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추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처음 꽃봉오리를 본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온 꽃나무가 저마다 색을 내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꽃이 피면 티파티를 해 보려고 했는데…….’
법안 때문에 귀족들 사이에서 외로운 섬이 되어 버린 지금으로선 아무 목적 없는 단순 티파티를 연다고 한들 아무도 루이반에 오지 않을 것이다.
“케이틀린 말고는 올 사람도 없겠다.”
그래도 이런 상황과는 달리 케이틀린이 만든 지하 조직, 여성 작위 승계를 위한 모임인 ‘테가푸스’는 은밀하게 성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이제 목표는 어떻게든 그들이 지상으로 올라오게끔 하는 것인데 여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쉽지 않을 일이다. 그런 사람들을 티파티 하나 하자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라엘하고 둘이 꽃놀이하는 걸로 해야겠다.”
말로 내뱉고 나니 마음에 드는 일정이다. 레이는 흥얼거리며 서류에 사인을 했다.
소포니악에 임시로 마련했던 집은 아예 레이의 거주지가 되어 버렸다. 아직도 후보자를 찾지 못해서 레이는 일주일 중에 거의 닷새 가까이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집정관 추천을 위해 파칸을 찾아왔다가 그를 도와 소포니악 일을 하게 되었고 이후 자연스레 집정관 대리 일을 하게 되었다. 파칸은 레이를 부릴 생각이 없었고 레이도 집정관 일을 하겠다고 한 적이 없으나 정신을 차려 보니 이 상태였다.
그나마 게이트와 통신기가 있어 라엘과 시간이 맞을 때 틈틈이 대화도 하고 매일 밤 함께 자고 올 수 있어서 다행이지, 이 둘이 없었다면 생각도 못 할 거주였다.
“이놈의 동네. 내가 집정관 양성 학원이라도 차려서 후임을 키우든가 해야지.”
리담 최초의 로펌 사업은 이미 특허가 신청된 사업이었다. 지금은 징역을 살고 있는 그때의 정보 길드장이 재판 전에 재빠르게 선점을 하고 감옥에 갔다.
“머리는 좋은 놈이야.”
아마 저 변호사 사업을 구상하고 그걸 홍보하기 위해 일부러 꼬리를 남겨 재판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런 머리를 쓰는 사람이 필레같이 멍청하게 구는 남자의 손에 놀아날 리가 없을 테니까.
“아. 정말 그럴까. 한국 공무원 학원처럼 집정관을 원하는……. 관두자.”
집정관 양성소가 생기면 이래저래 검은 것들이 꼬여 들 온갖 가능성이 너무 높다. 이건 빠르게 포기.
필레가 왜 그리 자만했는지, 멍청하게 굴었는지 레이는 본격적으로 소포니악에 있으면서 뼈저리게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정치 행정에 대한 이해가 거의 전무하고 유독 이런 쪽으로 발전이 느린 소포니악의 특색 탓에 행정 업무에 대한 조금의 이해도 없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그러니 필레가 예산을 아껴서 집을 샀다는 말 같지도 않은 멍청한 소리에 잠시나마 흔들렸던 것이다.
이 도시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집정관이 무엇이고 어떠한 일을 하는지 이해하는 것이었다.
델마같이 친구처럼 편안하게 도시에 스며들어 생활하는 집정관이 있으면 자연스레 몸으로 배우고 익히게 되는데, 문제는 그 델마와 비슷하기라도 한 사람이 소포니악에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도시는 라 헬라의 반 토막도 안 되는 수준인데 라 헬라보다 더 까다로운 도시가 소포니악이었다.
“마님, 좀 쉬었다 하시는 건 어떠신지요.”
레이의 미간 주름과 계속되는 한숨에 케이가 먼저 휴식을 권했다.
“그럴까?”
레이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칸은 레이의 수고에 대한 부분에 분명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거의 집정관 수준으로 일하고 있으니 집정관 월급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필레가 남긴 유산이 없어 레이는 거의 ‘맨땅에 헤딩하기’라는 한국어가 딱 떠오르는 심경으로 일하고 있었다. 업무 시스템도 예산 굴리는 것도 전부 직접 해 나가고 있었다.
그나마 예산은 파칸이 자료를 잘 챙겨 줘서 파악이 됐으나 이후의 운용은 델마와 라미엘에게 각각 조금씩 도움을 받아 집행하고 있었다.
“알렉스 님! 계세요?”
딱 20분만 쉬려고 침대에 가는 순간 누군가가 레이를 찾았다.
“타이밍 예술이네. 응, 들어와.”
“지붕 공사 자재 쌓아 놓은 게 쓰러졌어요.”
“하, 그게 또? 다친 사람은?”
“사람은 안 다쳤는데 길이 엉망이 돼서…….”
“공사 끝날 때가지 자재 감독하는 사람을 써야겠네. 이건 또 어디서 예산을 끌어오지. 필레가 내놓은 집 아직 안 팔렸는데 그거를 잠깐 자재 창고로 쓸까.”
“그래도 돼요? 그럼 우리 얼른 그거 써요!”
“안 돼. 그냥 해 본 말이야.”
“왜 안 돼요?”
“도시 소유가 아닌데 어떻게 해. 그걸 예산으로 빌려 써야 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우리 돈이…….”
레이는 여자와 함께 나가면서 예산 운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집정관과 도시민의 대화였다.
***
“그 작은 도시에 왜 그리 손볼 데가 많은지 모르겠어요. 예산도 빠듯한데.”
밤 시간. 레이가 라미엘의 품에서 종알종알 오늘 있었던 일을 늘어놓았다.
“일을 할수록 당신이 더 대단하게 느껴지는 거 있죠. 소포니악은 하나지만 공작령은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데 어떻게 가주가 되자마자 그렇게 잘해 나간 거예요? 천재들은 원래 그런 건가.”
레이의 순순한 찬사에 라미엘은 웃음이 나왔다.
“이전부터 계속 봐 왔잖아요. 나는 저렇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있었고 가까이서 후작의 업무를 보기도 했었어요. 레이의 상황보단 수월한 편이었죠. 나보단 당신이 더 잘하고 있어요.”
같은 분야에서 최고로 잘하는 사람이 자신을 인정하는 발언에 레이는 예전에 훈련받을 때 칭찬을 들었을 때처럼 마음이 조금 들떴다. 잘하고 있다는 말이 비단 레이 전용 콩깍지가 씌어 그런 것만이 아니어서 더더욱 그렇다.
“레이는 언제까지 그 일을 할 겁니까.”
라미엘의 말에 레이가 잠시 고민을 했다. 언제까지나 마냥 자신이 할 일은 아닌 건 확실히 알고 있는데 이렇게 어영부영 시간을 보낼 순 없었다.
“마땅한 사람도, 방법도 생각나는 게 없어요.”
“……마땅한 사람.”
레이의 말에 라미엘은 제 품 안에 있는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포니악 집정관에 그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다. 도시에 대한 애정도, 사람들을 잘 보듬는 것도, 행정에 대한 이해가 있는 것까지 완벽하다. 지금도 집정관이 하는 일을 레이가 수행하고 있지 않은가.
본인은 자각하지 못한 것 같지만, 집정관이라는 이름만 없을 뿐 레이는 이미 소포니악의 집정관이었다. 이 사실을 다들 모르는 건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모두가 바라는 이상적인 집정관이 검은 머리 레이디, 알렉스의 모습이라는 건 알 수 있을 것이다.
“마땅한 사람, 있잖아요.”
이 말을 꺼내기 전까지 라미엘은 아주 조금 갈등을 했다.
레이가 집정관이 되면 소포니악에 아예 자리를 잡게 될 테니 지금까지처럼 제 곁에 마냥 둘 수는 없다. 이는 분명 작은 헤어짐에 속하는 일이고 그가 바라지 않는 종류이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말해야 한다. 자신이 원한다고 억지로 잡아 두는 건 내키지 않았고, 분명 머지않아 레이도 깨닫게 될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잘 해낼 수 있는 능력자를 작은 제 욕심 하나로 주저앉히는 건 그 어떤 일보다도 싫었다.
“……나? 날 말하는 거예요?”
“레이는 이미 소포니악 집정관입니다.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레이가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를 이제야 깨달았다는 얼굴이다.
멍하니 있던 레이가 라미엘의 품을 빠져나와 몸을 일으켜 앉았다.
“맙소사.”
레이는 자신이 집정관 역할을 이미 수행하고 있다는 것에 놀란 게 아니었다. 본인조차도 집정관을 막연히 ‘남자’가 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었다.
“내가 정신이 나갔었네.”
작위를 받는 것도, 법관이나 파칸, 집정관 같은 사회적 명망이 있는 직업도 모두 남자가 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환경에 있다고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이런 부분에 민감하다고 여겼는데.’
남편은 자신을 보고 여성 작위 승계를 법안으로 내기까지 했는데 정작 당사자는 잠시 눈이 멀어 있었다.
레이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지금에야 임시직같이 일하고 있지만 만약 확실하게 소포니악 집정관이 되면 필연적으로 루이반을 떠나야 한다.
“……그럼 나 소포니악에 있어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물어보는 당사자의 눈이 더 안 괜찮았다. 자신보다 더 참담해 보이는 레이의 눈빛에 라미엘은 다시 웃음이 나왔다.
“라엘 없으면 나 어떻게 살지?”
큰일이다. 이 남자가 곁에 없던 시절이 까마득해.
“아마 지금하고 같겠죠.”
라미엘도 몸을 일으켜 세우고 레이를 끌어안았다.
“낮에는 각자 자기 일을 하고, 밤에 이렇게 같이.”
주말 부부도 아니고 이건 뭐라고 하냐. 밤 부부? 게이트 부부?
“……라엘, 나 마음의 준비가 좀 필요하겠어요.”
***
집정관 추천 공고가 붙었다.
이대로 가다간 소포니악이 내내 행정 부재로 가게 될 것 같기에 파칸은 일단 추천을 받겠다는 강수를 두었다.
본디 집정관은 사람들이 거론하는 후보자들이나 지원자를 후보로 추린 뒤 집정관을 뽑는다는 공고를 붙이는 방식이었으나 이번은 조금 달랐다.
남아 있는 두 달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지금 뽑힌 임시 집정관을 도시민들이 잘 지켜보고 이후 정식으로 임명할지, 아니면 재추천을 받아 새로이 정식 집정관을 뽑을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파칸이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필레 같은 놈만 나온다 하더라도 뽑아야 했다. 언제까지나 레이의 선의에만 소포니악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소포니악 사람들이 필레를 겪고 어느 정도 깨달은 게 있다는 것이었다. 예전처럼 필레 같은 사람을 마냥 두고만 보지는 않을 것이란 희망이 있었다.
소포니악 집정관 추천을 받겠다는 공고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필경사가 공고 내용을 읽어 주자 사람들이 저마다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모인 사람들도 꽤 많다는 것과 의견이 나온다는 것,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소포니악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 실감 나는 광경이지만 정작 모인 사람들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집정관 추천?”
“응. 얼른 뽑아야 한다고 하네.”
“하긴, 집정관이 없으니까.”
“꼭 있어야 해? 있어 봤자 필레 같은 놈이 해 처먹기나 할 거 아냐.”
“생각해 보니, 음. 그러게. 지금 없는데도 괜찮은 걸 보니 없어도 될 것 같기도 하고.”
“아이고, 그게 무슨 큰일 날 소립니까. 집정관이 없으면 도시 대표는 누가 해요?”
“대표 좀 없으면 어때요? 그게 중요한가?”
“맞아. 필레가 일을 하긴 했나? 지금도 봐. 아무도 없는데 별문제 없잖아.”
“그렇다고 노 아르망에 우리만 빠지면 돼요?”
“아, 그건 또 체면 상하는데…….”
“어차피 노 아르망에 내가 나가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에요.”
노 아르망은 매년 파칸과 집정관들이 모여 하는 연례회였다. 열흘간의 일정으로 연간 보고나 지역 안건을 다루는 전체 회의를 나흘 하고 이후 엿새는 파티를 했다.
여덟 개 도시를 돌아가며 개최했고 수도 귀족들이나 황제 혹은 황실 일원이 참석하는 큰 규모의 화려한 행사였다. 일각에선 노 아르망에 참석하려고 집정관이 되겠다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분은 누굴 추천하신대?”
“누구, 아하, 알렉스 님?”
“그러게. 알렉스 님은 누굴 추천하시지?”
“알렉스 님이 추천하는 사람을 해야겠어.”
“맞아. 알렉스 님이 제일 잘 아시잖아.”
“소포니악은 아무래도 그분이 잘 아시긴 하지. 우리 인연도 있잖아?”
소포니악 사람들이 난생처음으로 추천서를 쓰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때 상황을 계속 지켜보며 구석에 서 있던 남자가 한마디 했다.
“뭔 소리야, 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