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재판 (4)
다른 이들처럼 조용히 뒤에서 레이를 지켜보던 라미엘이 등장했다.
“레이, 진정해요.”
아내가 우는 모습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라미엘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자 레이는 그의 품에 기대 더 훌쩍거렸다.
시끄럽던 소리가 갑자기 칼로 자른 것처럼 뚝 끊기자 재판장 안 참관인들까지도 의아해하며 그 근원을 흘끗거렸다.
“천천히 심호흡하고.”
라미엘의 말에 레이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레이의 푸른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투둑 떨어졌지만 더 이상 파란 하늘에 비가 고이지는 않는 듯했다.
레이가 완전히 숨을 고르고 진정하고 나서야 라미엘은 고개를 들어 아내를 구하려고 달려온 사람들의 모습을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다들 넋이 나간 얼굴로 입도 다물지 못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는 자신의 정체를 알리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저들이 이곳까지 온 이상 더 이상 감출 수는 없었다.
그래서 라미엘은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 숨을 수 있었다 해도 아내가 우는 순간 테일러를 보낸다든가 하는 방책과 뒷일 같은 건 생각 않고 달려 나갔을 것이다.
“……내 남편이야.”
레이가 라미엘을 소포니악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나 결혼했어. 눈 튀어나오게 엄청 잘생긴 남편이 있는데?”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눈이 튀어나오다 못해 눈알이 혼자 데구루룩 앞구르기 뒤구르기를 할 정도의 미남이었다.
사람은 맞을까. 저렇게 조각같이 생긴 게 어떻게 인간일 수가 있지.
내가 죽어서 천국에 와 있는 건가.
레이를 바라보는 눈빛이 맑은 영혼을 천국으로 안내하는 천사님 같았다. 사랑스럽게, 따뜻하게, 이 세상 모든 다정함을 꾹꾹 눌러 담아 낸 눈이다.
레이가 이어 라미엘에게 사람들을 소개했다.
“라엘, 여기는 소포니악의…… 내 가족 같은 사람들이에요.”
레이의 따스한 소개에 사람들은 멍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가족 같은 사람들.
예상도 못 한 따뜻한 표현에 찡해진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천사님의 고아한 목소리가 묵직하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내 아내를 위해 여기까지 힘든 걸음 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지.”
“아, 아니, 아닙니다.”
“당연한 일인데요.”
알렉스 님의 부군은 외모도 외모지만 가지고 있는 기색이 보통이 아니었다. 저런 사람이 귀족이 아니면 누가 귀족일까 싶을 정도로 사람을 찍어 내리는 듯한 위압감이 있었다.
‘이런 게 정말 귀족이라는 건가.’
레이가 워낙 편하게 다가왔기에 미처 몰랐던 특유의 분위기가 주변에 넘실거렸다.
“테일러. 저택으로 모셔.”
“네. 준비하겠습니다.”
재판이 마무리되는 동안 소포니악 사람들을 루이반에서 대접하겠다는 말이었다.
“재판 금방 끝나. 내 걱정 말고 편하게 쉬고 있어.”
레이의 말에도 다들 어벙한 얼굴을 풀지 못했다.
‘분명 저택으로 ‘모시’라는 말을 들었는데…….’
소포니악을 위해 애써 준 검은 머리 레이디를 지키려 했던 것뿐인데 뭔가 굉장한 것을 답례로 받는 기분이었다.
라미엘의 명을 들은 테일러가 나섰다. 공작이 모시라고 존중했으니 그 역시도 눈앞의 사람들을 정중히 대해야 했다.
“저는 테일러 윌리그엄이라고 합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윌리그엄이라니. 눈앞의 짙푸른 곱슬머리를 가진 남자에게 성이 있다는 건 저자도 귀족이란 소리였다. 귀족에게 존대를 받을 거라고는 평생 생각도 못 했다.
모든 일이 얼떨떨했다. 레이가 보통의 귀족이 아닌 걸 눈치채긴 했지만, 귀족을 부릴 만큼의 위력을 가졌다는 건 자신들이 예상한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었다.
재판 소식을 들었을 때, 소포니악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높은 레이의 신분에 크게 놀랐다. 수도의 귀족 재판장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는 건 검은 머리 레이디가 단순히 부유한 가문의 여식이 아니라 귀족이었다는 말이다.
‘루이반!’
그리고 글을 읽을 줄 아는 양성소 사람들은 레이알렉시스 루이반이라는 이름에 소스라치게 놀라야 했다. 대귀족이란 수식어를 달아도 무방한, 초대 황제의 건국 때부터 함께하던 가문으로 이런 구석의 사람들까지 아는 이름이었다.
이어 떠올린 건 그녀가 귀족이란 게 밝혀졌으니 이전 고민처럼 사람들이 소포니악 집정관을 수도 귀족이 내몰았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재판 소식을 들은 소포니악 사람들은 먼저 빈민가로 한달음에 달려와 검은 머리 레이디의 정체와 소식을 전했다.
그들 역시도 레이의 정체에 충격을 받았지만 그걸로 레이에 대한 시선이 바뀌지는 않았다.
“그분이 그렇게 되셔선 안 되지.”
“필레가 그 난리를 친 걸 그분 아니었으면 영영 모를 뻔했잖아.”
“우린 지금 수도 귀족 재판소로 가려고 해. 가서 항의할 거야. 자네들도 갈 건가?”
……라며 먼저 권유하는 것을 보고 그간 괜한 걱정을 했다는 걸 알았다. 그들이 생각하는 관점도 자신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든 귀족이 다른 사람들을 무조건 무시하며, 거만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레이 같은 귀족도 존재했다.
그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소포니악 빨래방은 대거 인원이 빠진 관계로 개업 이래 처음으로 하루 휴업을 했고, 소포니악의 중심지엔 수도까지 가는 사람들을 배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의 마음을 전달받아 이 자리에 온 사람들은 황실이라고 착각할 만한 엄청난 저택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소포니악 사람들이 저택에 도착했을 무렵, 판결이 진행되고 있었다.
“판결하겠습니다. 본 법정은 길드장 모셀에게 징역 1년과 벌금으로 받은 뇌물의 두 배인 1라블을, 코리에겐 마찬가지 징역 1년과 벌금 3천만 파브를 선고합니다.”
변호사를 선임한 덕인지 길드 쪽 2인은 비교적 선처를 받았고, 재심을 청구할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레이알렉시스 루이반 공작 부인은 무죄입니다.”
판사는 이어 타 도시에 공헌한 공로를 칭찬하는 말을 이었다. 서기들이 바지런히 손을 놀려 판결문을 종이에 담았다. 판결문은 리담의 중요한 사료로 취급되기 때문에 황실 산하의 사고에 보관되는데, 이로써 레이의 업적은 영원히 리담의 역사로 남게 되었다.
아마 판사가 주절주절 레이의 업적을 말한 건, ‘내가 이렇게 레이알렉시스의 업적을 역사에 남기게 했잖니, 그러니 제발 이번 건을 용서해라.’ 하는 의미로 레이에 대한 미안함과 루이반 공작을 달래는 용도였을 것이다.
판사의 판결문 낭독이 끝나고 서기가 본 재판을 마무리했다는 징표로 서류 마지막에 법원 표시를 새긴 인을 찍었다. 그와 동시에 테일러가 자리로 돌아와 소포니악 사람들에 대한 보고를 올렸다.
대강의 일이 모두 마무리되었으니 이제 준비한 일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라미엘은 퇴정 선고를 하려는 판사를 향해 말했다.
“재판을 신청하지.”
레이가 재판을 준비하는 동안 라미엘은 쓸데없는 일로 기 싸움을 걸며 아내의 구금에 서명한 법관 셋을 무너뜨릴 준비를 했다.
“전 집정관이 말한 정황이 제법 상세했습니다.”
“허투루 서명한 게 절대 아닙니다.”
“그 소문이 확실하니 구금을 한 겁니다. 공작 각하. 어디 제 맘대로 법을 다룰 수가 있겠습니까.”
법관 셋에게 구금 명령에 대한 이유를 물으니 나온 대답이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자신들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꼴을 보고 라미엘은 더 기가 찼다. 저렇게 멍청한 놈들이 법관이라고 앉아 있으니.
이번 기회에 귀족 재판 법관들이 대거 물갈이 될 것이다.
게르카 남작은 돈을 받고 도주 가능성이 있는 범죄자의 구금을 풀어 줘 그가 도망가게 했다. 그 일은 정황 증거는 있지만 실질적인 증거가 없어 유야무야 넘어간 사건이 되었고 범인은 아직도 오리무중이었다.
라미엘은 이 건을 파고들었다. 다들 귀족 법관이 저지른 일이니 서로를 감싸느라 제대로 사건을 돌아보지 않았지만 라미엘은 달랐다.
몬순 공작가의 정보 길드를 이용해 도망간 범인의 신원을 찾았고 그를 감옥에 가둬 둔 상태였다. 레이의 재판이 끝나면 바로 소장을 제출해 범인을 끌고 나올 예정이었다.
브루군 후작은 후작 부인에게 불륜 증거물이 담긴 서신 한 장을 보내는 것으로도 해결이 가능했다. 그는 부인 덕에 호화 생활을 누리면서 뒤로는 온갖 여자들을 홀리고 다니는 한량이었다.
수도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특히나 후작 부인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의 부인은 배우자의 외도를 아주 싫어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만약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이혼도 불사할 사람이고, 실제 권력은 부인 집안이 더 세니 그는 서서히 몰락할 것이다.
남은 하나, 어트 백작은 마찬가지로 몬순가 정보 길드의 이름만 잠시 빌려 어트 백작가가 예전에 비해 어렵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처음에 몬순가는 헛소문을 낸 정보 길드가 되면 앞으로 장사하기 어렵다고 고사하려 했었다. 하지만 라미엘이 필요한 건 진위 여부와 상관없는 소문 그 자체이기에, 누군가 길드에 저 소문의 진위를 묻는다면 아니라고 해도 된다는 확언을 주었고 그 후에야 몬순은 이름 사용을 허락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헛소문이라 여기다가도 그 소문의 출처가 정확성으로 유명한 정보 길드니 진위를 확인해 볼 생각도 않고 거의 확실하다 여겼다.
어트 백작이 실제로 힘들지 않다면 은행권이나 길드의 대출을 이용할 일이 없이 그저 헛소문으로 넘겨 버리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진실인 양 제대로 퍼진 소문은, 아직도 레이가 일각에서 마녀라고 불리고 있는 것처럼 계속 그를 따라다닐 터다.
실제로 금융 길드에서 확인을 위해 몬순가 정보 길드에 접촉을 해 왔고 헛소문이란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여론이 시끄러우니 사실 여부를 떠나 어트와 접촉하긴 찝찝한 노릇이었다. 당연한 수순처럼 어트 백작은 당분간 은행이나 금융 길드를 이용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루이반 공작을 짓누르려 한 일이었는데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던 그들은 뒤늦게야 라이트 백작가의 몰락을 떠올렸다.
서명을 하지 않은 법관 둘은 앞으로 쥐 죽은 듯 조용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무엇 하나라도 잘못을 저질러 건수가 생긴다면 숨죽여 기다리고 있던 루이반 공작이 당장 튀어나와 물어뜯을 것이니 말이다.
***
루이반에서 만찬을 끝내고 라비던 역 관광까지 마친 소포니악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됐다. 수도의 유일한 커다란 역사를 모두 구경하고 나니 헬라행 열차가 들어왔다.
열차에 오르기 직전 티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알렉스 님. 소포니악엔 이제 안 오시는…….”
만찬 동안 호칭이 정리되었다. 다들 루이반에 있는 내내 너무 놀라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데, 레이가 먼저 공작 부인 말고 알렉스라 불러 달라고 말했다.
처음엔 저 루이반 공작도 꼬박꼬박 존대를 하는 알렉스라는 존재에게 절대 함부로 굴면 안 되겠다고 경계했지만, 레이가 평상시처럼 내내 친근하게 대해 줘서 그녀의 소원대로 호칭 정도는 꼭 공작 부인이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다만 그뿐이었다. 호칭 외로는 너무 벌벌 떠는 모습이라 레이는 조금이라도 저들의 숨이 트이게 루이반을 벗어나 라비던 역으로 와서 남은 시간을 보냈다.
“왜 안 가? 내가 양성소 소장인데 당연히 자주 가야지. 그리고 나 소포니악 집정관 후보도 찾아야 해. 바빠.”
레이의 말에 양성소 사람들이 크게 안심한 얼굴을 했다. 레이가 정체를 밝히면 다신 자신들의 동네에 오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내내 침울해 있던 그들에겐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다들 괜찮다고 극구 사양했지만 레이는 모두가 탈 기차표를 구입해 주었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앞으로 다신 이렇게 표 사 줄 일 없어!”
“저희도 그래요. 살 떨려서 다신 직장 못 걸겠어요.”
레이가 애쓰는 걸 알았는지 사람들은 이전처럼 그녀를 대하려고 노력했다.
“오늘 덕분에 정말 든든했어. 다들 고마워.”
레이의 진솔한 인사를 끝으로 열차는 라비던을 힘차게 떠났다.
며칠 내로 또다시 만날 사람들이지만 레이는 그 자리에 서서 열차가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눈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