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20화 (120/160)

레이의 말에 케이와 엘이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두 사람의 양손도 사람들에게 받은 선물로 가득 찬 상태였다. 레이의 손이 부족해 롭까지도 선물을 넘겨받아서 네 사람은 동산에 도착하자마자 자리를 잡고 선물받은 과일부터 모두 먹어야 했다.

소포니악을 한 바퀴 돌고 루이반으로 돌아가려고 준비하는 중에 귀걸이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남들이 보면 혼자 허공을 보며 떠들고 있는 것처럼 보일 테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야 하는데 마침 베르니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레이가 방긋 웃으며 귀걸이를 손으로 톡톡 건드렸다.

“라엘!”

[레이, 지금 어딘가요?]

라미엘도 마침 헬라에서 할 일을 다 마친 모양이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게 좋다고 생각하며 레이가 헤실헤실 웃었다.

“베르니에 있어요. 이제 가려고 했는데. 라엘은요?”

[잘됐네요. 거기 있어요.]

그리고 연락이 끊어지자마자 입구에서 주인을 맞이하는 베르니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바로?’

레이가 막 달려 나가기도 전에 방문이 열렸다.

“이 근처에 있던 거예요?”

“네. 레이가 베르니에 있을 것 같아서 이쪽으로 오는 길에 이게 생각났어요.”

라미엘이 제 귀를 가리켰다.

“나도 라엘이 연락하기 전까진 이 장치를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오늘 일은 다 마쳤어요?”

날씨만큼이나 평화로운 하루였다.

루이반 저택에 도착하기 전까진.

“이게 뭐야……?”

윌포프가 굳은 얼굴로 올린 것은 법정의 직인이 찍힌 소환 명령장이었다.

「레이알렉시스 루이반의 뇌물 수수에 따른 재판 소환 명령」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한순간에 짐작이 되었다. 레이는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라미엘의 손에 들린 명령장을 읽었다.

레이가 재판에 회부될 소포니악 집정관에게 뇌물을 받은 정황이 있으니 재판이 시작되기까지 저택에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라미엘이 손에 힘을 주자 종이가 한순간에 우그러졌다. 순식간에 사나워진 라미엘의 기세에 윌포프와 인근의 하인들이 겁에 질렸다.

‘감히 레이를.’

레이에겐 당연히 죄가 없다. 자기 사비까지 털어 가며 도시를 도왔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었다.

라미엘을 분노하게 한 것은 레이알렉시스 루이반을 범인으로 확정하며 재판 전까지 구금을 논하는 재판정의 처사였다.

“이따위 걸 보낸 걸 보니 법관들이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군. 아님 내가 우습게 보였던가.”

확실한 증거도 없이 필레와 레이를 동일시하는 처벌을 내린 꼴에 라미엘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음, 필레가 정말 궁지에 몰리긴 한 모양인데요.”

라미엘이 분노하는 것과 달리 정작 당사자인 레이는 평온한 말투였다.

뇌물까지 줬다는 말을 하면 자기 죄목만 더 늘어나니 최대한 입을 다무는 게 좋았을 텐데, 필레는 눈에 뵈는 게 없는지 굳이 효과도 없던 뇌물까지 들먹였던 모양이다. 끝까지 멍청하고 한심한 남자였다.

“두 분께서 저택에 도착하시기 직전 소식꾼에게 받은 명령장이었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해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

탁.

라미엘이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툭, 가볍게 친 것뿐이지만 그의 성난 기색과 뒤섞이니 그 작은 동작조차 엄청 커다란 공격인 것처럼 느껴졌다.

레이가 소스라치게 놀라자 그는 테이블에서 즉각 손을 떼고 사과를 했다.

“많이 놀랐어요? 미안해요, 레이.”

“라엘, 진정해요. 난 괜찮아요.”

“내가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지금 당신이, 하아.”

화를 억누르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쉰 라미엘이 명령을 내렸다.

“이따위 걸 보낸 새끼들은 누군지, 어떤 이유인지 당장 내 앞에 가져와.”

“예, 알겠습니다.”

윌포프가 잽싸게 방을 나섰고 이어 방 안의 하인들도 줄줄이 뒤를 이어 나갔다. 공작의 날 선 기색에 멀쩡할 수 있는 건 마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라엘, 이거 아무 일도 아니라니까요.”

혹시라도 필레가 이런 짓을 벌일지 몰라 사전에 대비를 다 해 놓은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레이는 담담하게 재판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당신을 구금시켰는데 이게 어떻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겁니까. 감히, 당신을, 범죄자 취급하고 있잖아요.”

레이는 지금 이 순간 그르렁거리는 흉포한 야생 동물을 만난 것 같다고 느꼈다. 자신이 이만큼이나 느끼는 정도니 라미엘의 화가 어느 정도인지 온몸으로 실감이 되는 기분이었다.

저택 구금이라는 건 저택 외부로의 외출을 금지한다는 말이었다. 다만 필레처럼 외부인의 출입도 모두 금지하고 식사 배급을 받으며 혼자서 방에 갇혀 있어야 하는 철저한 구금과는 달리, 그저 공작령을 제외한 다른 곳에 갈 수 없는 가벼운 조치이긴 했다. 이런 구금은 외부인들의 출입도 그대로여서 딱히 집 밖으로 나가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 이상 생활의 편의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루이반 저택은 어마어마하게 크니 구금으로 답답할 일도 없다. 바깥 공기가 그리우면 평소처럼 정원으로 나가 애들과 산책이나 하면 될 일이었다.

레이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과는 달리 라미엘은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정황만으로 구금을 명하는 경우는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정황 증거가 아주 명확해서 조만간 유죄 판정을 받는 게 거의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경우에나 구금을 내렸다.

이건 이 사건을 배정받은 법관들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심술을 부리는 것이다. 아마도 제 법안을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는 무리일 확률이 높다.

어떻게든 제게 시비를 걸어 날뛰도록 만들려는 얕은 수작이었다. 루이반 공작이 평판을 잃을수록 법안도 힘을 잃게 될 테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라미엘이 가장 아끼는 대상을 건드리는 방식으로 선전포고를 날린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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