료를 훔치면 어떻게 할까요? 귀한 자료실에는 CCTV를 달아 도둑이 누군지 알아야 하겠죠?”
“시, 뭐?”
“이번에 생각난 이세계 과학 발명품은 영상 기구입니다!”
뭔가를 원할 때마다 정보상이 정보를 팔 듯 레이는 툭툭 한국의 정보를 발설하곤 했는데, 이번 역시도 그런 상황이었다.
“야, 이 녀석아. 넌 대체…….”
“저 정말 너무 급하단 말이에요오오. 살려 주세요, 예하!”
저를 무서워하지도 않고, 불편해하지도 않고 경외감이라곤 눈곱만큼도 안 보인다. 마치 자신을 동네 할아버지 대하듯 하는데, 헤덴으로선 인생 처음 겪는 일이었다.
라미엘도 자신을 불편해하면서 틱틱대지만 그런 그조차도 경외하는 게 자신이다.
어린 시절부터 특수하고 뛰어난 능력 탓에 일찌감치 대신전 후계로 정해져 쭉 존경을 받고 자랐다. 그 누구도 자기 위에 있어 본 적이 없었다. 거기에 자기 연구 분야에만 푹 빠지는 외골수 성격, 까칠한 성미까지 더해져 가까운 사람도 없었다. 헤덴이라는 존재를 지칭하자면 멀고도 먼 당신이었다.
그런 제게 ‘게이트’ 같은 대단한 걸, 시장 가판에서 덤으로 과일 하나 달라고 하듯 요구하는 기가 막힌 놈이 다 있다니.
그런데 짜증 나는 건 저 기가 막힌 놈이 가져오는 이세계 정보라는 미끼가 말도 못하게 달콤하다는 것이었다.
평소의 저답게, 평생의 자신처럼 미간에 주름 한 번 잡고 내치면 그만인데 강아지 같은 눈을 해서는 졸라 대 마음이 흔들리니 딱 환장할 노릇이었다.
“제가 아가를 심하게 사랑해서요.”
“말 안 해도 안다. 이 시간에 달려와 기껏 한다는 소리가 그따위 요군데 모를 것 같으냐.”
라미엘 같은 녀석이 그런 게이트를 퍽이나 좋아하겠다 싶었다. 그 녀석의 성정을 생각해 보면 아무리 서로 사랑한다고 해도 자기 영역을 남이 섣불리 침범하는 것을 질색할 놈이다.
자신의 평생 연구를 한순간에 완성시킬 수 있는 귀하디귀한 이세계 정보 제공자인 레이의 요청이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원하는 대로 해 주긴 했는데, 이번엔 아예 시간제한 자체를 풀어 달라니.
라미엘을 걱정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른으로서 어린애를 돌봐야 한다는, 헤덴에겐 몹시 야트막하게 느껴지는, 세간에서 말하는 일말의 도리가 마음에 걸렸다.
“솔직히 아가 전용 게이트, 그거 아가한테 족쇄 아니냐? 너 집착인 것 같은데?”
헤덴의 말에 레이가 즉답했다.
“제가 집착하면 아가는 더 좋아할걸요?”
이 녀석, 살짝 제정신이 아닌 모양인데.
헤덴이 진심으로 짜증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헤덴의 인상은 냉한 편이었다. 반듯하고 잘생긴 외모가 차디찬 표정과 발언에 가끔 묻힐 때도 있는데, 그럴 때면 사람들은 알아서 몸을 사렸다. 성질 더러운 노인네의 심보가 틀어졌다는 신호이기에 알아서 잘 피해야 했다.
그래서 수석 비서인 토마가 안색이 항상 핼쑥하고 위병이 나 있는 것이었다. 직속 비서니 헤덴의 성질머리를 고스란히 받아 내고 달래야 했기 때문이었다. 대신전 내 연봉 1위는 그야말로 피땀으로 얻는 성과였고 그의 연봉을 적다고 생각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 자신이 미간을 이리 찌푸리고 있고 냉기를 폴폴 날리는데도 아가 조련사는 꿈쩍도 않고 징징대고 있는 것이다.
“예하께서 힘드실 만큼 자주 안 쓸…… 거란 말은 솔직히 못 하겠네요.”
“너, 뭐가 그리 당당하냐? 내 신력 끌어다 쓴다는 말을 하면서?”
“그야 다른 누구도 아닌 헤덴 예하시니까요.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데요. 제가 하루에 고작 게이트 몇 번 쓴다고 해도 그분껜 티도 안 날걸요.”
당사자를 앞에 두고 제삼자를 칭하는 것처럼 하는 레이의 칭송에 헤덴은 헛웃음소리를 냈다.
“……아가 조련사, 너 빨리 돌아가.”
헤덴이 게이트를 열어 레이를 쫓아내려는데 그녀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말했던 전화나 오늘 말씀드릴 CCTV 등에 대해서 좀 더 상세하고 더 자세히, 제가 알고 있는 한도에서 그 기계들의 원리까지 말씀 다 드리고 갈게요! 그 외 생각나는 정보 같은 것도 전부 다!”
아마도 한국 지식으로 따지자면 문과생이고 과학 기술 앞에 문송할 레이였지만, 알고 있는 최대한의 모든 이과적 지식을 털어 낼 각오를 했다.
***
“늦었네요.”
레이가 라미엘의 앞으로 게이트를 열고 나타났다.
“미안해요. 많이 늦었죠?”
어스름히 새벽빛이 밝아 올 정도로 늦은 시간이었다.
“라엘, 여태 안 잤어요? 피곤하겠다.”
“괜찮아요. 이 시간까지 잘 깨어 있으니까. 어차피 레이가 없으면……. 무슨 일 있던 겁니까?”
레이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라미엘을 꼭 껴안았다.
“헤덴 예하랑 담판 좀 짓고 오느라 늦었어요.”
“대신전에 다녀왔어요?”
“네.”
레이가 살짝 힘을 주어 라미엘의 몸을 밀자 그가 그녀를 안은 채로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런데 라엘. 당신 나 없으면 못 자요?”
“어차피 레이가 없으면…….”
방금 전 라미엘이 삼킨 뒷말이 신경 쓰였다.
“내 걱정 말고 레이는 레이 일만 신경 써요.”
“……맞구나.”
매일 같이 있으니까, 같이 자니까 그가 아직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우리 빨리 자요.”
“레이, 대신전에서 뭘 하고 온 거예요?”
“라미엘 전용 왕복 게이트 시간제한 없애고 왔어요. 그러니까 이제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돼.”
아침이 오기 전까지 라미엘이나 물고 빨면서 있으려고 했는데, 자신이 계속 소포니악에 있는 동안 제대로 못 잤을 라미엘을 생각하니 그건 미뤄야 할 것 같았다.
“그 인간, 아니 예하한테 이 시간에 가서, 하루도 안 되는 찰나에 그런 대단한 걸 받아 왔다고요?”
“내가 가진 모든 귀한 걸 다 털고 온 조건이에요.”
앞으로 정보를 조건으로 헤덴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 못 한 이야기는 앞으로 대가 없이 차츰 다 하기로 했으니까. 하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앞으로 라엘은 밤에 나와 계속 있게 될 거예요. 밤이 아니라도 자주 올 거고, 당신 가만 안 둘 거야.”
허튼 생각이 들 틈도 없이 계속 찾아오겠다는 레이의 말은 앞서 이야기한 라미엘의 제안을 허락한다는 말이었다.
“라엘, 앞으로 당신 일정 사전에 나한테 알려 줄래요? 내 일정은 알죠?”
레이가 게이트 사용을 하고 있는 사실을 아는 건 항시 마님과 같이 있는 엘과 케이, 몰래 마님을 수호 중인 그림자 기사 둘, 그리고 윌포프, 테일러, 크레하인 최측근 소수 일곱 명뿐이다.
라미엘이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 때나 게이트를 열어 나타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대강 그의 스케줄을 알아 뒀다가 틈이 날 때마다 온다는 뜻이었다.
“네. 레이 일정, 알아요.”
레이의 스케줄은 루이반에 착실히 보고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가 루이반을 떠나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보안도 허술하고 혹시 모를 위험에 노출될 일이 많아 더 신경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레이는 루이반 가솔들의 걱정도 덜어 줄 겸, 자신의 행적을 알 수 있도록 대강의 스케줄을 언제나 우편으로 보내 알리고 있는 중이었다.
“라엘, 당신 일정 보냈다고 안심하지 말아요. 그건 어디까지나 참고 자료고 나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날 거야. 아무도 날 막을 수 없어. 이 세상 사람들이 나한테 게이트 있는 거 다 알아도 상관없으니까 라엘은 각오하는 게 좋을 거예요.”
자신을 숨 막히게 옥죄겠다는, 집착 향기 짙게 나는 레이의 발언에도 라미엘은 마음에 든다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헤덴에게 호언장담한 레이의 예상대로였다.
“내일 밤까지 내 일정 정리해 둘 테니, 레이가 와서 가져가요.”
밤에 오라는 말을 하면서 눈빛이 이렇게 뜨겁게 타오르면 각오하라는 소리인가?
“……라엘, 오늘 안 잘 거예요?”
라미엘이 몸 위에 있는 자신을 토닥이듯 쓰다듬고 있다고 여겼는데 어느새 드레스 리본을 풀어내는 중이다.
“레이 잠옷 갈아입는 걸 돕는 거예요.”
담백하지 않은 손길로 어루만지듯 옷을 벗겨 내는 라미엘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라엘, 그 저기, 나 지금 당신이랑 딱 붙어 있는 거 알죠?”
당신이 하는 말이랑 당신 가지랑 서로 너무 달라요.
라미엘이 레이를 꼭 껴안고 몸을 굴렸다. 자세가 완전히 반대가 되었다. 등 뒤에 닿은 푹신한 침대에서 라미엘의 향기가 났다.
“레이야말로 내 잠옷 벗기는 거 언제까지 할 예정입니까?”
상체가 훤히 드러난 라미엘이 제 옷자락을 가리키며 묻는다.
“……음, 일단 라엘이 내 거라는 표시를 좀 확실하게 남겨 놓고, 남은 거 마저 전부 벗겨 보고 난 다음에 어떻게 할지 생각할래요.”
레이의 말에 라미엘이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대신전으로 가기 전, 15분 왕복 게이트를 이용했기에 다시 원래 있던 소포니악 숙소로 돌아간 레이는 케이와 엘에게 대신전을 다녀오겠단 말을 남기고 베롬으로 향했다.
대신전을 가는 이유는 게이트 때문이라고 언질을 주었으니 머리 좋은 두 사람은 마님이 어떻게든 공작님과 함께 있다가 올 것을 예상했을 것이다.
“으흠, 잠깐. 잠깐만, 라엘.”
레이에게 입술을 묻던 라미엘이 레이의 요청에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 잠은 재워 줄 거죠?”
“……노력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