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그런 시기 (2)
이틀 뒤, 몬순 공작가에서 사람이 왔다. 몬순가 소속의 집사장이었다.
그는 정중히 두 분께 소공작의 무례를 사과한다는 몬순 공작의 인사를 전하며 사죄의 의미로 몬순가 정보 길드를 언제든 이용할 수 있게 하겠다는 선물도 가져왔다. 소공작이 다시 방문해 직접 사과드릴 수 있게 한다는 뒷마무리까지 완벽했다.
정보 이용으로 상대의 화를 먼저 달래고 상대가 차분해진 뒤에 아이를 내보내는 것을 보니 공작이 어린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런 순서로 조치를 한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이것 역시도 은연중에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어른의 행동이었다. 아마 공작 본인은 이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을 테지만.
몬순 공작은 후계 교육을 철저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부족했던 것 같다며, 아들이 그런 일을 벌였는지 몰랐다고 앞으로 더 주의를 기울이겠다는 사과를 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더 이상의 잡음 없이 넘어가게 하기 위해 가문의 명줄이나 다름없는 정보 길드 이용을 사과 선물로 내놓았다.
몬순가가 황실이 찔러 대도 꿈쩍도 않을 정도로 굳건히 지켜 내던 정보 길드까지 내어주는 걸 보니 그의 귀에 제로석 소식이 닿았다는 것을 라미엘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물론 케이틀린과 같이 다닌 일이 극히 드물었음에도 정보를 찾아낸 몬순가의 정보력은 분노와 별개로, 카네스가 들이닥쳤을 때 실감했던 차였다.
“어제 막 열다섯 생일을 맞은 아이라 어리고 철이 없어 그랬다고 용서를 바라는군요.”
“저런. 소공작 생일이 생일 같지 않았겠어요.”
화가 나고 불쾌한 일이었지만 몬순 측에서 이 정도로 눈치 보는 모습을 보아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앞으로 이 비슷한 일이 또다시 벌어지면 가차 없을 것이다.
“가만, 이제 막 열다섯?”
열다섯이라면 딱 그 나이 아닌가.
‘몬순 소공작, 한창 자신 안의 흑염룡이 날뛰는 시기잖아?’
카네스 몬순에 대한 세간의 평은 예의 바른 신사 그 자체, 좀 더 자라면 여자 여럿 울릴 미인, 명석한 수재 등이었다. 긍정적인 평가 일색인 소공작이란 걸 생각하면 몹시 이질적인 일화였으니, 아마도 이 일은 카네스의 평생 이불 발차기감이 될 것이다.
‘어휴, 세상에. 내가 다 창피해. 숨고 싶어지네.’
레이는 카네스가 안쓰러워질 지경이었다.
“라엘, 소공작이 사과하러 오면 너무 무섭게 하지 말아요. 원래 그 나이 땐 다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고 그러잖아요.”
“레이 당신을 걸고넘어졌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습니까.”
“으음. 그 정도는 어린 날의 치기라 생각하고 봐줘요. 소공작이 와서 직접 사과할 거고, 몬순 공작한테도 사과는 충분히 받았잖아요. 소공작 본인도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을 거예요.”
이 건은 뇌가 있는 사람이라면 하루만 지나도 자다가 일어나 이불을 뻥뻥 발로 걷어찰 일이다.
“제가 좋아하는 분의 소문을, 풉, 듣고 왔, 푸흡. 어유, 귀여워라.”
루이반 공작 앞에서 저런 말을 하다니. 이건 열다섯 사춘기 시기에만 가질 수 있는 패기 아닌가.
“그게 귀엽다고요?”
도저히 이해 못 할 표정으로 라미엘이 물었다.
“케이틀린이 절레절레하는 것도 이해가 조금 가네요. 소공작이 좀 더 커서, 조금만 늦게 영애한테 빠졌어도 잘 됐을 텐데.”
케이틀린이 말하는, 울리기 딱 좋은 귀엽게 잘생긴 얼굴이 아니던가. 더불어 평판도 좋고. 공작가에, 이대로만 큰다면 다 가진 남자가 될 것이다. 라미엘처럼.
“난 저 나이 때, 창밖 내다보면서 울고 그랬는데.”
이유도 없었다. 창밖을 보다가 꽃잎이 흩날리면, 낙엽이 쓸쓸해 보이면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그걸 보며 눈물을 흘리는 자기 자신의 감성에 취해 또 울었다. 비교적 얌전하게 왔던 사춘기지만 그래도 그걸 생각하면 창피해졌다.
“그런데 저 소공작은, 세상에, 루이반 공작을 상대로, 푸흡흡!”
레이가 계속 옆에서 키득거리고 있는 모습에 라미엘은 몬순 소공작을 떠올리기만 해도 올라왔던 짜증이 가시는 기분이었다. 대체 뭐가 그리 귀엽고 웃긴지는 모르겠으나 레이가 즐거워하는 것 같으니 그거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때 라엘이 엄청 화난 거 알고 나도 긴장했거든요. 혹시 이 일로 라엘이 몬순 공작과 틀어지면 어쩌나 하고. 별일 없어서, 라엘이 잘 넘겨 줘서 너무 다행이에요.”
“큰일이 날까 봐 걱정했습니까?”
레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자연스레 자신이 앉아 있는 의자를 뒤로 빼 책상 사이와 공간을 만들었다. 레이는 넓어진 틈을 비집고 들어가 라미엘의 다리 위에 앉으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솔직히 말하면 아주 조금, 정말 조금이에요. 개미 더듬이 정도.”
그 말에 라미엘이 웃음을 터트렸다. 레이가 짐작하는 예전의 라미엘 같았으면 바로 카네스를 가둔 뒤, 몬순가에 연락해 사태를 수습하라고 했을 것이다.
라미엘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쌓인 것들이 녹아 나와 지금의 사태에 점잖게 대응했지만, 결정적으로 그가 참은 이유는 레이 때문이었다. 레이가 가지고 있는 건 전부 좋은 것이어야 하니 자신도 좋은 사람이어야 했다. 기존에 천사를 가장하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천사가 된 것이다.
레이 한정의 천사가 제 품에 안긴 소중한 존재를 단단히 팔로 감싸 안았다.
“라엘, 혹시라도 갑자기 당신 안에 검은 무언가가 날뛰는 것 같으면 최대한 빨리 봉인 해제해요. 나이 더 먹고 중2병, 아니 사춘기 오면 난감하거든요.”
카네스는 복도 많다. 중2병이 제 나이에 왔으니 그게 얼마나 축복인가. 다 큰 성인이 자신 안의 흑염룡을 풀고 날뛰면 추하기만 하다. 뭐든 때가 있는 법이었다.
레이는 말을 마치고 라미엘의 입술에 가볍게 자기 입술을 부딪었다.
라미엘은 저 나이에 토벌전을 나가 성인들 사이에서 험하게 굴렀으니 한창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감성이 날뛰는 경험을 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이 어여쁘고 소중한 사람의 과거가 너무도 아픈데 그 시절을 보듬어 줄 수 없다는 게 속이 상했다.
“왜 레이가 그런 표정을 짓습니까.”
검은 무언가의 봉인이 풀린다느니, 사춘기니 하는 엉뚱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는 지난날 기도식 대기실에서 보던 빛이 감돈다.
“가끔 조금 더 일찍 당신을 만났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자신의 모든 것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 주고 싶다는 눈빛. 열 마디 말보다 더 진한 진심이 라미엘의 속을 울린다.
“레이가 말한 것처럼 그때 내 안의 검은 게 날뛰고 있었다면요?”
“예뻐서 다 받아줬을 거예요. 라엘은 보나 마나 몬순 소공작보다 더 귀여웠겠죠. 어쩌면 나도 그런 상태일 수도 있겠다. 사춘기 아이 두 명이 날뛰었겠네.”
레이가 다시 라미엘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숨결이 살짝 입 안에 머금어졌다 사라진다.
“생각해 보니 피아나도 지금 딱 그 시기 직전이네요. 그래서 더 떼를 썼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사과 이후 기가 팍 죽은 피아나를 보고 레이보다 더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바로 기사들이었다. 시무룩해져서 집에 돌아가겠다는 피아나를 위해 조금만 더 배우고 가라고 권유까지 할 정도였다.
힘드니까 하루 이틀 배우고 그만둘 줄 알았지만 끈기 있게 배우는 피아나가 내심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하여 피아나는 아직도 르아넬로에 돌아가지 않고 검술을 배우고 있었다.
“제법 습득이 빠른 편입니다. 가르치면 다 받아들여요. 좀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긍정적으로 보입니다.”
피아나를 주로 전담한 기사인 톰이 했던 말이다. 라미엘처럼 확 튈 정도의 천재적인 수준은 아니더라도 이 분야에 재능이 있다는 소리였다.
“레이 닮았는지 열심히 하더군요.”
특히나 근성만큼은 최고였다. 한 번 시작하면 반드시 끝을 본다며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했다.
“네. 안 그래도 피아나 손바닥이 거칠어져서 놀랐어요.”
레이는 훈련받을 때 우는소릴 해 가며 했는데 피아나는 그런 일도 없었다. 기사들이 아이에게 맞춰 강도를 살살 해 주는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기초 훈련이 마냥 쉬운 게 아닐 텐데도 열심인 모습이었다.
“아카데미에서 빨리 답변이 왔으면 좋겠어요.”
피아나의 일도 마무리가 되어 갔다.
***
“정말 죄송했습니다.”
카네스의 정중하고 진중한 사과였다. 깍듯이 몇 번이나 사과하는 소공작은 얼굴과 귀뿐만이 아니라 목까지 벌겠다. 뒤늦게 흑염룡을 잠재우고 나서 이불을 엄청 찼는지, 얼굴이 조금 핼쑥하기까지 했다.
소공작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하도록 레이는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으나 당신을 거론한 죄도 있으니 응당 사과받으셔야 하는 게 맞다며 카네스가 자리를 권했다.
“사과는 충분히 받았으니 이제 고개 드세요.”
레이의 말에 카네스가 쭈뼛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한순간 치기에 눈이 멀었지만 바로 정신을 차리고 진심을 담아 사과하는 걸 보니 며칠 전의 실례는 호르몬이 불러온 한순간의 참사가 분명해 보였다.
‘앞으로 평생 절대 루이반 쪽은 쳐다도 안 보겠지? 일생일대의 흑역사를 쌓았는데.’
몬순 소공작은 이제 루이반 응접실만 떠올리면 비명을 지르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과를 받고 냉큼 돌려보낼 수는 없으니 손님 접대를 해야 했다.
“차 한잔 마시고 가요. 소공작이 루로보차를 좋아한다고 해서 준비했답니다.”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
루이반 공작은 내내 별말이 없었다. 다만 그 엄청난 기를 누르고 있는 걸로 보아 자신을 용서하고 사과를 받아들였다고 카네스는 짐작했다.
냉한 공작 대신 옆에 앉은 공작 부인이 공작을 달래듯 손으로 가벼이 팔을 두드리며 미소를 지어 주었다. 더 이상 이 일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에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졌다.
레이의 신호에 윌포프가 차를 내리고 하인이 간단한 다과를 내었다.
“마님, 죄송합니다만…….”
윌포프가 차를 내려 올린 후, 손님 접대 중인 걸 알면서도 레이에게 귀띔을 주었다.
“혹시?”
윌포프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에서 소식이 오면 어떤 상황이건 빠르게 알려 달라고 말을 해 뒀었다.
“두 분, 차 나누세요. 난 잠시 실례 좀 할게요.”
레이가 양해를 구하는데 카네스가 입을 열었다.
“저 혹시 두 분께서 괜찮으시다면…….”
머리 좋은 소년은 지난번 피아나의 응접실 방문 사태와 주변 이야기를 듣고 루이반 저택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을 했다.
대단한 무례를 저질렀다는 걸 뒤늦게 알고 내내 잠도 못 잤던 그였다. 사죄의 뜻으로 뭐든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제가 아가씨의 상대가 되어 드릴까요?”
카네스의 말에 레이는 적잖이 놀랐다.
‘아가씨 상대라니.’
그때 잠깐 봤던 걸로 어떤 일인지 다 눈치를 챘다는 말이었다. 소문에 보통이 아니라더니 그 진가가 여기에서 드러나고 있다. 라미엘도 제법인데, 하는 눈빛이었다.
“물론 루이반 기사님들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실력이오나 기초 검술 정도라면 저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카네스의 말은 고맙지만 피아나를 덥석 맡기기에는 상대가 과했다. 몬순 소공작에게 검술을 배우라니. 어차피 내일이면 피아나가 떠날 것이라 굳이 지금 맡길 것까지도 없었다.
“소공작의 제안은 정말 고맙지만 사과는 충분히 받았으니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마음만 받겠어요.”
레이의 만류에도 카네스는 조심스레 재차 권유를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뭐라도 하고 싶은 듯 간절해 보였다. 소공작은 뭐든 해야 자신의 죄를 덜 수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레이는 잠시 연극 내용을 떠올렸다.
‘그 연극 시작이 친구였던가.’
주인공이 동네에서 가장 검을 잘 다루는 친구에게 검술 기초를 배우다가 스승인 마스터를 만난 거였지.
연극과 비슷한 상황이니 피아나는 좋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공작이 뭐라도 하고 싶어 하고 있으니 잠깐 맡겨 볼까.
“그럼 아주 잠시만 부탁할게요.”
레이의 말에 카네스가 안심하는 얼굴로 사과하러 온 뒤 처음으로 살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