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그런 시기 (1)
애초에 이런 연극이 열두 살 아이가 볼 만한 내용이던가?
기사 이야기다 보니 다치고 죽는 사람이 나오는 데다 노골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암시하는 내용도 있다. 아무리 연극이 사람 손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상황을 꾸며낸다 해도 이는 현실을 바탕으로 재창조하는 것이다.
이런 극을 아무 제한 없이 어린아이가 볼 수 있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현실과 극을 잘 분리하지 못하는 아이가 비단 피아나 하나뿐일까?
한국에서 영화나 TV 프로그램, 책 같은 매체에 선정성, 모방성 등을 이유로 나이 등급을 매겨 아이들의 관람을 제한하던 것이 생각났다. 아이들을 보호해야 하기에 그렇다는 유주의 설명에 별생각 없이 넘겼었는데, 지금 상황을 닥쳐 보니 단숨에 그 일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자신 역시도 빈민가에서 낭독회를 할 때, 자연스레 아이들을 위해서는 동화를 준비하고, 어른들을 위해 연극 대본을 읽어 주었다. 한국에서 겪던 일이 튀어나와 저도 모르게 아이와 어른의 세계를 분리한 것이다.
‘레이나처럼…….’
레이나처럼 되고 싶어서 그랬다는 아이가 단지 피아나 한 명만 있을 리 없다는 결론이 내려지자 생각이 복잡해졌다. 이건 비단 지금의 일화 하나만으로 끝이 날 게 아니다.
“……내가, 잘못했어.”
피아나의 자그마한 목소리에 레이는 생각을 갈무리하고 정신을 차렸다. 후에 머릿속을 떠도는 것들을 잘 정리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누구한테 무슨 잘못을 한 것 같아?”
“스승, 아니 공작님이랑 윌포프랑, 허디랑, 엘이랑…….”
피아나 입에서 루이반 사람들의 이름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피아나는 자신과 한 번이라도 접촉한 적이 있는 하녀의 이름까지도 모두 언급하고 있었다.
“……그리고 라바한테 떼를 썼어. 나쁘게 굴었어.”
가까운 대여섯 명 정도도 아니고 인사해 주며 스쳐 지나간 사람들까지 전부 기억을 하고 있었다.
“피아나, 사람들 이름을 모두 외운 거야?”
“응. 나한테 잘해 주는 사람들이니까 당연히 알아야지.”
“외우려고 노력했어?”
레이의 질문에 피아나가 눈에 아직 매달려 있는 눈물을 슥 닦고 소파에서 포르르 벗어나 책상에 있던 종이 한 장을 가져와 내밀었다. 종이 위엔 사람들의 이름이 동그란 글씨로 삐뚤빼뚤 가득 적혀 있었다.
“이름을 한 번씩 써 보니까 외워졌어.”
평범한 느낌이 아니었다. 뜻밖에 동생의 재능을 발견한 레이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피아나, 이거 내가 가져도 돼?”
“응. 언니 가져.”
레이는 동생이 적어 넣은 이름들을 잘 접어 챙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제 우린 피아나가 떼를 써서 곤란하게 만든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사과할 거야.”
“만나서 미안하다고 하면 돼?”
“응. 그리고 앞으로 또 사과할 일 안 하는 거야.”
“……알았어.”
레이가 피아나의 손을 잡았다. 자그마한 손에서 제법 거친 감촉이 느껴졌다.
“그런데 피아나, 레이나가 왜 그렇게 좋은 거야?”
가장 먼저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인 라미엘을 찾아가면서 레이가 문득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왜 피아나는 유독 레이나에게 꽂혔을까.
레이의 질문에 피아나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레이랑 내 이름을 섞은 것 같아서 좋아. 난 언니가 제일 좋거든.”
***
“라엘, 고마워요. 그간 피아나 챙겨 준 것 많이 귀찮았을 텐데. 그리고 진작 못 쳐 내서 미안해요.”
모두에게 사과를 하고 용서를 받고 나니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아마 훈련보다도 더 고됐을 일정에 피아나는 진작 나가떨어져 잠이 들었다.
“레이가 사과할 게 뭐가 있어요.”
“내가 보호잔데 떼쓰기 전에 제대로 잡았어야 했잖아요.”
피아나가 길어야 일주일 정도 머물 것이라 예상했기에 그럭저럭 넘길 수 있던 일이었다. 그전에 레이가 나서서 아이를 훈육해서 이제는 끝이 난 일이다. 남은 건 피아나가 조만간 제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런데 피아나와 관련해 궁금한 게 있다면서요, 그건 뭡니까.”
레이는 라미엘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
“이게 그 이름이에요.”
레이가 피아나가 이름을 적은 종이를 꺼내 펼쳐 라미엘에게 내밀었다.
“내가 가족이라 특별하다고 느끼는 걸까요?”
“일단, 뭐든 가르쳐 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가 보기에도 피아나에게 가능성이 있는 모양이었다. 재능을 단정할 순 없지만 지금 보기엔 확실히 비범한 구석이 있었다.
“음, 그렇다면 문학이랑 검술 선생부터 찾아볼까요?”
“그것보단 아카데미가 더 나을 것 같은데. 입학 가능한 나이가…….”
“열세 살부터 입학 가능할 거예요. 피아나는 한 달 뒤면 열세 살이 되고요.”
고급 학술원인 아카데미는 의무적인 교육 과정은 아니었다.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 자녀들이 미래의 인맥을 쌓거나, 사교계 진출을 위해 혹은 사회성을 기르기 위해 선택적으로 진학을 했다.
이는 리담에 있는 유일한 어린이 교육 기관이며 3년 과정으로 가을에 학기가 시작됐다. 학생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며 역사, 문학, 수학이나 기본 검술 등 학습 전반과 사교계 예의 등을 배웠다.
그중 뭐 하나라도 피아나와 맞는 게 있다면 그 과목에서 빛을 발할 것이다.
‘어? 잠시만. 아카데미?’
연령 제한과 아카데미.
레이의 머리에 두 단어가 동시에 떠올랐다.
피아나나 소공작처럼 아직 덜 여문 아이들을 모아 학습과 사회성을 가르치는 전문적인 기관이 한국에 있었다.
아이들은 한 공간에 모여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았고 그 공간에서 어른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했다. 그곳에서 연령 제한의 이유를 가르치고 사회에 나서기 위한 기초를 배운다.
그리고 그곳을 한국에선 학교라고 불렀다.
“……레이?”
갑자기 골똘히 생각에 잠긴 레이를 라미엘이 불렀다.
“무슨 일인가요? 피아나 일은 분명 아닌 것 같은데.”
그의 물음에도 레이는 쉽게 입을 열기 어려웠다.
리담에 학교를 세우자? 아니면, 연령 제한 규정을 만들자?
이 두 가지가 전부 필요한 것 같은데, 이건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하지?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뭘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레이가 방금 전에 떠올린 것들을 천천히 라미엘에게 이야기했다.
연령 제한과 의무적인 교육 기관.
레이가 말한 건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하다는 다소 묵직한 주제였다. 더불어 생소하기도 했고.
유괴 같은 신변 보호 외에 아이들의 정서적인 부분도 보호가 필요하다는 말은 한 번에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런 라미엘의 반응을 레이는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내 말은 아마 누구든 쉽게 받아들이진 못할 거예요.”
리담의 누구라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본인도 그랬었으니까.
한국에 가게 됐을 때, 처음에 이해가 안 되던 일들은 그들의 삶을 함께 살아가면서 깨닫게 되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삶에 아주 쉽게 영향을 받고, 흔들렸다. 그 영향은 아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인 경우가 많았고, 대부분 좋지 않은 결과를 야기했다.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자극의 한도는 어른과 다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아이는 어른들의 것을 자신이 가진 세계로 빠르게 흡수하며, 그것은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른이 먼저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음, 피아나를 보면 연극 속 주인공이랑 자신을 동일시해서 문제를 일으켰잖아요. 몬순 소공작도 봐요. 소문에 소공작은 절대 그런 멍청한 짓을 안 할 것 같았는데 연극의 남자 주인공처럼 나섰잖아요. 자신의 연적을, 푸흡, 만나려고.”
“……레이, 그 대목에서 웃음이 나옵니까.”
“미안해요. 어린 친구가 비장하게 와서 그런 소릴 했다고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그만.”
아이에겐 거창한 일이었지만 어른 입장에선 웃음 혹은 짜증을 동반하는 일이다. 지금 일들이야 그저 누구도 다치지 않은, 해프닝 정도로 넘어갈 수 있으니 다행인 일이다. 상황을 제재할 어른이 있었고, 아이는 다행히 그것을 알아들었다.
만약 카네스가 라미엘의 경고를 눈치채지 못하고 선을 넘었다면, 사랑에 눈이 멀어 연극처럼 어설프게나마 칼부림이라도 저지를 수도 있는 일이다.
“이어서 말하자면 만약 저 아이들에게 영향을 준 연극이 <불같은 사랑>이었으면 어땠을까요.”
큰 줄거리에 수반하는 곁다리 이야기로 불륜, 기억 상실, 살해 사주 등 온갖 자극적인 게 다 나왔던 연극이다.
“소공작은 내 등 뒤에서 칼을 겨누고 피아나는 나와 사랑에 빠졌겠군요.”
“그거예요!”
라미엘이 정확하게 레이가 말한 맥락을 짚어 냈다.
“……확실히 생각해 볼 일이긴 하네요.”
“맞아요. 난 언젠가 생길 우리 아이가 크기 전까지 절대 저런 거 보게 하고 싶지 않거든요. 남의 애도 안 봤으면 좋겠고요. 그러니까 지금 어느 정도 기반을 마련해 둬야 좋을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레이는 항상 엉뚱했고, 독특한 생각을 했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 상상도 못 한 영역에서 무언가를 찾아낸다는 의미로 그랬다.
그리고 그때마다 라미엘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역시도.
‘정서적으로 유해’한 것이라고 해서 무슨 말인지 완벽히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레이가 두 사람을 예를 든 덕분에 바로 어떤 점이 좋지 않은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이들이 사는 영역은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다.
문제는 ‘아이의 정의를 어떻게 내릴 것인가’ 하는 단순한 것부터 ‘아이들에게 유해한 것들’에 대해 사람들이 인지해야 한다는 복잡한 것까지 그 범위가 넓다는 점이다.
전자는 비교적 쉽게 결정할 수 있다고 해도 후자는 방금처럼 적절한 예를 들어 그 필요를 설명해야 하니 거의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어렵네요.”
“네. 어려워요. 그래서 생각을 조금 더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
레이의 표정을 보니 앞으로 틈만 나면 여기에 매달려 있을 듯 보였다. 라미엘이 부드럽게 웃으며 다독였다.
“레이, 천천히. 천천히 해요. 급할 것 없어요. 당신 이것 말고도 바쁜 사람이잖아요.”
맙소사. 우리 공작님 또 예쁘게 웃으면서 나 유혹하네. 당장 잡아먹어 달라는 신호이신가.
라미엘에게 입술을 쭉 내밀려는 순간 피아나가 처음 왔던 날이 생각났다.
“어? 어어. 맞아.”
피아나가 있어서 라미엘에게 평소 같은 행동을 못 하고 손만 잡고 말았던 그 순간이.
라미엘도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주변에 있던 모든 어른들도 다들 당연하단 반응이었다. 생각해 보면 아이 앞에서 부모는 진한 애정 표현을 하지 않는다. 은연중이지만 아이 앞이라 자제하는 것이다.
“다들 무의식중에 아이를 보호 하고 있잖아요. 그 누구도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막, 심하게 깊은 키스를 하지 않는 것처럼.”
“그건 아이라서가 아니라 누구 앞에서든 안 하는 개인적인 영역인 것 같은데요.”
“음, 그것도 그렇지만 개인 영역에 속하는 가족 간이더라도 어린아이들 앞에선 행동을 조금 더 조심하게 되는 게 있잖아요. 피아나 왔을 때 내가 라엘한테…….”
레이가 라미엘의 볼에 쪽 소리가 나게 키스를 남겼다.
“이렇게 못 해 준 것처럼요.”
그때 못 한 것까지 다 한다며 레이가 몇 번이나 그의 볼과 입술 위에 가볍게 입술을 찍었다. 비처럼 내리는 키스에 키스로 화답을 하며 라미엘이 물었다.
“어떤 말인지 잘 알겠어요. 그래서 레이는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 겁니까.”
오로지 ‘아이’만을 생각하게 하는 대표적인 예시가 떠올랐다.
한국에는 어린이날이 있었다. 가장 날씨가 좋은 계절에 오로지 아이들을 위해 하루를 비우는 휴일이었다. 인식과 제도를 한 번에 바꿀 순 없지만 그런 날이 제정된다면 아이들을 좀 더 관심 있게 돌아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부터 조금씩 아이들을 챙겨 볼래요.”
막연하지만 어렴풋하게나마 방향이 잡히는 느낌이었다. 한 번에, 한 방에 자리 잡게 될 일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놓고 천천히 호흡해야 할 중요한 일이 생겼다.
“……일단 당장은 아니더라도 내가 관할하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근무일 중 하루를 특별한 날로 지정할까 해요.”
거창한 일을 너무 섣불리 시작하려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좋은 방향으로 한 걸음 움직이는 것 같아서 조금은 뿌듯한 심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