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소포니악 사람들
필레가 쫓겨났다.
정확히는 그만두겠다며 자진해서 물러났지만, 최악으로 몰린 여론에 쫓겨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포니악 전체에 집정관에 대한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퍼졌다. 그가 업무를 위해 관사로 쓰는 집이 열네 채나 되는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사람들을 더 화나게 한 건 집정관이 아예 소포니악을 떠나 수도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소포니악 집정관이 수도에서 출퇴근을 하고 있다는 것도 황당할 노릇인데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수도 집값이 비싸다는 사실은 리담 전체가 다 아는 일이었다. 그 비싼 집값을 피해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헬라로 사람들이 모이면서 헬라가 수도 다음가는 도시가 된 것이다. 그런데 필레가 무슨 돈이 있어서 수도에서도 그 좋은 동네에 커다란 집을 마련했다는 말인가.
사람들의 추궁에 필레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돈을 많이 번 것이 무슨 죄냐고 펄쩍 날뛰었지만, 그 돈을 어떻게 번 것이냐는 말에 도시 예산을 아껴서 남은 돈으로 집을 샀다는 황당한 소리를 했다.
“이게 왜 죄입니까? 난 정당하게 가져간 겁니다! 예산을 훔친 게 아니라, 그걸 아껴서 남긴 거라고요! 이 도시를 위해 15년이나 고생한 나한테 겨우 이 정도도 못 해 줍니까?”
저게 맞는 말인가, 사람들이 긴가민가해할 만큼 필레의 태도는 너무나도 당당했다. 원래 도시의 세금 운용 권한은 집정관 소관이니 어떻게 쓰든 상관없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의 도시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이른바 ‘행정’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한 사람들인지라, 오히려 당당하게 나오는 필레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할 말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며 필레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럼 폭설을 위해서만 쓰라고 황실에서 내려 준 예산, 그건 어떻게 했습니까?”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날카로운 질문을 했다.
“뭐?”
“폭설에 무너지고 부서진 시설들은 전부 정비가 안 됐고, 그 때문에 크게 다친 사람도 있습니다.”
폭설로 크게 다친 사람이라면 루이반 공작 부인이다. 필레는 굳이 그 일을 물고 늘어지는 군중 속 남자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얼마 전에 시설 보수를 하다 빈민가로 보내진 놈들이었다.
“그건 다 해결했어! 네놈들이 일을 제대로 안 해서 그런 것 아니야!”
“저흰 시키신 대로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그전에 정비를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렸지만 듣지 않았잖습니까?”
“무슨 소리냐! 너희가 일을 똑바로 안 한 것이면서!”
필레의 말에 남자들은 지난번에 레이가 주고 간 서류를 내밀었다.
“이건 황실에서 보낸 예산 관련 서류입니다.”
“뭐, 뭣? 황실 서류? 그, 그게, 그게 어떻게 네 손에……. 어딜 감히 황실을 칭하느냐! 황실을 들먹이면 사형이란 걸 모르는 게야? 글 모르는 사람들만 있다고 그깟 종이로 사기를 치고 있는 거지!”
필레가 발까지 동동 구르며 화를 냈다.
“제가 내용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마치 그가 그럴 것을 예상했던 것처럼 군중 속에 있던 티아가 손을 들며 나섰다.
“여러분, 이번 주 수업은 잠시 뒤로 미루고 며칠만 일단 이것부터 읽어 보자.”
며칠 전, 레이가 양성소를 찾아와 부탁한 일이었다. 다른 진도까지 잠시 미루고 이것부터 읽을 수 있게 해 두라는 특이한 부탁이었다.
알렉스 님의 청이기도 하고 그녀가 절대 허튼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기에 모든 학생들은 일언반구도 없이 바로 그 부탁 아닌 부탁을 들어주었다.
레이는 시설 관리를 하다가 빈민가로 쫓겨난 남자들에게도 무언가를 전해 주었고, 자신이 직접 나서지는 않았지만 뒤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이때를, 지금을 위해서 알렉스 님이 그렇게 움직였구나.’
알렉스 님에게 이제 보여 주어야 할 때였다.
“황실은 이번 폭설에 특별 예산을 편성해 보충 세금을 내리니, 이것으로 시설을 정비하고 절대 제국민들에게 피해가 없도록 각별히 신경 쓰라고 하셨습니다.”
양성소에서 가장 습득 속도가 빠른 티아가 나서서 서류를 읽었다. 낭독이 끝나자 사람들이 다시금 소란해졌다.
“시, 시끄럽다! 네가 막 지어 낸 이야기일 줄 어찌 아느냐!”
사람들의 소란에 필레가 티아의 전문성을 놓고 꼬투리를 잡았다.
“모르시나 본데, 필경사 양성소 학생이에요.”
티아가 나서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그녀의 신원을 확인해 줬다.
“뭐? 뭔 양성소? 필경사? 그딴 게 어디 있어?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필레의 말은 또 한 번 군중의 분노를 지피는 데 큰 힘을 발휘했다. 본인이 허가해 설치된, 생긴 지 한 달이 넘어 가는 양성소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 그가 소포니악에 관심이 없다는 방증이었다.
“이, 이렇게 날 못 믿으니 내가 억울해서 못 하겠네. 그만둘 테니, 어디 너희끼리 잘들 해 먹어 봐라!”
자신 말고 마땅한, 뾰족한 집정관 후보가 없기에 필레는 큰소리를 치고 그만둘 수 있었다.
어차피 이 일도 시간이 지나면 어영부영 잊을 것이고 집정관이 없으니 도시는 쓰레기 꼴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뒤늦게 자신을 눈물바람으로 찾게 될 테니 그는 전혀 두렵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수도 집에서 몇 개월 잘 쉬다 오면 그만일 일이었다.
황실 예산 보고? 정보 길드가 형식적인 보고나 올리면 끝일 일이라고 했으니 별거 아니다.
그렇게 필레는 소포니악 집정관 자리를 버렸고, 그 자리는 공석이 되었다.
전례 없는 사건에 헬라의 파칸이 한걸음에 소포니악에 왔다. 필레의 사퇴가 사달이 나긴 한 모양이었다.
이 큰일을 벌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빈민가 사람들이었다.
필레에게 억울하게 해고당하고 재산까지 뺏기고 빈민가로 내몰린 자들과 기존에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이 적극 나서서 집정관을 끌어내린 사건이었다. 이 일로 빈민가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달라지게 되었다.
기존에는 손도 대기 싫은, 사회에서 처리해야 하는 곳으로 여겨지던 빈민가가 처음으로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 여론을 만들고 온갖 불법적인 일을 저지른 정황이 가득한 집정관을 몰아냈다.
이 사실은 빈민가 사람들의 자존감과 자존심을 높였고, 소포니악 사람들에게 저들 역시도 자신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그 레이디 때문에 우리가 정신을 차렸네.”
필레의 부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에 중년 여성 한 명이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레이디? 아아, 그 검은 머리에…….”
“맞아. 그분이 집을 안 물어봤다면 이렇게 큰일인 줄 영영 모를 뻔했잖아!”
‘그 레이디.’ 눈치 빠른 양성소 사람들은 아직 레이의 정체가 아무에게도 드러나지 않은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녀가 귀족이란 걸 알리고 다닐 생각도 없었지만, 실수로라도 절대 그 사실을 알리면 안 될 것 같았다.
만약 레이가 수도 귀족이라는 걸 알면 저 사람들은 수도 귀족인 자신을 다치게 한 필레가 싫어서 그녀가 이 사달을 냈다는 편견에 휩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람들에겐 수도 귀족들은 신분이 낮은 자를 멸시한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등의 일종의 편견이 있었다. 그렇기에 레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수도 귀족’이라는 편견 때문에 그르게 생각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레이가 직접 밝히기 전까지 절대 비밀로 해 주자는 눈빛을 나눈 빈민가 사람들은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하는 검은 머리 레이디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몰래 어깨를 으쓱했다.
그 시각, 검은 머리 레이디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빈민촌 공사를 감독하는 중이었다.
필레가 남기고 간 보석을 담보로 빈민가 수리를 시작했다. 혹여나 나중에 문제가 될 일을 가정해 관련한 일을 모두 서류로 남기고, 청렴하고 성실한 집정관의 표본인 델마를 증인으로 세웠다.
모두 마을 광장으로 나가 파칸 앞에서 필레를 성토하느라 정신없는 지금이 몰래 나오기에 적기였다. 거기에 아마 인생 처음으로 만나 볼 귀족인 파칸까지 와 있으니 더더욱 여긴 올 일이 없을 것이다.
공사 기간은 한 달이었다. 한꺼번에 전체를 바꿀 수 없으니 일단 가장 심각한 곳부터 하나씩 순차적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부족한 자금은 레이의 사비로 지원하고 차후에 새로운 집정관이 올라서면 그때 빈민가 지원에 대해서 논의를 할 생각이었다.
“……이쯤이면 되겠지?”
“네. 이대로 진행하면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마님.”
“엘, 왔어?”
소포니악의 일이 끝나려고 했다. 델마한테 받아 온 황실 지시 서류도 돌려받았으니, 남은 건 제로석 광산 관리뿐이다.
“예, 이 서류는 다시 라 헬라 집정관께 드리면 되는 거죠?”
“응, 수도로 돌아가는 길에 돌려주고 가자.”
그때 빈민가 입구가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여기인가.”
“네, 그렇습니다.”
레이가 뒤를 돌아보니 빈민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필레 성토대회가 끝난 모양이었다.
“어? 알렉스 님? 여긴 어쩐 일이에요?”
“여기 계셨었어요?”
레이가 라 헬라로 간 줄 알고 있던 사람들이 그녀를 반겼다.
“집은 어때? 괜찮아?”
레이의 질문에 다들 즐거워하며 대답했다. 집 같지도 않은 집에서 살다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지붕 아래 누워 있자니 천국 같다는 말에 레이가 방긋 웃었다.
“전부 수리하려면 조금 시간은 걸리겠지만 불편해도 참아 줘.”
“하나도 안 불편해요!”
짧게 이야기를 나누던 레이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덩치 좋은 낯선 남자를 쳐다보며 고민에 빠졌다.
‘저 남자, 낯이 익은데 어디서 봤더라.’
남자도 레이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피차 서로를 조심히 관찰 중인 상태였다.
‘저 사람은 누구지? 본 적이 있었던가.’
헬라의 파칸, 조이먼은 빈민가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있는 여자를 보며 계속 머리를 굴렸다.
깊게 눌러쓴 모자 탓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으나 목 부근에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을 보아하니 낮에 소포니악 사람들이 말한 ‘그 레이디’인 듯싶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저 레이디는 제법 오랜 시간 이곳에서 본인 나름의 힘으로 도시를 돌보고 있는 듯 보였다. 사람들이 하고 있는 말을 듣자하니 이곳에 사는 것 같지는 않은데 대체 누구일까.
조이먼의 보좌관도 생각해 내려 애를 쓰는 분위기였다.
세 사람은 겉으로는 평온한 표정을 지었지만 서로를 기억해 내기 위해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아, 이런. 인사가 늦었습니다. 헬라의 파칸, 조이먼 루보이즈입니다.”
여자는 수도 억양을 구사했고 ‘레이디’라 칭해지고 있었다. 하여 조이먼은 상대가 수도 귀족일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자신이 먼저 정체를 밝히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레이디께서 소포니악에 도움을 많이 주셨다 들었습니다. 헬라를 대표해 감사드립니다.”
이쯤 인사를 했으니 상대방도 자신의 정체를 밝힐 차례였다. 레이디는 살짝 쭈뼛한 손길로 모자를 조금 올려 썼다.
‘어? 저 얼굴…….’
보좌관 세든이 모자 틈으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기억해 냈다.
‘아! 맞다, 생각났어! 저 사람, 작년 대연회 때 마녀라고……. 루이반 공작하고 결혼한, 아! 루이반! 루이반 공작 부인!’
수도의 레이디 정도가 아니라 ‘루이반’ 공작 부인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