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예상 못 한 손님 (1)
「레이, 우리한테 혼난 피아나가 손쓸 틈도 없이 외부 마차를 타고 사라졌어. 급히 아이 행방을 좇고 있는데, 아마 피아나는 너에게 가고 있을 거야. 제발 피아나를 찾아 줘.」
피아나가 부모님께 꾸중을 듣고 가출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애가 사라져? 나한테 와?”
‘아마’라는 단서가 달려 있으니 이는 추측이라는 소리였다. 어린아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외부인이라고는 루이반에 있는 제 언니뿐이니 예상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가출 경로였다.
“외부 마차라고? 맙소사.”
르아넬로에서 아이의 안전을 위해 사람을 붙이거나 마차의 행선지를 알아낼 수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지금 상황을 한 마디로 정리해 보자면, 그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이 고급 드레스를 입은 어린아이가 보호자도 없이 혼자 길을 나섰다는 말이었다. 르아넬로 부부가 비싼 값을 지불하고 긴급하게 소식꾼을 통해 편지를 보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윌포프!”
다급한 레이의 부름에 문밖에서 대기하던 윌포프가 안으로 들어왔다.
“네, 마님.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당장 라비던 운송 길드에 연락해서 열두 살 여자애를 혼자 태우고 루이반에 오는 마차가 어느 것인지 찾아. 내 동생, 지금 호위도 없이 혼자 나한테 오고 있대!”
삽시간에 마님의 안색이 하얗게 질린 이유를 파악한 윌포프가 급히 문을 나섰다.
요즘에야 많이 잠잠해졌다고 하지만 부유한 가문의 어린아이들을 노린 유괴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보호자도 없이 누가 봐도 부티가 나는 아이가 혼자 덜렁 길을 돌아다니고 마차를 탔으니 그야말로 1순위 대상일 것이다.
게다가 석유 부자로 유명한 르아넬로 가문이라 마음만 먹으면 가족들 얼굴을 알아내긴 식은 죽 먹기다. 호위도 없이 혼자 마차를 탄 어린아이가 르아넬로의 막내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없던 욕심도 생길 수 있을지 모른다.
긴급한 상황에 윌포프는 루이반 기사단까지 불러냈다.
“집사장님! 여기 좀 와 보셔야겠습니다.”
급박한 상황에 하인 하나가 양손을 휘두르며 그를 찾아왔다.
“지금 급한 일은…….”
“웬 꼬마 영애가 마님이 자기 언니라고 우기면서 마님을 찾고 있습니다. 어린 영애가 보호자도 없이 혼자 있는데 위험할까 봐 쫓아낼 수가 없어서…….”
윌포프의 다급한 움직임이 순식간에 멈췄다.
아이를 무사히 데려다준 마부는 루이반에서 뜻밖의 팁까지 두둑하게 받고 커다란 저택을 나섰다.
“후와아아.”
피아나는 루이반 기사단의 각 잡힌 인사와 환대를 받으며 저택에 도착했다.
최고조로 올라 있던 긴장감이 사라지고 호위에서 순식간에 환영단으로 돌변한 기사단은 마님과 닮은, 자신들의 허리춤을 조금 넘는 작은 영애가 눈을 반짝이며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조금 머쓱해졌다.
기사단의 호위를 한 몸에 받고 있으니 누가 봐도 대단한 광경이겠지만 피아나는 유독 더 좋아하는 반응이었다.
“피아나!”
“언니!”
피아나가 달려와 레이의 품에 안겼다.
“말도 없이 집을 나오면 어떡해? 부모님이랑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너 큰일 날 뻔했어!”
“그치만 말하면 못 보게 할 거잖아. 언니 보고 싶은데.”
“누가 왜 못 보게 해? 피아나가 보고 싶다는 편지 쓴 거 보고 언니가 피아나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흐응.”
가출이다. 가출이야.
언니가 보고 싶은 것도 있었겠지만 피아나는 부모님께 혼나고 화가 나서 온 것이 분명했다.
“윌포프, 르아넬로에 소식꾼 보내 줘. 피아나 무사히 여기 도착했다고. 보아하니…… 며칠 있을 것 같네.”
피아나는 레이의 치맛자락을 쉽게 놓지 않을 것처럼 꼭 쥐고 있는 중이다. 더불어 르아넬로라는 단어를 듣자 눈에 화가 들어차는 걸 보니 오늘 당장 돌아갈 것 같지 않았다.
“예, 알겠습니다. 아가씨께서 머무실 방은 어떻게 할까요?”
손님이니 손님방이나 응접실 근처의 방을 쓰는 것이 맞는 일이지만 상대가 어린아이 혼자다 보니 주인방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두기 애매했다.
본래의 윌포프 같았으면 최대한 가까운 손님방에 알아서 모셨겠지만 지금은 마님의 어린 동생이라는 특수 상황이기에 레이의 의중이 더 중요했다.
“음, 푸엥 옆방으로 준비해 줘.”
“그리하겠습니다.”
작은 소란이 일단락되고 레이는 옆자리에 앉아 푸엥을 쓰다듬으며 간식을 먹고 있는 피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피아나, 앞으로 다신 혼자서 여기 오면 안 돼. 여기뿐만이 아니라, 어디든 절대 너 혼자 다니지 마.”
“왜? 난 마차도 탈 줄 알아. 여기까지 혼자 잘 왔는데?”
“오늘은 피아나가 운이 정말 너무 좋아서 무사히 온 거야. 피아나가 좀 더 자라면 혼자 다녀도 되지만 아직은 안 돼. 너무 위험하거든.”
“그래! 그거야, 언니! 위험하니까 나는 검술을 배우고 싶은데 부모님이 하지 말래!”
엉? 뭐가 배우고 싶어?
“피아나? 방금 뭐라고 했니? 검술?”
“응. 나 검 배우고 싶어.”
갑자기 검술이라니. 피아나는 반짝이고 화려한 것들에 정신을 못 차리는, 평범하다면 평범한 아이였다.
지금까지 검술은커녕 기사에 대한 이야기조차 언급한 적이 없었고, 비슷한 부류의 것들에 관심을 둔 적도 없었다. 레이가 르아넬로를 떠나기 전까지 검술은 피아나의 취향과 전혀 다른 범위였기에 지금의 말이 조금 의아했다.
“언제부터 검술에 관심이 있었어? 피아나 언니랑 있을 때 한 번도 그런 이야기해 본 적 없잖아.”
“얼마 전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주변에 있는 글자란 글자는 모두 읽으며 즐거워하던 피아나는 우연히 연극 대본을 보게 됐다고 한다.
기사가 주인공인 그 이야기의 주제는 통속극답게 당연히 사랑이었고, 왕실 기사가 된 주인공이 결국 왕자와 결혼해 왕비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예전에 유행했던 대본 같은데.’
꽤나 인기가 많았던 연극이었다. 작가가 기사와 검에 대해 상당한 지식이 있는 듯 관객을 홀리는 묘사와 기사에 대한 적절한 미화가 점철되어 한동안 기사 열풍을 만들기도 했었다.
‘황실 연회에서 초청까지 할 정도였었지?’
그 연극의 대본을 피아나가 읽고 기사에 빠진 모양이었다.
“나도 멋지게 검을 휘두르고 싶은데 왜 안 된다고만 하시는 거야!”
검 쓰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니 피아나가 이렇게 졸라 댈 수 있는 것이다. 르아넬로 부부가 그래, 어디 한번 해 봐라, 하고 시켜 줬다면 이틀 만에 포기했을 수도 있다.
만약 피아나가 검술에 관심을 보이거나 재능이 있다면 검사로 키우면 되니까 그것도 나쁘진 않은 결과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든 지금은 일단 피아나를 달래는 게 우선이었다.
“위험하니까. 피아나가 검을 배우다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셔서 그런 거야.”
“검사의 상처는 영광이야!”
……피아나 눈에 연극 대본이 띌 일이 없게 해야겠다.
하여튼 피아나는 르아넬로 부부의 결사반대에 언니를 찾아와 배우게 해 달라고 하려는 결심을 한 듯했다.
“언니, 언니가 나 좀 도와줘어.”
이렇게 하고 싶어 하는데 검술 그게 뭐가 어렵겠나, 우리 피아나가 하고 싶다는데 시켜 줘야지.
루이반에는 기사도 수두룩하다. 심지어 레이의 곁을 지키는 최측근의 전담 하녀 두 명도 기사다. 피아나가 원한다면 얼마든 선생을 붙여 줄 수 있었다.
“그래. 피아나, 한번 해 봐.”
레이의 허락에 피아나가 꽃이 피는 것처럼 활짝 기쁘게 웃었다.
“진짜? 진짜 허락한 거야? 꺄아아!”
방방 뛸 정도로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어지간히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부모님도 참. 이 정도로 좋아하는데 한번 시켜 주시지.’
“장비가 필요하니까 당장은 어렵고 준비되는 대로 시작하자.”
“응!”
피아나가 푸엥을 꼭 껴안으며 대답했다.
***
여성 작위를 위한 비밀 단체는 가짜였다. 남들의 눈을 피해 지지하는 자들이 모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지하는 자를 알아내기 위해 만든 것도 아니었다.
애초부터 그런 단체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결성되었다가 사라진 것도 아닌, 그저 헛소문에 불과했다.
“허탈하네요. 아예 처음부터 없던 거였다니.”
케이틀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설사 있다가 없어졌다고 해도, ‘있었다’는 실체라도 확인했다면 조금의 희망이 보였을 텐데. 어설프게 누군가의 입에서 잠시 나왔다 사라진 소문 정도라니 허무한 결과다.
어렵게 공작과 둘이서 다닌다는 허락을 받아내 처음으로 움직였는데 허탕을 친 셈이라 아쉬움에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떠도는 소문 중 가장 그럴싸해 보여서 잔뜩 기대하고 헬라까지 왔는데.’
케이틀린은 로브 후드를 더 깊게 썼다. 표정 관리가 힘들 정도로 실망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마그스너 부부는 아직 혼인하지 않은 자식의 미래를 걱정해 두 사람이 최대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방향에서 함께한다면 허락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당사자인 라미엘과 케이틀린도 처음부터 그것을 염두에 두었기에 흔쾌히 그 조건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다만 후드를 깊게 뒤집어쓰고 다니다 보니, 지금처럼 자신을 조심스럽게 유심히 지켜보는 듯한 시선을 쉽게 만난다는 단점이 생겼다. 꽁꽁 싸맨 모습이 더 수상해 보이는 일이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딱히 얼굴을 가릴 다른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음.”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이 없던 라미엘이 입을 열었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만들면 존재하게 되겠죠.”
라미엘의 말에 케이틀린이 잠시 멈칫했다.
“여태 소문은 소문으로 끝이 났습니다. 이제 소문을 찾는 것보단 이쪽에서 먼저 진실로 만드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케이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각하 말씀처럼 만들면 되는 건데 괜히 실망했네요.”
여성 작위가 수면 위로 떠오른 뒤로 수도에서는 별별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여자들이 남자들을 죽이고 작위를 차지하려는 비밀 단체가 만들어질 것이란 이야기였다. 흉흉한 소문에 남자들은 치를 떨었다.
입법 권한이 귀족에게 있다 보니 이러한 소문들은 주로 귀족들이 사는 수도 쪽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헬라에서 여성 작위를 위한 단체가 있다는 독특한 소문을 듣고 부러 여기까지 찾아왔던 참이었다.
“수도는 요즘 여러 소문으로 분위기가 흉흉할 수 있으니 여기, 헬라에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라미엘의 말에 케이틀린이 찬성했다. 수도는 위험할 수 있으니 차라리 가까운 헬라에서 움직이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공작 부인께서도 사업 때문에 헬라에 자주 오시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겠습니다.”
케이틀린의 말에 라미엘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얼굴을 가릴 정도로 후드를 깊게 쓰고 있어 아무도 보진 못했지만 찰나의 순간 공작의 기색이 말랑말랑해졌다가 풀어졌다는 건 그를 수호하는 그림자 기사만이 알 수 있었다.
“영애가 리더가 되어 단체를 만드는 편이 나을 겁니다. 나는 공식적인 루트로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죠.”
“그럼 저는 지금까지 만났던 이들을 우선으로 의중을 묻고 지하에서 진짜로 소문의 단체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할 일이 좀 더 명확해졌다.
구체적은 사안은 나중에 정하기로 하고 두 사람은 일행이 아닌 것처럼 따로따로 열차를 타고 수도로 돌아왔다.
루이반에 도착한 라미엘이 겉옷을 벗으며 저택으로 들어왔다. 그가 벗은 겉옷을 하인이 잽싸게 받아 들며 사라졌고 윌포프가 그를 맞이했다.
“레이는?”
“마님께선 동생분이신 피아나 님과 함께 손님방에 계십니다.”
“피아나?”
레이의 어린 동생이 떠올랐다. 혼자서 왔을 리는 당연히 없을 테니 르아넬로의 가족이 온 것이라 생각하고 라미엘이 물었다.
“르아넬로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아닙니다. 가문의 일이 아니고 개인적인 일로 피아나 님 혼자 오셨습니다.”
윌포프는 낮에 있었던 피아나 가출 사건에 대해 보고를 올렸다.
“위험할 뻔했군. 다행히 마부가 제대로 된 사람이었나 보지.”
“네. 마부에게 보상을 두둑이 해 돌려보냈습니다.”
“피아나, 그건 절대 안 돼!”
그때 단호하게 동생을 막는 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