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예상 못 한 손님 (2)
검도, 훈련복도 준비해 주겠다던 언니의 반대에 피아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왜애! 레이는 거짓말쟁이야아. 다 해 준다면서. 흐으윽.”
“그거 빼고 다 해 줄게. 그건 정말, 절대로 안 되는 일이야.”
“검술 가르쳐 준다며!”
“가르쳐 준다니까? 그런데 그건 안 돼. 많이 바쁘셔서 힘들어.”
“그럼 아주아주 잠깐만 해 주시면 되잖아!”
하나에 꽂히면 다른 건 통하지도 않는 어린아이의 고집에 레이의 피가 말랐다.
“너무 많이 바빠서 아주 잠깐 시간을 내는 것도 힘드실 것 같은데.”
차라리 피아나한테 훈련 장면을 한 번이라도 보여 주는 게 나으려나.
‘라엘에게 훈련을 받겠다니!’
먼저 겪은 경험자로 말하는데 이건 짚을 지고 지옥 불구덩이로 뛰어 들어가겠다는 소리다. 라미엘이 생전 다신 없을 약한 강도로 살살 해 줬다고 하는 훈련을 받다가 주마등 볼 뻔한 사람이 본인이다.
“언니, 그럼 공작님께 잘 말해 줘어.”
‘응? 누구? 무슨 님? 지금 피아나가 공작님이라고 한 거야?’
“피아나, 혹시 검술을 배운다는 게…….”
“응. 루이반 공작 각하가 리담에서 제일 세다고 그랬어. 토벌전도 나가셨고 검술 천재래. 그러니까 난 공작님한테 배울 거야.”
부모님이 왜 반대를 했는지 알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르아넬로 부부는 여자애가 무슨 그런 걸 배우냐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설사 그렇다고 쳐도 며칠이면 흥미가 식을지도 모르는 어린애 장단에 맞춰 잠깐 배우게 해 줄 수도 있는 걸 그렇게 극렬히 반대했을 리가 없다.
그들은 검술을 반대하는 게 아니었다. 피아나가 콕 집은 검술 스승이 라미엘인 것을 말렸던 것이다.
“피아나. 그, 공작님 말고도 여기엔 뛰어난 스승이 많이 있어. 일단…….”
“싫어! 공작 각하 아니면 안 돼! 난 최강자한테 배울 거란 말이야!”
피아나는 요지부동이었다. 레이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너 라엘한테 어떻게 검술을 배울 건데? 부모님처럼 공작님이랑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면서 뭘 하겠다고.’
이 말을 어떻게 잘 풀어서 해야 할지 레이가 고심하는 때, 문제의 라미엘 스승님이 등장했다.
“레이.”
윌포프가 라미엘이 왔다고 언질을 주긴 했지만 피아나를 달래느라 못 나가던 차였다.
“라엘. 어서 와요.”
레이가 일어나 라미엘을 맞이했다. 원래 같으면 다다닥 달려가 포옹에 가벼운 볼 키스라도 나눴을 텐데 피아나가 있어 자제하고 다가가 손만 꼭 한 번 잡아 보는 게 전부였다.
“손님이 있다고 들었는데.”
라미엘의 말에 레이가 살짝 자세를 바꿔 뒤에 있는 피아나를 그의 눈에 들어오도록 했다.
“피아나, 인사…….”
“고, 공작님. 공작 각하!”
레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피아나가 라미엘을 부르며 그에게 달려왔다.
“제 스승님이 되어 주세요!”
검술에 대한 열정에 공작님이 불편한 마음 같은 건 송두리째 불타 없어졌나 보다. 어쩌면 제 언니가 공작에게 말을 전하기 전에 빨리 선수를 친 걸지도.
뜬금없는 피아나의 폭탄 발언에 라미엘은 레이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말이죠?”
하하하. 라엘, 축하해요. 당신에게 두 번째 제자가 생겼네요.
“……라엘, 당신 언제쯤 한가해져요?”
***
소문을 추적하는 일을 하다 보니 라미엘의 일정은 유동적이었다. 기존 업무 일정에 틈틈이 소문 추적이라는 추가 일정이 끼어드는 일도 다반사였다.
법안에 대한 여론이 별로 좋지 않고, 그에 따라 허튼 소문들이 퍼지고 있지만 이 현상이 마냥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헛소문이 생겨나고 있는 것을 보면 관심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케이틀린이 며칠 전에 보낸 편지엔 본인은 절망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작위에 뜻을 가진 여성들이 생각보다는 많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당사자 중 수면 위의 거친 여론에 밀려 미처 내색을 못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찾을 땐 흔적도 안 보이더니.”
라미엘이 편지를 구겨 벽난로로 던졌다.
케이틀린과 주고받는 편지는 모두 태워 버리고 있다. 반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혹여나 헛소문이라도 만들어질까 조심하고 있는 중이다.
“여론이 워낙 안 좋잖아요. 지금 작위를 받겠다고 하면 남자 죽이는 마녀 취급을 받을 지경이니 어떻게 말을 하겠어요. 그래도 이렇게 모이고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이에요.”
라미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 말대로 엄청난 용기를 내어 모여 준 사람들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다 잘 될 거예요.”
레이가 응원하면 정말로 그렇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기운이 났다.
“레이 일은 어때요?”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요. 킹크랩 휴업기도 정해졌고, 어제 제로석 시설 공사 감독도 잘 하고 왔고 조만간 황실이랑 대신전에서 시찰하러 올 거예요. 아!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필레가 재판에 회부될 것 같아요.”
조이먼이 보낸 소식을 듣자하니 횡령의 정황이 너무도 명확해 조만간 재판이 열릴 것 같다 말했다. 이대로 묻히리라 예상하고 있던 필레에겐 날벼락 같은 소식일 것이다. 파칸까지 등장해 일이 제대로 터질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공작님.”
집무실로 윌포프가 찾아왔다.
“들어와.”
그가 서신을 내밀며 보고했다.
“몬순 소공작께서 공작님을 뵙고 싶다는 요청을 보내왔습니다.”
윌포프의 말에 레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소공작이 라미엘을 보고 싶어 한다고?’
라미엘도 의아한 얼굴을 했다.
“몬순 소공작? 공작이 아니고?”
레이의 물음에 윌포프가 그렇다고 대답하며 서신을 라미엘에게 올렸다.
“명하신다면 몬순 공작께 확인을 받겠습니다.”
라미엘이 실링을 뜯고 내용을 확인했다.
“……아니, 소공작이 날 만나고 싶어 한다니 만나 보지. 알겠다고 답신해.”
“예, 그리하겠습니다.”
윌포프가 집무실을 나섰다.
몬순가라면 루이반과 전혀 접점이 없는, 같은 공작가라는 것 외에는 친분도 없고, 공적으로 엮일 일도 없던 곳이다. 그런 곳에서 만나자는 요청이 오다니 의외의 소식이었다.
레이의 기억에 몬순 소공작은 몬순 공작보다 더 확실한 사람이었다.
‘몬순 소공작이라면 2부 사냥제 때 다부졌던 그 열네 살 아냐? 케이틀린한테 제일 적극적인.’
레이는 몬순 소공작이 케이틀린과의 친분을 듣고 제게 사랑의 큐피드가 되어 달라 요청하러 온 것일까 잠시 생각했지만, 그가 라미엘을 콕 집어 말했기에 가능성을 바로 접었다.
“무슨 일이에요?”
“소공작이 법에 대해 긴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는군요.”
“어머나.”
라미엘 과 같더니 얘도 법안에 찬성하는 건가.
반대하는 입장이라면 결코 라미엘을 만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지지자로 보일까 봐 법안 반대자들은 루이반 공작과의 접촉을 자중하는 분위기였으니까.
“음, 라엘, 그런데 왜 공작이 아니고 소공작이 나서는 걸까요.”
웬만한 경우라면 가문 이름으로 보내기 마련인데 제 이름을 겉에 써 놓은 것도 특이하긴 했다.
“무슨 일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소공작이 개인적으로 날 만나고 싶어 하는 건 확실해 보이는군요.”
“응. 그러네요. 혹시 몬순가는 반대하는데 소공작이 혼자 지지해서 그런 걸까요? 궁금하네.”
***
사흘 뒤, 루이반에 도착한 몬순 소공작 카네스는 라미엘과 레이의 예상을 모두 뒤엎는 주제를 들고 왔다.
“…….”
라미엘은 최대한 짜증 혹은 화를 눌러 참으며 눈앞의 맹랑한 꼬맹이를 바라보았다.
“이게 사실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올봄엔 아이들한테 휘둘리는 운명이라도 되는 것일까. 연무장에서 작은 목검을 열심히 휘두르고 있는 피아나에 이어 몬순 소공작까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소공작은 무례한 데다 되바라지기까지 하군.”
라미엘의 차가운 표정과 냉한 말에 카네스는 움찔 굳었지만 그렇지 않은 척 꿋꿋하게 몸을 세웠다.
“그따위 말을 하겠다고 날 찾아왔다니.”
가뜩이나 법안 문제는 라미엘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주제인데, 그걸 빌미로 무례하고 허튼소리를 지껄이는 꼬마를 보자니 험악한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가려고 했다.
“케이틀린 영애와 연인의 친밀을 쌓고 계신 겁니까?”
생각할수록 기분이 더러워지는 말이었다. 법안 문제로 찾아온 줄 알았더니 저딴 헛소리라니.
라미엘의 기색이 점점 사나워지자 카네스는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이게 뭐지.’
여기 와서 천사라는 루이반 공작을 만나기까지 얼마나 자신감에 넘쳐 있었던가. 그런데 성인 남성의, 일대에 명성이 대단한 무장이 풍기는 기운은 그 자신감을 모조리 날려 버리고 있었다.
무서웠지만 물은 이미 엎질러졌고, 카네스는 이대로 절대 깨갱하고 싶지 않았다. 물려고 작정하고 왔으니 물지는 못하게 되더라도 적어도 우습게 물러나는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공작 부인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요.”
최대한 담담하게, 떨지 않고 평온을 가장하기 위해 카네스는 다리를 꼬며 말을 이었다.
“……하.”
그 말에 라미엘의 기운이 삽시간에 사나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