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재판 (3)
레이의 구금에 서명을 한 법관인 게르카 남작, 브루군 후작, 어트 백작은 법정 후방에서 필레를 닦달했다. 하지만 그는 당황한 얼굴로 이 정도면 충분한 것 아닌가, 대체 뭐가 문제냐며 반문했다.
필레의 확신과 달리 호언장담했던 증거 자료가 법관들의 예상보다 너무 부실했다. 워낙 값비싼 보석이니 구매 내역과 이송법 등이 상세히 기재되어야 하는데 필레가 뇌물로 구입을 하면서 너무도 조심한 나머지 과정이 지나치게 단순했다.
추가 제출한 구매 내역은 운송을 맡은 길드가 확인 도장을 찍어 준 것뿐이었다. 또한 구매처의 구매 인장 대신 주인의 서명 하나가 인증의 전부였다.
이는 피고의 유죄를 입증해 감옥에 보낼 수 있는 확실한 증거라고 할 수 없었다. 뇌물이라고 볼 수도 있긴 했지만, 도시 예산이라는 주장대로 집정관이 구매한 뒤 계속 도시에 두고 있었다고 해석해도 될 여지가 다분히 있었다. 법관 셋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여기 모여 뭣들 합니까.”
판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 아, 추가 증거를 해석 중에 있었습니다.”
판사는 미심쩍은 눈으로 필레와 법관 셋을 바라보더니 그를 원래 있던 자리로 보냈다.
“확실하게 분석하지 않으면 안 될 겁니다. ……공작 부인께서 꽤나 피곤하시겠군요.”
이미 승산이 뻔한 재판이었다. 다만 지금 증거를 아득바득 해석하려는 건 저 셋의 자존심 문제일 것이다.
“……아니면 목숨 문제인가.”
서슬 퍼런 루이반 공작의 기세를 보면 어떻게든 결과를 내야 할 것이니 말이다.
“개정하겠습니다.”
개정 이후 법관들은 필레가 추가 제출한 구매 내역을 들먹이며, 레이가 뇌물을 팔아 치워 그 돈으로 소포니악을 이끌어 갔다는 확고한 가정하에 사건에 접근하기로 방향을 잡은 듯했다. 계속 그것만 물고 늘어지면서 시간을 소모했다.
“법관께서 하신 말씀대로라면, 네, 맞습니다.”
목걸이로 소포니악 정비를 했냐는 똑같은 질문을 말만 바꿔 가며 계속 물어 대는 법관 때문에 레이는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인정하신 겁니다.”
“네. 목걸이로 정비했습니다.”
법관들이 드디어 건수를 잡았다는 듯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 대답 하나 들으려고 지금 몇 분을 소비한 거야?’
레이는 최대한 짜증 난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숨을 골랐다.
“목걸이를 팔아 치웠다는 건, 아무리 도시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결국 뇌물을 받아 쓴 것이 아닙니까.”
핑퐁핑퐁 계속 같은 질문을 하더니 이런 결론을 내리려고 했던 모양이다.
“아뇨, 그것과는 다릅니다. 저는 팔아 치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 대체 팔지 않고 어떻게 정비가 가능하다는 겁니…….”
그때, 라미엘이 손을 들었다. 그 작은 움직임에 법정의 모든 이들이 주목했다.
“지금 법관이 공정함을 잃고 어느 한쪽 편으로 기울어져서 판단이 아니라 몰이를 하는 것 같은데. 왜 재판장은 제재를 않고 가만히 있습니까……?”
루이반 공작이 말끝을 살짝 늘이며 방긋 웃었다. 법정에 있는 모든 이들이 느끼고 있는, 맞는 말을 하고 있음에도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질 않는 말투였다. 마치 사신이 나타나 어떻게 죽고 싶으냐고 묻는 것을 듣는 기분에 더 가까웠다.
“법관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심문을 제대로 하세요.”
판사가 공작의 이의를 받아들이고 법관들을 수습했다.
가열된 분위기가 가라앉고 법관들은 더 이상 레이를 뒤흔들 거리를 찾아내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유죄 여부가 확실해질 때까지 판단이 유보되고 해당 법관들은 정확한 판단이 내려질 때까지 외부와 접촉할 수 없게 된다. 관련자에게도 도주 우려를 막기 위해 그를 감시하는 감시꾼이 붙게 된다.
“공작 부인.”
판사는 속으로 한숨을 쉬다 레이를 불렀다. 법관들은 지금 목걸이를 뇌물로 받아 ‘팔아 치웠다’는 사실에만 너무 초점을 맞춘 나머지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원고와 피고인 심문은 법관 소관이라 웬만하면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 했는데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목걸이는 도시의 것으로, 팔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대체 어떻게 도시를 정비하신 겁니까.”
드디어 심문 같은 심문이 나왔다. 판사의 말에 레이는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증거 제출하겠습니다.”
레이의 말에 사람들은 다들 그녀가 목걸이를 어떤 식으로 활용했는지 그 내역이 담긴 증명서를 내놓을 것이라 예상했다.
“이, 이건…….”
“네. 재판 내내 법관들께서 물어보신 ‘그것’입니다.”
공작 부인이 내민 증거 자료 더미의 가장 위에 올라와 있는 고급스러운 작은 상자엔 예의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팔아넘겼다고 여긴 것이 버젓이 등장하자 세 명의 법관은 당황했다.
이게 왜 여기서 나오지?
“이걸 왜, 진작 안 주시고! 이제야 이걸 꺼내 드신 이유가 뭡니까. 법정을 우롱하시는 겁니까?”
“제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확인된 사실인 양 몰아붙인 건 법관들이십니다.”
레이의 말에 법관들이 입을 다물었고,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저들의 행동을 예상했다는 듯 레이는 변론을 이었다.
“이건 소포니악의 미래 예산이니 차기 집정관께 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되어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공작 부인이 제출한 자료엔 목걸이를 언제든 현금화할 수 있게 보석을 취급하는 길드에 연락을 해 뒀고, 길드는 이 계약 내용을 확실히 하기 위해 현재 목걸이 금액의 20퍼센트를 계약금 명목으로 주었다는 내역이 있었다. 길드 인장과 확인서, 증인의 서명까지 완벽했다.
이 금액과 레이 개인의 사비가 더해져 빈민가 공사가 되었다는 진행 내역서와 공사 계약서까지 완벽한 증거 자료였다.
“제겐 마린의 거미줄이 있습니다. 그런데 설마 저 정도 것에 마음을 주겠습니까. 제게 진정 뇌물을 주겠다면 마린의 거미줄 이상의 것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더 이상 판정을 뒤집을 무언가가 나타날 리 없을 완벽한 마무리였다.
공작 부인은 사비로 소포니악을 수리하고 차기 집정관에게 예산까지 넘겨주는 모습을 만천하에 보였다. 믿기 어려울 정도의 선행에 법정이 술렁였다.
레이는 필레에게 목걸이를 받아 드는 순간부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델마까지 끌어들여 준비를 했다. 길드를 소개해 준 것도 그였고, 그가 보는 앞에 서명을 마쳤다. 만약 여기서 끝나지 않았더라면 레이는 증인으로 델마까지 데리고 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굳이 재판 때문이 아니더라도 레이는 목걸이에 관한 길드 협약의 내용을 소포니악을 위해 차기 집정관에게 넘길 예정이었다.
새로운 다량의 증거가 나왔으니 분석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판사와 법관들은 잠시 휴정 후 판결을 진행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결과는 오래지 않아 나올 것이다. 공작 부인의 서류는 위조 여부만 확인되면 끝이 날 일이기 때문이었다.
레이도 법정 지정 휴게실로 향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참관석에 있던 라미엘이 레이와 함께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오는데, 법정 문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큰 소리로 항의를 하는 듯했다.
참관한 사람들이 자리를 이동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며 소란하던 법정이 한순간에 더 복잡해졌다.
“무슨 일이냐.”
법정 경비 기사가 입구에서 물었다.
“그게 소포니악 사람들이…….”
경비대가 조심스레 보고를 올렸다. 소포니악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는 소리를 들은 판사가 법정을 나가던 걸음을 멈추고 단상에서 내려와 기사에게 다가갔다.
“웬 소란이지?”
“소포니악 사람들이 몰려와 뭔가 잘못 아셨다고,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면서 공작 부인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 소리에 레이가 화들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누가 와서 뭘 해? 라엘, 내가 지금 들은 게 맞죠?”
“네. 나도 정확하게 소포니악이라고 들었어요.”
레이가 입구로 달리듯 빠르게 걸어가서 법정 문을 열었다.
“알렉스 님!”
정말로 소포니악 사람들이 법정 앞에 모여 있었다. 빈민가 사람들뿐만 아니라 소포니악에서 계속 마주치던 낯익은 얼굴들도 보였다. 한두 명도 아니고 적어도 스물은 훌쩍 넘는 수였다.
“진짜 여기 계시네?”
“아니, 어떤 잡놈이 알렉스 님을 모함한답니까?”
“알렉스 님이 소포니악에 어떤 일을 해 주셨는데 이런 취급을 해요!”
레이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소포니악 사람들이 한 마디씩 한 번에 쏟아 내기 시작했다. 다들 레이가 법정에 있다는 소식이 기가 막힌 듯 울분을 토했다.
“저기, 다들 진정하고…….”
이들 대부분에겐 일분일초가 귀했다. 낮 시간에 일을 하지 않으면 며칠의 생계가 위험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헬라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기차에 마차까지 타고 와야 한다.
그 모든 비용을 감수하면서도 이 사람들은 우리 레이디는 잘못한 게 없다며, 저를 위해 한달음에 달려와 준 것이다.
절박하기까지 한 소포니악 사람들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레이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걱정하지 마. 나 잘하고 있으니까. 빨리 끝내고 올게.”
증거 위조 여부 판독만 하면 판결이 나올 것이니 재판은 거의 마무리가 된 상황이었다.
“대체 여긴 왜 데려온 거래요? 다들 별 이유도 없죠?”
“증인 같은 건 안 필요하세요?”
“저희가 도울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혹시 필레가 모함했나?”
“그런 거라면 그놈은 아주 천벌을 받아야지!”
“필레 그놈은 어떻게 됐어요?”
소포니악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레이는 표정을 어찌해야 할지조차도 생각이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웃어도, 울어도 이상할 상황인데 둘 다 해도 될 것 같은 상황.
‘그런데 여기서 울면 진짜 이상해질 것 같은데.’
코가 찡해 오니 큰일이다.
“여긴 어떻게 왔어? 다들 바쁘잖아.”
“기차 타고 왔지요!”
그 말이 아닌데…….
찡한 와중에 웃음이 튀어나왔다.
사람들의 이야기 주제는 빠르게 바뀌었다. 기차를 처음 타 본 일부 사람들의 첫 탑승 후기와 경험이 있는 자들의 인생 기차 여행기가 이어지더니, 자기들이 어떻게 시간을 빼냈는지 수도까지 오는 여정이 하나의 커다란 에피소드가 되어 레이에게 들려오고 있었다.
직장에서 잘릴 각오까지 하고 최대한 돈을 쥐어짜 내서 혹은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 빌리기까지 하면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망설임 없이 달려왔다는 이야기였다.
시종일관 밝은 분위기로 이야기했지만 해고를 감수하고 달려오기까지의 과정을 듣는 레이는 결국 눈물을 뚝뚝 떨궜다.
“아이고, 이걸 어째…….”
“울지 마세요, 알렉스 님.”
“이러려고 이야기한 게 아닌데.”
“으흑, 내가 뭐라고, 여기까지 힘들게 왔어. 흑, 갈 때는 또 어떡하려고.”
“뭘 그런 걸 다 걱정하세요. 오는 것도 잘했는데 가는 걸 못 갈까 봐요?”
“아이참, 그만 우세요. 저까지 눈물 나요오.”
펑펑 우는 레이를 도닥이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소포니악 사람들이 짠 것처럼 한순간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
“……흡.”
그러나 다물린 입과 달리 그들의 눈동자는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