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18화 (118/160)

118화. 의뢰

루이반 저택의 가장 큰 홀에서 귀한 손님들의 접대가 이루어졌다. 황실 주방이 내놓는 요리에도 뒤지지 않을 성대한 정찬이었다.

태자와 황실 연구원은 일정 때문에 식사를 마치자마자 황실로 갔고, 대신전 연구 신관들도 슬픈 얼굴로 허겁지겁 디저트를 입에 밀어 넣고 베롬으로 돌아갔다. 대신전의 인력난이 다시 한번 진하게 느껴졌다.

하여 남아 있는 인원은 헤덴과 토마뿐이었다. 두 사람은 떠나간 신관들과 달리 느긋하게 디저트를 즐기는 중이었다. 특히나 토마는 레이가 헤덴을 상대하는 중이기에 더 들뜨고 신난 얼굴로 간만에 찾아온 짧은 평화를 만끽하고 있었다.

“대신전에 의뢰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라미엘은 헤덴을 마주하다 실시간으로 레이의 소식을 전해 받을 수 있는 무언가가 절실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레이와 헤덴의 대화가 멈췄을 때의 공백을 틈타 그는 바로 대신전 최고위자에게 직접적으로 의뢰를 요청했다. 쌍방 소통이 가능한 물건을 의뢰했는데 라미엘의 설명을 들은 헤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통신 기기를 말하는 거군.”

헤덴은 이미 그런 것을 알고 있다는 반응이었다.

“예하께선 알고 계신 겁니까?”

라미엘의 질문에 헤덴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레이에게 ‘전화’와 ‘휴대 전화’라는, 이른바 양방향으로 발신 수신이 가능한 일명 ‘통신 기기’라 불리는 것들에 대해 전해 들었다. 그 후, 일정한 마력으로 여러 파장을 만들어 그 특정 파장에만 서로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하고 있는 중이었다.

소식을 바로바로 전달할 수만 있다면 생활의 편의도 오르겠지만 각종 사고나 위험에서도 빠르게 피할 수 있거나 대비할 수 있다. 그렇기에 다른 발명이나 연구를 제쳐 두고서라도 착수하고 있었다.

다만 대신전의 고질적인 문제, 자금난과 인력난의 콤보로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을 뿐.

토마는 루이반 공작이 의뢰를 한 이후 헤덴이 입을 다물어서 천운이라고 생각했다. 헤덴이 그런 건 금방 나온다고 말할 것만 같아 초조하던 차였다.

토마는 헤덴이 그거 이미 개발 중이고 시제품이 곧 나오니 기다려라 같은, 돈이 되는 의뢰를 뻥 차 버리는 발언을 하기 전에 다급히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감히 루이반 공작과 대신관이 하는 대화에 무례하게 끼어들게 됐지만,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대신전의 안락한 봄을 위해 지금 이 순간 예의범절을 내다 버리기로 했다.

“현재 공작께서 말씀하신 상품은 대신전에서 개발 중에 있습니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같은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토마는 다급하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예의를 차린다고 괜한 서두를 달았다가 헤덴이 끼어들면 돈이 날아간다. 그리고 그는 방금 전에 이미 무례하기로 결심한 상태다.

다 함께 논의하거나 토론하는 중이 아닌 상황에 양해도 없이 갑작스레 들어온 토마를 보는 공작의 기색이 조금 사나워졌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제법 구미가 당기는 일이라 그런지 한순간 솟아난 기운이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다만 인력과 개발 자금이 부족하여 더디게 진행이 될 뿐입니다. 기다리시면 원하시는 상품을 손에 넣게 되실 겁니다.”

“지난번 사냥제로 평소보다 배는 많은 기부금을 받았을 텐데. 게다가 루이반에서 도서관 이용료로 섭섭잖게 기부를 했는데도 대신전은 지금 그런 말을 하는가?”

돈을 그렇게 받아먹고도 일 빨리 안 하냐는 압박에 토마는 억울해졌다. 예년에 비해 기부금이 많은 건 사실이나 들어온 것만큼, 아니 들어온 것보다 더 많은 지출이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제로석 가공 시설을 짓는 데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갔다. 예년보다 많이 들어온 기부금을 몽땅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신전 곳간도 휘청할 정도였다.

‘실시간 통신 기기’ 개발에 급히 들어간 것도 이 때문이었다. 시설을 짓는 동안 들어갈 돈을 충당하기 위해 돈 되는 것을 최우선 연구 순위로 두었다. 순위가 바뀌며 자신의 연구가 뒤로 밀린 사람들을 달래는 데도 결국은 돈이 필요했다.

시설 완공 후 떼돈을 벌게 되겠지만 그때까진 긴축에 긴축을 해야 했다. 다들 시설 완공 하나만 보고 죽자 살자 매달려 있는 중이었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지만 인내가 써도 너무 썼다. 그런 와중에 단비 같은 의뢰가 온 것이다.

“공작 각하께서 불편해하시는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로석 가공 시설을 짓는 데 예상을 웃도는 비용이 들어 신전이 어렵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희미하게 웃는 토마를 보니 그간 신전 예산 관리를 담당하는 사람들과 얼마나 골머리를 썩였을지가 훤히 보이는 듯했다. 저런 표정과 세상만사에 찌든 눈빛을 보면 절대 돈을 뜯어내기 위한 거짓일 리가 없다.

“혹시 그렇다면 정화식도…….”

레이의 질문에 토마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예, 그대롭니다.”

“저런.”

마음의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토마의 고충 토로에 그가 왜 황급히 공작과 대신관의 대화에 끼어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상용화까진 기다릴 수 없고, 그전에 가장 빨리 하나를 만들어 내는 기간과 소요 비용은 어느 정도지?”

토마가 핼쑥한 얼굴로 야심차게 웃었다.

“그건 지불하시는 금액에 따라 달라집니다.”

헤덴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

레이의 목걸이와 같은 노란 보석이 달린 귀걸이 한 쌍이 루이반에 도착했다. 마력석을 고도의 특수 기술로 가공해서 만든 장신구는 대신전에서 개발한 통신 기기의 최초 모델이었다.

“진짜 이를 갈았네.”

헤덴과 토마가 떠난 지 열흘 만에 도착한 엄청난 성과였다.

실시간으로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리담 최초의 통신기는 최대한 빠르게 제작해 내기 위해 디자인을 생각할 겨를이 없어 두 개짜리 장신구인 귀걸이를 기본으로 삼아 제작했다. 개발이 더 진행되면 훗날 장신구가 아닌 전혀 다른 모양새의 통신기가 나올 것이다.

“연구에 많은 진척이 있었나 봐요. 고작 열흘 만에 도착된 걸 보니.”

레이가 귀걸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뭔가 특별한 게 있어 보이진 않았다. 지극히 평범한 귀걸이 같다.

“잘 되는지 확인부터 해 봐야 할 것 같은데. 라엘, 한쪽 갖고 있어요.”

“내가 나갈…….”

레이가 라미엘 손 위에 귀걸이 한 짝을 올려놓고 그가 말릴 틈도 없이 포르르 집무실을 벗어났다.

“첫 대화는 무조건 내가 먼저 할 거니까 라엘 건드리면 안 돼요!”

복도에서 레이가 라미엘에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마님께선 어디까지 가려고 복도를 저렇게 달려 나가시나.

지극히 ‘레이 같은’ 레이의 모습을 본 고용인들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라미엘은 잠시 의자에서 레이의 연락을 기다리다가 창가로 다가갔다.

“역시…….”

저 멀리 푸엥 전용 공간으로 가는 레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제 예상대로 정원까지 뛰어나간 모습이었다. 레이 뒤로는 푸엥과 푸둥이 따라 달리고 있었다. 주인이 저쪽을 향하니 자기들과 놀아 주는 줄 알고 맹렬히 따라 나간 모양이었다.

가지에 분홍빛이 보이는 꽃나무 아래서 레이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라미엘 손바닥에 있는 귀걸이가 진동하며 약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대신전에서 일러 준 대로 라미엘이 귀걸이 보석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 번 치자마자 레이의 목소리가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귀로 흘러들었다.

[라엘! 꽃이 피려고 해요! 가지에 꽃봉오리가 맺혔어요!]

목소리 하나 듣는 것뿐인데 이 말을 하는 레이의 표정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명하게 그려졌다. 만개한 꽃보다 더 활짝 피어 웃고 있을 얼굴이.

레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 확인하자마자 라미엘은 서슴없이 제 왼쪽 귓불에 귀걸이를 꽂아 넣었다. 으직, 하는 소리 뒤로 미미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조잘대는 레이의 목소리에 고통 같지도 않던 고통이 사라진다.

[아직 날이 쌀쌀합니다. 레이 옷도 제대로 안 입고 나갔잖아요. 저택으로 들어와요.]

“우와, 어어. 라엘, 꼭 옆에서 당신이 말 걸고 있는 것 같아요!”

통화 품질은 기대 이상이었다. 전화 목소리 티가 나던 한국의 휴대 전화보다, 목소리만 놓고 보면 더 전달력이 좋아 보였다.

‘급히 만든 거라더니 기술 좋네.’

물론 한국의 휴대 전화인 스마트폰은 목소리 전달 외의 수많은 기능으로 더 열심히 활약을 하고 있긴 했지만, 목소리 전달만 놓고 본다면 아주 만족스러운 통신기였다.

레이는 귀에 통신 귀걸이를 착용했다. 앞으로 통신기가 새로이 발명될 때까지 장신구는 이것만 차고 있을 것이다.

“라엘도 내 목소리가 이렇게 잘 들려요?”

[네. 잘 들립니다.]

“완벽하네요. 성능 확인 잘 했으니 이제 들어갈게요.”

톡톡.

처음 말을 걸 때처럼 손으로 두 번 보석을 건드려 대화를 종료한 후, 레이는 자신을 따라 나온 두 마리 반려동물들을 공원으로 보내 놀게 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저택을 향했다.

***

“마님, 어서 오십시오.”

샤메인과 휘하 베르니 소속 하인들이 레이를 맞았다.

그간 무슨 일이 생겼는지 헬라 파칸 조이먼이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해 왔다. 서신으로 전하기 힘든 일이라며 루이반으로 찾아오겠다고 했지만, 원래 헬라에 가려고 했던 레이가 일정을 조금 당겨 헬라로 왔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왔는데 혹시 파칸께서 벌써 도착하셨어?”

“아닙니다. 아직 오지 않으셨습니다. 지난번 응접실로 자릴 마련했으니 마님께서도 이쪽으로 오십시오.”

헬라까지 라미엘과 동행한 길이었다. 다만 서로의 일이 달라 길동무만 되고 헬라 역에 도착하자마자 헤어져야 했다. 그래도 목소리라도 언제든 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이전처럼 라미엘을 떠날 때 마음 한구석이 사무치게 서글픈 일은 없었다.

레이가 응접실에 자리를 잡고 잠시 후, 베르니 입구에서 인사를 하며 조이먼을 반기는 소리가 들렸다. 본래 약속 시간보다 조금 더 이른 시간이었다.

“안녕하셨습니까, 공작 부인.”

응접실로 들어서며 조이먼이 먼저 레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보좌관인 세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의 업무가 꽤나 고강도였던지 조이먼의 얼굴은 핼쑥하기 그지없었다.

“앉으세요. 일단 목부터 축이시지요.”

레이의 권유에 조이먼이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간 있던 일부터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소포니악 집정관인 필레는 닷새 뒤에 재판을 받게 될 예정입니다.”

집정관이란 자리는 귀족이나 다름없기에 일반 재판이 아닌 귀족 재판으로 진행될 것이라 했다. 자신을 제 편으로 만들었다 여기고 마음 편히 있던 필레에겐 날벼락 같은 소식일 것이다.

레이는 필레의 최근 행적을 떠올렸다. 그는 조용히 몸을 사리며 좋지 않은 여론이 가라앉을 때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지난 15년을 돌이켜 보건대 그는 다시 소포니악에 모습을 드러내려 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자신의 자리엔 집정관 대리인 파칸이 파칸의 본 업무와 집정관 업무를 겸업하고 있다. 게다가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필레의 부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덕에 여론은 필레의 예상과 달리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중이었다.

필레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할, 뇌물과 자신의 감사 인사를 받은 공작 부인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다.

물론 레이는 그의 연락을 가뿐히 무시했다. 레이에게 편지가 왔다는 보고만 올리고 윌포프가 처리했다는 걸 필레가 알 리 없었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는 루이반 연통은 영영 필레에게 닿을 일은 없을 것이다.

결국 필레는 자신의 관사를 모두 처분하고 수도의 집도 팔겠다는 강수를 들고 소포니악을 찾아왔지만 문제를 해결하기에 너무 늦은 때였다. 조이먼이 이미 재판을 요청한 후였기 때문이었다.

“그럼 필레는 지금 어디 있죠?”

“재판을 받기 위해 저택에 구금된 상태입니다.”

이번 기회를 계기로 조이먼은 헬라 전 도시 집정관들의 행정력 파악과 업무 실태를 전수 조사했다.

생각보다 많은 비위 사실이 발각되었고 그 후처리를 하느라 그는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지경이었다. 지금도 외근을 나온 조이먼 대신 세든이 업무를 하고 있었다.

헬라가 뒤집어진 소식은 다른 도시에도 퍼져 각 도시 파칸들도 덩달아 바빠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정말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부인께서 소포니악을 좀 도와주실 수 있는지요.”

“제가요? 제가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까.”

“정말 염치없지만 소포니악 집정관 후보를 찾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레이는 아무리 쥐어짜 내도 소포니악을 돌볼 여유가 없는 조이먼이 찾은 유일한 돌파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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