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마무리
상대의 정체에 세든이 기함하며 빨리 조이먼에게 알리려는데 레이가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제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같은 일을 했을 겁니다. 이리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파칸. 알렉스 아틸입니다.”
아틸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조이먼은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아틸이라니.’
루이반 공작에게 황제가 붙여 준 호칭이 아닌가. 그의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그런데 왜 공작 부인은 아틸이라고 자신을 칭하고 있는 걸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루이반이라는 대단한 이름이 있는데.’
조이먼이 머리에 떠오른 말을 하려는데 모자 속 레이의 푸른 눈이 번뜩였다. 마치 그 단어를 입에 올리지 말라는 듯이.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상대가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 일단은 장단에 맞춰 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조이먼은 튀어나올 뻔한 공작 부인이란 단어를 삼키고 뒷말만 했다.
“그, 공, ……인께서 왜 여기에.”
“우연한 계기로 소포니악을 알게 되어 잠시 머물고 있답니다.”
“우연한 계기요?”
그때 무언가가 무너지고 뜯기는 소리가 났다. 공사가 가까이에서 진행되기 시작하면서 나는 소리였다.
“장소를 옮기는 게 좋겠습니다.”
***
“……그러니까 소문의 그 레이디가 공작 부인이시란 겁니까?”
“네, 제가 맞아요.”
소포니악엔 사람들 눈을 피해 신분 높은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곳이 없어 베르니로 오게 되었다. 파칸과 함께 가겠다는 긴급 연락에도 베르니는 완벽한 준비로 손님을 맞았다. 루이반의 저력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다.
“제 신분을 알면 그들이 불편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숨기게 되었습니다. 계속 그러려던 건 아니었고, 일이 해결되면 말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밝히고 필레를 잡으려 했는데, 사람들이 예상보다 크게 분노해 빠르게 그를 털어 버린 덕분에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빈민가 사람들은 레이가 귀족인 걸 알고 있지만 루이반인 것은 모른다. 대신 살아오면서 빠르게, 착실히 쌓은 눈치로 레이가 귀족이라는 사실을 외부에 비밀로 해 주고 있는 중이었다.
“일이 해결되면, 이라고요?”
파칸의 말에 레이는 대답 대신 제 이마를 가리켰다.
“저도 집정관의 관리 부실에 상처를 입은지라.”
레이는 그동안 소포니악 집정관과 있었던 일들을 파칸에게 차근차근 알렸다.
“……그래서 제가 조금 크게 다친 거랍니다.”
공작 부인의 동그랗고 하얀, 매끈한 이마에는 희미한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말을 듣기로는 제법 크게 다쳤다고 하던데, 이 모습을 보니 일부러 다친 척을 하고 집정관의 비리 사실을 끄집어낼 수단으로 삼은 듯 보였다. 실제 크게 다쳤다고 한들, 루이반 정도라면 특정한 치유 마법으로 말끔히 고쳤을 것이다.
‘호오. 제법…….’
흥미로운 일이었다. 수도의 귀족이 자신과 전혀 관련 없는 일에 직접 나섰다는 것도 그렇지만 자기 사비를 털어 가며 빈민가를 돌보고 있다는 사실도 관심이 가는 이야기였다.
따지고 보면 소포니악 길 정비도, 빈민 구제도 헬라의 파칸인 그가 나서야 하는 일이 맞았다. 다만 파칸이 직접 움직인다는 이야기는 해당 도시 주민들이 뽑은 집정관을 무시하는 행위로 비칠 수도 있어 조심해야 했다.
도시의 대표를 스스로 뽑는다는 사실은 일부 도시민들의 자부심이었다. 그래서 집정관을 건드리면 추천한 자신을 건드리는 것이라 믿는 사람들도 있어, 파칸들은 최대한 시끄러운 일은 피하려고 했다.
이러한 이유를 내세워 일일이 도시의 상황을 확인하고 처리하기 귀찮은 속내를 소도시 존중과 자율성이라는 이름 뒤에 감추는 파칸도 더러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황실 예산까지 이리해 버리는 배짱은 대체…….’
도시 관리자들이 부정을 저지르는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황실에서 내린 예산까지 이렇게 착복하는 배짱 좋은 집정관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황실’이다. 황실이란 이름에 겁을 먹고서라도 똑바로 할 법한데, 어떤 의미에서 참 대단한 인물이긴 했다.
파칸은 귀족이고, 황실과 접촉하는 일이 없지 않기에 황실에 대한 경외를 가졌다. 그렇지만 집정관은 사정이 달랐다. 준귀족 취급을 받고 대연회에 초대가 되는 중요 인물이지만 그뿐이었다.
황실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거의 없어 일반 제국민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황실의 무서움, 무거움이 잘 와닿지 않아 이런 짓을 벌였으리라.
“그런 사람이 15년을 해 온 겁니까.”
보통 자신의 도시가 낙후되거나 잘못되면 집정관부터 갈아치우는 게 도시민인데, 어찌 된 일인지 소포니악은 그 긴 시간을 잘도 참아 왔다.
“그들이 뽑았으니 뭐라 할 말은 없습니다만…….”
파칸의 말에 레이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누가 그럴 줄 알고 뽑았겠습니까. 방금 하신 말씀은 파칸께서 하시기에 조금 무책임한 것 같습니다.”
집정관이 하는 행정 업무가 도시 사람들을 비롯한 도시 전반의 관리라는 것을 이제 막 파악한 사람들인데, 일을 잘하고 못하고를 어떻게 알았을까.
소도시 집정관의 행정 부재를 감독하는 건 그 도시 전체를 관리하는 파칸의 역할이다. 따지고 보면 소포니악은 헬라 파칸령인 셈이다. 라미엘이 라비던 저택을 비롯한 각지 공작령을 진두지휘하는 것처럼 파칸에게도 그럴 의무가 있다.
“도시 자율성을 존중하시는 파칸의 마음은 잘 알겠으나, 자유는 본인에게 있는 의무를 다했을 때나 누릴 수 있는 권리라고 봅니다. 소포니악 집정관은 본인 의무를 소홀히 했으니 파칸께선 그가 자유라는 권리를 누리게 해선 안 됐지요.”
레이 역시도 평생 모르던 일이었다. 한국에 가지 않았더라면 정치가 뭔지 행정이 뭔지 감도 못 잡았을 것이다. 한국에서 사람들이 광장에 나와 목소리를 내고 까마득한 권력자를 질타하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땐 큰 충격을 받았다.
자유와 의무는 사람들이 사회라는 것을 형성하고 그 위에서 살아가는 이상 따라야 하는 순리였고, 정치는 누군가를 지배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었다. 권력자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고,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하더라도 관심만 제대로 가지면 됐다.
저 관심을 갖는 게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소포니악이 그걸 지금 해내고 있었다. 필레가 쫓겨난 후 고작 하루지만 사람들은 타 지역과 본인의 도시를 돌아보고 살피기 시작했다. 스스로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그런, 아.”
조이먼은 레이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옆에 있던 보좌관 세든 역시도 놀란 눈치였다.
이런 말을 듣고 잠시 당황하는 얼굴을 보니 헬라의 파칸은 본인이 배우고자 하는 것은 누구에게서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인 듯 보였다. 만약 방금의 소리를 마냥 불쾌하게만 들었다면 당황한 표정을 짓는 게 아니라 화를 냈을 것이다.
“소포니악 집정관 추천까지 얼마나 남았지?”
조이먼의 물음에 세든이 답했다.
“석 달 후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석 달이라.”
애매한 기간이었다. 집정관을 당장 새로 뽑기에 소포니악엔 그럴싸한 후보가 없고, 그렇다고 세 달을 기다리자니 그간의 행정이 공백이다.
당분간은 파칸이 소포니악 집정관 업무까지 해야 할 듯했다. 그리고 당장 필레의 부정을 조사하고 합당한 처벌을 받을 수 있게 재판에 회부하는 등 정비를 해야 하니 돌아가 참모진들과 긴급회의를 열어야 한다. 한동안은 여유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할 터다.
그간 자율성을 이유로 허투루 관리해 온 대가가 몰려온 것이지만 이제라도 파악하게 되어 다행이었다. 만약 이 일이 황실까지 흘러들어 갔다면 대륙 전체가 뒤집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공작 부인, 부인께 소포니악은 물론 헬라를 대신해 감사 말씀 드립니다. 공작 부인께서 저희 도시에 큰일을 해 주셨습니다.”
조이먼의 인사에 레이가 화답했다.
“아니라고 겸손 떨지는 않겠습니다. 파칸께서 하신 인사, 감사히 받을게요.”
소포니악의 일이 마무리되는 듯했다.
***
여성에게도 작위를 주자는 법 하나 상정하는 데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들이 많은 줄은 몰랐다.
부부 둘 다 작위가 있는 경우 자녀의 작위 승계나 따르는 성은 어찌할 것인지, 재혼하게 된다면 그 후의 일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등 그로 인해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일들까지 모두 고려하고 신경을 써야 했다.
한 번에 완벽하게 모든 것을 포용하는 법을 만들 순 없겠지만 최대한 잡음이 없도록 관련 법안과 대안도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라미엘의 법안은 길게 봐야 하면서도 흐지부지하게 회기를 넘어가게 하지 않도록 최대한 빨리 입법해야 하는 까다로운 일이 되었다.
“한집에 있는데 밤에 잘 때나 얼굴을 보고 사네.”
라미엘의 얼굴은 밤이 되어서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낮에는 둘 다 일로 바쁘기 때문에 집무실에 있어도 각자 할 일만 했고, 조금 숨을 돌릴 만하면 라미엘이 밖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느라 길게 대화를 나눌 틈도 없었다.
“오늘은 라엘이 좀 쉴까 했더니만…….”
레이는 한국에서 10년을 살다 온 데다 여성 작위에 찬성하는 사람들만 주변에 있다 보니 가끔씩 여론과 사회 분위기가 어떤지를 잊곤 했다.
현재, 여성 작위에 대한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그리 좋은 평은 못 받는 법안이었다. 바깥일을 하는 사람과 작위를 받아 가문을 이끄는 것은 남자뿐이라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한 번에 쉬이 바뀔 수가 없었다.
한편, 여성 작위 승계를 지지하는 이들이 주변 반대자들의 눈을 피해 몰래 단체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있다고 한다.
이 단체가 진짜인지 아니면 지지자들을 낚아 정체를 확인하려는 가짜인지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기에 라미엘은 현재 루이반 저택을 비운 상태였다.
레이가 조금 한가해지니 이번엔 라미엘이 정신없이 바빠지고 있는 형국이었다.
“마님. 윌포프입니다.”
노크를 한 집사가 레이의 허락에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르아넬로 가문에서 마님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르아넬로에서? 무슨 일이지. 별일 있다는 얘긴 못 들었는데.”
레이는 집사가 내민 편지를 받아 들고 봉투의 발신인을 확인했다. 조금 삐뚤삐뚤하고 동그란 글씨로 써진 「피아나」라는 이름이 보였다.
“어머나. 우리 피아나잖아!”
글 배운다더니 벌써 편지까지 쓸 줄 안단 말이야? 내 동생, 기특하다!
레이는 빠른 손놀림으로 인을 뜯고 내용물을 꺼냈다.
「언니, 보고 싶어. 레이, 잘 있어? 많이, 많이 보고 싶어! 결혼식 때 언니가 많이 바빠서 제대로 못 놀아서 슬펐어. 언니, 많이 바빠? 내가 만나러 갈까?」
어린 동생이 쓴, 애정이 담뿍 묻어나는 편지에 마음이 찡 울렸다.
결혼 전 레이의 유일한 사랑둥이였던 피아나는 르아넬로에서 열었던 피로연을 결혼식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결혼하고 나서 피아나를 한 번도 못 봤잖아.”
술에 취하면 그렇게 찾던 동생이었는데 결혼을 하자마자 라엘로 옮겨 타고 까맣게 잊은 것처럼 지냈다.
뒤늦게 미안한 기분이 들어 레이는 바로 서랍을 열어 편지지를 꺼내고 펜을 집어 들었다.
‘광산 가는 날이랑 양성소 일정만 피하면 되겠지?’
“내가 가는 것보단 피아나가 오는 게 더 좋겠어. 그때 저택 구경도 제대로 못 시켜 줬던 것 같은데 이번에야말로…….”
“실례합니다. 마님.”
그때 보조 집사가 다급하게 두 사람을 찾았다.
“무슨 일이지?”
“르아넬로에서 소식꾼이 왔습니다. 마님께 꼭 알려야 할 긴급 서신이 있다고 합니다.”
윌포프가 마님께 피아나의 편지를 전달하는 동안 도착한 르아넬로 소식꾼이었다. 하인이 아닌 루이반의 집사가 소식을 전한다는 건, 소식꾼의 신분 확인을 마쳤다는 이야기였다.
“르아넬로에서?”
긴급 특별 우편을 발송한 게 아니라 소식꾼을 보냈다는 건 당장 확인이 필요한, 보통의 일이 아니라는 소식이란 말이었다.
레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빨리 가져와.”
그녀의 명령에 문밖에서 대기하던 소식꾼이 집사를 통해 가지고 온 서신을 건넸다. 많이 급한지 실링으로 봉해지지도 않은 편지였다. 벌써부터 다급함이 느껴졌다.
레이는 빠르게 편지를 읽어 내렸다.
“……이게 무슨 소리야?”
에이나와 오스카의 이름으로 보낸 편지는 서두, 인사말도 없이 본론으로 들어간 짧은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