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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17화 (117/160)

117화. 광산 시찰

피아나가 르아넬로로 돌아가는 날, 레이가 편지를 봉투에 넣어 봉했다.

피아나를 아카데미에 보내자는 내용을 담은 편지였다. 연극 대본은 다신 피아나 눈에 띄게 두지 말란 이야기도 크고 굵은 글씨로 썼다.

다음 학기 아카데미 개원 때 피아나는 입학 가능한 나이가 되니, 가서 이것저것 다 배우게 할 생각이었다.

여학생에겐 따로 검술 수업을 가르치지 않는 아카데미지만, 여학생 검술반에 대한 문의에 인원과 예산 조건이 만족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답변이 달려 있었다. 한마디로 돈 달라는 소리였다.

루이반과 르아넬로는 장학금 명목으로 얼마든지 아카데미를 후원할 자금이 있으니 수업 하나 개설해 달라고 요청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면 난 최선을 다했어.’

편지는 피아나가 집으로 돌아가서 르아넬로 부부에게 전달하게 될 예정이었다.

카네스 몬순 소공작의 수업이 제법 마음에 들었던지 피아나는 그가 돌아간 이후로도 그날 배운 일을 조잘조잘 떠들어 댔다. 아무래도 이쪽에 흥미가 제대로 붙은 모양이었다. 앞으로 루이반 기사들과 소공작이 빠진 자리를 아카데미 수업이 채워 주게 될 것이다.

“잘 가, 피아나.”

마차 창문에서 얼굴을 비죽 내민 피아나가 레이의 인사에 손을 흔들었다. 피아나의 손바닥엔 그간 훈련받았던 흔적이 가득했다.

“아가씨, 조심히 가세요.”

피아나를 유독 잘 챙겨 준 기사 몇몇이 나와 함께 배웅했다. 피아나는 기사들에게 일일이 손인사를 해 준 뒤에야 마차를 출발시켰다.

작은 소란이 마무리되고 이제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준비 다 되셨습니다.”

단정한 짙은 녹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까지 깔끔하게 올린 레이가 단장을 마쳤다. 라미엘도 레이의 드레스에 맞춰 진녹색 재킷을 걸쳤다.

“우리 푸엥, 이쁘네.”

푸엥은 이번엔 레이와 같은 드레스는 아니지만 그와 같은 녹색 천으로 만든 커다란 리본을 목에 매는 것으로 통일감을 주었다.

푸엥은 자신의 방에 있을 것이니 손님들 앞에 나설 일은 없지만, 하인들은 푸엥도 레이와 라미엘처럼 꾸며 일명 패밀리 룩을 완성하고 있었다.

황실과 대신전에서 사람이 오는 날이었다. 제로석을 직접 보고 확인하고 싶은 관련 분야 연구자들이 광산을 보러 오는데, 그 일행 중에 태자와 헤덴까지 있기에 루이반은 제대로 각 잡힌 손님 접대를 해야 했다.

거물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루이반 전체가 분주했다. 원래도 잘 정돈된 저택이지만 이젠 구석구석 빛이 날 정도였고 평소에는 복도 끝에 있는 거대한 방에 보관하던 장식 조각들도 꺼내져 여기저기 놓였다.

기사들은 경호 동선을 숙지하며 고강도 훈련을 해 왔고, 전시 준비라도 하는 것처럼 모두가 비장했다. 푸둥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잠시 워크산으로 보내는 것으로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윌포프와 하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레이와 라미엘이 광산으로 가는 마차에 올랐다.

광산은 분주하고 정신이 없었다. 근처 땅에는 시설 공사를 하느라 수백의 인부들과 공사 자재들이 어지러이 산재했고 소음도 제법 컸다.

제로석의 존재가 아직 극비라서 광산 규모 확인 겸 채굴을 위해 최소한의 인부들만 작업하고 있었다. 그들을 위한 숙소가 인근에 지어졌고 그들은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일했다. 다만 오늘은 시찰을 나온다는 소식을 전해 두었기에 채굴은 오전 작업만 하고 마친 상태였다.

겹겹이 둘러진 마법진이 광산을 지키는 것을 보니 외부에 제로석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나갈까 봐 조심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눈에 보였다.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군.”

태자가 광산을 싸고 있는 진을 보며 작게 감탄했다. 시장의 혼란을 막기 위해 당분간 극비로 하라고 했으나 이 정도로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줄은 몰랐다. 나중에 공개가 되더라도 따로 보안을 위한 장치를 마련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루이반은 후에 보안에 대한 추가적인 작업을 하는 대신 비밀 유지와 보안 유지 마력 장치를 한 번에 달아 둔 듯했다.

레이가 입구에 가까이 다가서니 마력으로 감싸인 진이 한 겹 벗겨지는 것이 보였다. 일반인들에겐 보이지 않겠지만 마법사나 신관들은 그걸 고스란히 보거나 느낄 수 있었다.

몇 겹이나 쌓인 보안 장치는 오직 루이반 공작 부인 손에서만 해제가 되고 있었다. 공작은 그런 그녀의 한 걸음 뒤에 서서 자기 아내를 지키듯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태자를 제외한 인물들, 황실 마법 연구원 여섯, 대신전에서 게이트를 통해 이곳으로 온 신관 여덟 명은 조금 초조한 심경으로 레이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들은 빨리 신 광물을 만나고 싶은 듯, 그 외의 상황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쪽으로 들어오십시오.”

레이가 말을 하며 광산 입구의 거대한 문을 힘껏 밀었다. 성인 남성 네다섯이 달려들어 여는 문이지만 광산주인 레이를 고려해 맞춤으로 설계한 마력 문이었다.

“세상에.”

“후와아.”

눈앞의 광경에 다들 감탄을 했다. 광산 깊이 들어갈 것도 없이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도 주변엔 무수하게 박힌 제로석이 녹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광산 크기를 파악하느라 조금씩만 파고 있는 중이어서 입구 쪽에도 제로석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시설만 다 짓게 되면 채굴 양과 속도를 모두 높이려 합니다.”

그때 모두의 뒤쪽, 입구 쪽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예하, 제발 차후의 일정도 좀 고려를…….”

“왔으니 된 거 아니냐!”

바다도 아닌데 짠내가 나는 것 같은 토마의 목소리와 버럭거리는 헤덴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각자들이 도착했다는 소리였다.

그 누구도 헤덴이 제시간에 올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먼저 시찰을 시작했다. 모두의 예상 시간보다 헤덴이 오히려 일찍 도착해 놀랐지만 그 배경에 토마의 스트레스가 작용한 것 같아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토마가 헤덴을 달랠 때마다 매번 사람들은 숙연함을 느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헤덴 예하! 이쪽입니다. 일찍 오셨네요!”

광산 안쪽에서 레이가 헤덴을 반기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와, 맙소사. 이게 다 제로석이잖아요? 광산이 어마어마합니다.”

토마가 광산 규모에 감탄을 한 뒤 레이와 라미엘에게 인사를 건넸다.

“보통 지하로 내려가서 마력석을 캐내곤 하는데 여긴 지상부터 가득하네요.”

“아마 이 산 전체가 다 제로석을 근간으로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그럼 저 표면에서 여기까지 쭉…….”

관련 신관과 마법사들은 눈앞의 제로석을 보며 자기들끼리 뭉쳐 분석을 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모르는 누군가가 보면 이전부터 쭉 협업해 온 연구 동료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아직 초기 단계라 더 깊숙이 들어갈 수 없었다. 애초에 레일을 탈 것도 없이 15분도 채 걷지 않아 거대한 제로석 벽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앞으로 이걸 계속 채굴해서 광산을 키우게 될 것이다.

“추가 연구가 더 필요하시다면 이곳에서 샘플을 채취해 가셔도 됩니다.”

레이의 허락에 사람들의 눈에서 불꽃이 이는 듯했다. 허락이 내려지자마자 연구자들은 허리나 등에 매단 커다란 주머니에서 도구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사전에 역할 분담을 해 오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였다. 한 사람이 제로석을 떼어 내면 다른 연구자들이 각자 자신의 도구로 부수고, 찌르고, 표면을 긁고 착착착 현장에서 간단한 연구를 진행하는 모습이었다.

다들 짜고 왔나. 어쩜 저렇게 죽이 척척 맞지 싶은 광경이었다.

직접적인 연구자가 아닌 감독관의 역할로 온 태자와 헤덴은 그들과 한 걸음 떨어져 루이반 공작 부부와 함께 서 있었다. 태자는 연구원들을 바라보는 부부에게 아까부터 계속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네만, 공 자네는 뭘 하는가? 무슨 역할이지?”

공작 부인이 문을 열고 들어와 설명을 하고 새로운 자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공작은 내내 한 걸음 뒤에 물러나 있었다.

라미엘이라는 인물이 아내 치마폭에 싸여 못 나서는 덜떨어진 인물도 아닌데 마치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모습이 이상했다.

“저는 투자자 자격으로 왔습니다.”

라미엘의 대답에 태자가 엥, 하는 표정을 지었다.

“투자자라니. 이건 당연히 루이반에서 하는 일 아닌가?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닐세.”

루이반 사업인데 네가 왜 가만히 있느냐는 태자의 질문에 라미엘이 답했다.

“루이반 부부로 묶여 있긴 하지만 이 광산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담당자는 어디까지나 제 아내, 레이알렉시스입니다. 루이반은 투자금을 댄 것뿐이니 저는 제로석 관련된 일에 권한이 없고, 그러니 물러나 있는 게 맞습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태자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이 말도 안 되는 대수익을 거둘 광산을 루이반 소유가 아니라 공작 부인 개인 소유로 두었다고?”

“원래 레이알렉시스 개인 소유의 광산이었습니다.”

기함하는 태자와 달리 라미엘은 태연한 표정으로 광산은 오롯이 레이의 소유라는 것을 밝혔다.

‘공작이 미친 게 아닐까.’

놀라는 태자의 심정을 레이는 이해했다. 개인 소유라고 해도 부부가 되면 자산은 자연스레 가문의 것으로 치부되는 풍토였기에 지금처럼 명확히 상대의 소유를 밝히는 상황은 처음 겪어 보는 일일 것이다.

레이가 생각해도 라미엘이 특이한 경우긴 했다. 제로석의 존재를 알게 된 시점부터 라미엘은 소유자를 명확하게 구분했다. 이는 오롯이 당신의 것이라고.

라미엘이야 자신에게 좋은 모든 걸 다 쥐여 줄 심산에 그랬다고 하지만 리담의 관습과 분위기를 생각하면 특이한 경우긴 했다.

‘이 세상 좋은 건 다 아내의 것, 이런 느낌이랄까.’

그 언젠가 예상했던, 푹 빠져서 물고 빨고 하는 라미엘보다 더 깊게 그는 레이를 품고 있었다. 레이는 라미엘의 팔짱을 더 꼭 끼었다.

“그렇다면 루이반은 이 일에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인가?”

설사 레이 개인이 전담해 운용하는 자산이라고 해도 그냥 루이반의 것이라고 해도 될 것을 라미엘은 딱 잘라 명확히 아내 소유라고 하고 있었다. 이 정도 대단한 물건이라면 루이반이 소유한 것이라면서 가문을 드높이고 더한 명예를 가져다줄 수 있는 일인데도 분리하는 모습이었다.

“투자자로서 관여는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제가 하는 건 거기까지입니다.”

그래서 이걸 고작 투자자 자격 정도로 넘긴다고? 이 대단한 걸?

태자가 이 말을 하기도 전에 헤덴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가, 네가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소릴 좀 하는구나.”

태자와 달리 헤덴은 뿌듯한 표정이었다.

─헤덴 예하 마음에 들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만.

라미엘은 속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이는 버릇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헤덴은 먼지 조각을 보는 것처럼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말을 했다.

“그렇지. 이건 아가 조련사 것이지 아가 네가 가질 게 절대 아니지, 암.”

헤덴은 제로석 일로 그간 레이를 단독으로 쭉 만나 왔다. 만약 제로석이 여태 그래 왔듯이 루이반 소유로 녹아들었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헤덴이 상대해야 할 것은 레이가 아니라 라미엘이 됐을 것이다.

‘저놈하고 계속 둘이 있게 되다니. 생각만 해도 골이 아픈 느낌이다.’

이 인간 같지도 않은 놈에 비해 조련사는 얼마나 인간미가 넘치는가.

“저 정말 너무 급하단 말이에요오오. 살려 주세요, 예하!”

……심하게 넘쳐서 좀 문제지만.

“아가 조련사야, 절대 내주지 마라.”

헤덴의 말에 레이는 까르르 웃었다. 헤덴이 왜 저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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