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예상 못 한 손님 (3)
얼핏 살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라미엘의 기에 눌려 카네스는 그다음 말을 내뱉지도 못했다.
뛰어난 머리와 천재적인 검술 실력으로 주위에서 찬사만 받고 자란 능력자가 카네스였다. 좀 더 다듬어지면 루이반 공작을 능가할 수도 있다는 세간의 평을 듣고 있었지만 아직 덜 여문, 열네 살 사춘기 아이였기에 카네스의 객기는 천재적인 두뇌를 굴러가지 못하게 하고 시야를 흐리게 했다.
몬순가 소유의 정보 길드에 케이틀린과 루이반 공작의 소문이 전달됐다. 두 사람이 비밀리에 만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아직 세간에 퍼지지 않은 데다가 당사자가 워낙 거물이기에 자칫 잘못하면 역풍을 맞을 수 있어 함부로 말을 옮기지 않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리담 내 가장 유명한 정보 길드를 세 개나 가진, 정보력으론 황실을 능가한다는 가문이 몬순가다 보니 중요한 일이 될 정보나 소문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몬순 공작에게 전달됐다.
다만 이번의 소문은 어디까지나 진위 여부가 확실치 않은, 말 그대로 소문일 뿐이고 출처가 분명하지도 않아서 공작은 무시하고 있었다.
“시국이 어수선하니 별 소문이 다 도는구나.”
그렇기에 카네스에게도 별 소문이 다 생겼다는 어투로 지나가듯 슬쩍 흘린 것뿐이었다. 자신의 아들은 가문에서 들은 작은 헛소문이라도 밖에 나가 떠드는 일이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카네스가 헬라에 갔을 때 정체를 숨기려고 작정한 듯 로브를 뒤집어쓴 두 사람의 인영을 보고 소문이 사실임을 직감한 것이었다.
‘말도 안 돼!’
케이틀린을 마음에 두고 있던 그에겐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며칠을 고민하던 카네스는 결심한 듯 루이반에 편지를 보냈다.
이건 남자 대 남자로 진지하게 확인해 봐야 할 일이었다. 라미엘의 기색에 눌리고 쫄아서 할 말도 못 할 순 없었다.
그러나 카네스가 간과한 문제는 라미엘이라는 인물이 항간의 소문보다 더 자기 아내를 아낀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카네스는 지금 공작 부인까지 건드리고 만 상황에 처했다.
“몬순가는 루이반이 아주 우스운가 보군.”
뭣 같은 헛소리를 하다하다 이젠 감히 레이까지 들먹이고 있었다.
몬순 공작에게 이 사실을 알려 가문에서 사과를 받고, 저 꼬맹이를 지하실이든 어디든 처넣어야 조금이라도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라미엘에겐 맹랑한 꼬맹이의 무례를 참아 낼 인내력 따윈 없었다.
“……당장.”
루이반 지하에 처박아 주려는데 문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안 됩니다, 아가씨!”
다급한 윌포프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어 피아나의 대답도 들려왔다.
“왜애? 스승님 바쁘셔서 계실 때 빨리 훈련받아야 한단 말이야.”
응접실 밖이 시끄러웠다. 저 소란의 원인까지 떠올리자 라미엘은 뒷목이 뻐근해지는 기분이었다.
“피아나, 안 돼! 너 정말 고집 피울 거야?”
레이의 목소리까지 들려오자 라미엘은 잠시 하려던 말을 삼켰다.
‘……레이.’
잠깐의 고민 후, 라미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신 이딴 일로 찾아와서 무례하게 굴지 마.”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얼어 있는 카네스를 스쳐 간 라미엘이 응접실 문을 열었다.
“스승님!”
피아나가 라미엘을 보며 방긋 웃었고 레이는 황급히 피아나의 입을 틀어막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방해됐죠? 얼른 데려갈게요.”
레이가 피아나를 제 품으로 잡아당기며 속사포로 잔소리를 쏟아부었다.
“피아나 요놈의 자식 진짜. 공작님은 손님이랑 중요한 말씀 나누시는 중이라니까 왜 이리 말을 안 듣니. 언니 피가 마른다! 대체 얘가 왜 이러지? 이런 애가 아닌데. 너 언니랑 얘기 좀 하자.”
피아나의 고집을 꺾지 못해 결국 라미엘은 스승으로 나섰다.
평소라면 가차 없이 거절할 일이었지만 레이를 다른 느낌으로 작게 축소해 놓은 듯한 그녀의 동생을 보니 차마 냉정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
하여 그의 인생에 레이 말고 다신 없을 제자가 생겼고 그 제자는 열심히 훈련 중이었다. 물론 훈련이라고 해 봤자 라미엘은 연무장에 얼굴만 슬쩍 비치는 정도였지만.
모든 일은 루이반 기사들이 떠맡고 있었으나 피아나는 이게 라미엘의 훈련법이라는 말에 껌뻑 속아 열심히 작은 목검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사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긴 했다. 기사들도 굳이 따지고 보면 라미엘에게 훈련을 받고 있으니까.
“괜찮습니다. 이야기 다 끝났어요.”
“네? 벌써요?”
소공작이 응접실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끝이 났다니 의아했다. 이야기 주제로 법안을 들고 와서 라미엘을 만난 것치고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다.
“윌포프, 소공작이 간다니 배웅하고 당장 몬순가에 오늘의 무례에 대한 답변 바란다고 연락해.”
무례라고? 이건 무슨 일이지?
그러고 보니 라미엘의 기색이 심상치 않다. 무언가가 넘실넘실한 것이 겨우 억눌러진 듯하다.
레이는 흘끔 응접실 안을 살폈다. 의자에 여전히 앉아 있는 소공작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쟤는 저렇게 얼어 있고 라엘은 화가 났나.’
방금 전 무례를 언급하며 몬순가에 해명을 요구하는 명령을 전달한 걸 보아 몬순 소공작이 아무래도 엄청난 실례를 한 모양이다.
몬순 소공작의 세간의 평을 생각해 보면 누군가한테 가문의 이름으로 사과할 일을 벌일 만한 인물이 아니었기에 이 상황이 더더욱 의아하기만 했다.
레이는 궁금함을 꾹 억누르고 겨우 소공작한테서 시선을 떼어 냈다.
“피아나, 오늘 훈련은 아직 부족하니 더 하고 와.”
라미엘이 피아나에게 퇴출령을 내렸다. 피아나도 공작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던지 레이가 손을 끌자 조용히 따랐다.
피아나가 머무는 방으로 온 레이는 사람들을 물리고 문을 닫았다.
“레이, 나 훈련해야 해. 왜 여기로 와?”
“피아나, 너 왜 이렇게 무례하게 굴어.”
엄하고 딱딱한 레이의 얼굴에 피아나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안 된다고 언니랑 다른 분들이 몇 번이나 말했지. 그런데 왜 고집이야.”
한 번도 본 적 없는 제 언니의 정색하는 표정에 피아나는 투정 부릴 생각을 잊었다.
“내가 뭘…….”
“공작님 중요한 일 하시는 중이라고 했어. 집사장님도, 기사들도, 언니도 모두가 다 말렸는데 피아나는 기어이 와서 실례를 저질렀어.”
모두가 피아나에게 절절매는 이유는 간단했다. ‘마님’이 애지중지하는 동생이기 때문이다.
외부 손님이 무례한 일을 저지르면 본디 적당한 선에서 일을 처리한다. 집사장인 윌포프에게까지 올라갈 것도 없이 일반 집사들, 더한 경우엔 보조 집사 선에서도 해결한다.
그럼에도 윌포프가 나서는 건 레이 때문이었다. 저들이 레이를 마님 이상으로 존중하고 있기에 그녀의 가족 역시도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게 품는 것이었다.
이것은 레이를 향한 루이반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손님으로서의 중요도가 다소 낮은 어린 영애를 상대하는 데 윌포프가 나선 것도, 기사들이 시간을 내어 귀찮은 일을 해 주는 것도 모두 순수하게 마님을 향한 호의에서 비롯됐다.
피아나가 예절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이런 것까진 아직 배우거나 파악하진 못했을 테니 이걸 갖고 뭐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의 집이 아닌 외부의 공간에서 막무가내로 굴고, 마음대로 사람들을 휘두르고 떼를 쓰는 것은 큰 결례라는 걸 알아야 했다.
“여긴 집이 아냐. 물론 집에서도 그렇게 하면 안 되지만 여기선 피아나가 더더욱 조심해서 행동해야 해. 네 마음대로 할 수 없어. 이걸 민폐라고 해. 민폐가 뭔지는 알지?”
“그치만…….”
피아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자신과 똑같은 파란 눈동자에 차곡차곡 서러움이 쌓이는 모습에 레이는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피아나가 성장하기 위해선 언제가 됐든 한 번은 거쳐야 할 일이었다.
“계속 이렇게 주변 사람들 곤란하게 만들면 언니는 당장 피아나를 집에 돌려보낼 수밖에 없어. 다신 여기로 초대하지도 않을 거야.”
레이의 말에 울음을 꾹 참으려던 피아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치만 레이나는 스승님이랑 친구처럼 지낸단 말이야……. 흐윽.”
“뭐?”
“레이나가아, 흐윽, 레이나는 막 아무 때나아, 스승님, 흐으윽, 나도 그러고 싶은 건데에.”
피아나가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레이는 피아나를 달래지 않고 옆에서 지켜보았다.
다만 물을 챙겨 주고 눈물을 닦아 주며 진정될 때까지, 아이가 서러움을 모두 토해 낼 때까지 기다렸다.
“진정됐어?”
끄덕끄덕.
피아나가 마음을 추스르는 동안 레이는 문제의 그 연극 대본을 구해 피아나가 꽂힌 부분을 찾아 읽었다.
남장을 한 여기사가 왕실 기사가 되어 왕자와 사랑을 하고 종내는 왕비가 되는, 리담에서 유행하는 전형적인 사랑 이야기였다.
이 스토리의 골조는 주인공이 은둔 중인 소드 마스터를 만나 검을 배우고 기사가 되는 것과 왕자와 연애를 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아무래도 피아나는 전자, 스승과 제자 관계에 꽂힌 듯했다.
인적이 드문,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숲속에 사는 주인공과 스승은 서로 막역한 친구처럼 지낸다. 지금과 환경이 전혀 다른 상태였다. 그러니 피아나가 읽은 대로 서로 친밀하게 예의 같은 건 따지지 않고 막 대할 수 있는 무대가 펼쳐지는 것이다.
“레이나와 스승님이 사는 곳이랑 우리가 사는 곳이 다르니까 같게 행동할 수 없어. 봐, 레이나도 왕실에 들어가면서 다른 스승한테는 깍듯하게 하잖아.”
아이가 이해할 수 있게 대본을 예시로 들어 설명하자 그제야 피아나는 연극과 상황이 다름을 인지했다. 본인이 한 일들이 아주 무례했다는 것도 깨달았다.
한국에서 돌아온 직후, 웬만한 연극은 성에 차질 않아 안 봤던 게 아쉬운 순간이었다. 연극 내용을 알았다면 진작 이런 식으로 피아나를 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루이반 사람들이 고생할 것도 없었……. 아냐, 잠시만. 아무래도 이건…….’
근본적인 문제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