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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24화 (124/160)

124화. 임시 집정관

모여 있던 사람들이 구석으로 시선을 주었다. 묵직한 저음의 남자는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요 근래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자였다.

오늘은 어인 일인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는 가뜩이나 그늘진 구석에 서 있어 마치 그림자 같아 보였다.

“본인들이 추천할 사람은 없어? 여기 일이잖아.”

이해할 수 없는, 의아하단 눈동자가 후드 안에서 반짝였다.

“그야 알렉스 님이 우리보단 여기 일을 더 잘 아시니까…….”

“그게 자랑이야?”

남자의 말에 사람들은 말을 잃었다. 자신의 일인데 남에게 의탁하고 있으니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집정관이 없긴 왜 없어? 그분이 지금 집정관 일 하고 있고만.”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한마디 툭 던진 남자는 헙, 하고 입을 다물었다. 마치 말을 하려던 것이 아닌데 저도 모르게 튀어나갔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근데 그쪽은…….”

사람들이 그림자 남자의 정체를 물으려는데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 저도…….”

필경사 양성소를 다니고 있는 나움이었다.

그녀는 빈민가 사람은 아니었지만 글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으로 부모의 반대를 피해 몰래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이었다. 부모가 몰라야 했기에 마을 사람들도 몰라야 해서 레이가 신경 써서 숨겨 주며 관리하고 있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혈질에 괄괄하고 드세기로 유명한 부모와 달리 조용하고 얌전하기로 유명한 나움이 목소리를 냈다.

“알렉스 님이 집정관을 해 주고 계시니까 필요 없다고 느끼시는 거죠.”

조곤조곤 나움이 말을 이었다.

“우린 빨리 후보를 찾아야 해요.”

***

임시 집정관을 구하기 위해 이런저런 이름들을 거론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소포니악 사람들이 하나둘, 레이를 찾아와 당신을 추천해도 되겠냐 조심스레 양해를 구하기 시작했다. 거론되는 자들이 레이만큼 잘 해낼 것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임시 기간까지만 도움을 받고 이후는 절대 손을 벌리지 않겠다고 해서 레이는 그 제안을 수락했고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집정관 자리에 올랐다. 임시 직책이긴 하지만 최초의 여성 집정관이 탄생한 것이다.

소포니악 집정관이 되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레이는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잘해야 다른 여성이 집정관에 오르기 더 수월할 것이다. 처음의 역할이 중요한 시기다.

사각사각. 레이의 서명이 끝났다.

“됐다. 이제 공고 붙이자.”

집정관 추천에 오른 순간부터 생각했던 걸 드디어 실현하는 날이었다.

「주 1회 휴일 도입」

소포니악 사람들의 주요 일터 중 하나는 빨래방이었다. 빨래를 하는 공간과 옷감을 말릴 넓은 터가 필요하기에 땅값 비싼 수도엔 대부분 소규모 빨래방만 있었다.

소포니악 빨래방은 수도 인근의 유일한 대형 빨래방이기에 맡겨지는 빨랫감도 어마어마했다. 라 헬라를 통해 일이 넘어오는 방식이었는데, 일감도 많고 일이 워낙 고되니 골병이 드는 직원이 허다했고, 병이 나서 손을 못 쓸 지경이 되어서야 잠깐 쉴 수 있었다.

리담은 일정한 고정 휴일이 없다. 노동자들이 쉬는 건 급한 사정이 생겼을 때 사전에 말을 하고 일을 빠지는 것뿐이었다. 소포니악 빨래방은 쉬지 않고 계속 몸을 사용하는 일이니 체력을 회복할 시간이 더더욱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몸이 아주 고되지 않은 일을 하더라도, 사람이 일을 하기 위해선 휴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한국에서 배웠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휴일의 중요성을 몸소 체감했던 레이는 한국처럼 주 5일 근무제를 바로 적용할 순 없어도 일주일 중에 하루라도 휴일을 도입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레이는 가장 먼저 빨래방 관련자들을 만나서 긴 면담을 했다. 그들은 매출이 줄어든다며 반대했지만, 그전보다 업무 효율이 떨어진다면 그 부분은 보상하겠다는 레이의 호언장담에 한 달간 지켜보겠다는 약속을 했다. 일종의 시범 기간을 얻어 낸 것이다.

소포니악의 가장 큰 업체인 빨래방이 동의한 뒤, 레이는 헬라 파칸인 조이먼과 라 헬라 집정관 델마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 두었다. 조이먼도 델마도 이해를 못 하는 반응이었지만 그들의 이해를 구하고자 보고한 건 아니었다. 현재 소포니악이 주로 교류하는 도시가 라 헬라고 이러한 두 소도시를 모두 맡아 관리하는 것이 헬라이기에 공식 서류를 보내 알린 것이었다.

휴일의 시작을 모두에게 알리기 위해 레이가 관사를 나섰다. 관사는 레이가 계속 사용 중이던 소포니악 집이었지만, 집정관이 되었기에 보안을 위해 벽을 두터이 하는 공사를 해 방음에 한층 신경을 썼다.

“가 볼까.”

마을 게시판에 공고를 붙여 둘 것이지만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니 말로 직접 알려야 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시판을 향해 레이가 몸을 일으켰다.

무조건 하루를 쉰다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그들은 레이의 거듭되는 설명에 겨우 이해를 했다. 일을 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하루의 휴식이란 말에 드디어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레이가 말한 게 사실인지 몇 번이나 물어 확인했다.

“정말 그래도 돼요? 아무 말도 안 하고 하루를 그냥 쉰다고요?”

“응. 그냥 매주 이 하루는 일 안 하고 쉬는 그런 날이야. 휴식하는 날. 휴일이라고.”

“그날 그럼 일터 업무는 누가 해요?”

“아무도 안 해. 아무도. 일을 시키는 사람까지 다 같이 쉬니까 업무를 줄 수도 없잖아.”

“다른 곳에서 우리한테 일거리를 안 주면 어떡해요?”

“우리 업무적으로 얽힌 곳은 라 헬라뿐인데 거기에 미리 양해를 구해 뒀어.”

“알렉스 님은요?”

“나도 당연히 쉬지. 그런데 긴급한 일이 생기면 할 거야.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고.”

“하루 일을 쉬면 그 손해는 누가 감당합니까?”

“당장 손해일 것 같지만 달라. 나 믿어 봐. 딱 한 달만 지나고, 그러니까 네 번만 쉬어 보고 휴일 도입 전후 생산성 비교해 봐. 사람은 좀 쉬어야 업무 효율이 높아져.”

“그걸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정말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이쪽의, 그러니까 바깥일을 안 해 보셔서 아직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아, 일단 쉬어! 쉬고 나서 말해!”

결국 이렇게 일단락 지을 수밖에 없었다.

***

“혹시 소포니악 소식 들었어요? 지금 헬라 소속 도시인 소포니악의 집정관이 여성이라고 합니다.”

테가푸스 회원 하나가 놀라운 이야기를 전했다. 여성 집정관이라니.

모두가 놀라서 떠들썩해졌다. 그들이 원하는, 여성의 작위 승계와 거의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남자들의 영역이었던 곳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 자가 나타났다니.

“여자라고요? 맙소사.”

“정말 세상이 바뀌려는 건가 봐요.”

“어떻게 추천을 받은 거죠? 여성 후보자를 받아들이다니. 그것부터 놀랍군요.”

테가푸스 회원들은 현재 사람들의 눈을 피해, 헤가 백작 가문의 라 헬라 별장 응접실에 모여 있었다. 한두 달에 한 번씩 청소나 하는 게 관리의 전부인, 거의 방치하다시피 하는 작은 건물이기에 몰래 모이기 제격이었다.

“정식 집정관은 아니고 정식 임기까지 잠깐 임시로 맡고 있대요.”

다들 작게 탄식을 했다. 임시라면 정식 집정관이 왔을 때 자리를 비켜 줘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도 일단 한 걸음 내디뎠잖아요. 그게 대단한 겁니다. 처음부터 잘 될 순 없어요.”

실망하는 사람들을 다독이는 건 케이틀린이었다.

“타 도시에서 능력을 보고 임시나마 여성을 집정관으로 세웠다는 건 우리 모두 예상 못 했잖아요? 이거 큰 수확이에요.”

케이틀린의 말에 최근에 입회한 새내기가 동조했다.

“마, 맞아요. 그분이 나중에 임시가 아니게 될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좋은 사례가 되는 겁니다. ‘작위’와 다름없는 자리를 수도보다 먼저 얻으신 거잖아요.”

다들 수도 귀족들의 작위에만 집중하고 있었기에 소도시의 리더가 도시민들의 추천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미처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분…… 수도 귀족이신데요.”

“네?”

“그게 무슨 말이죠?”

“그분이 수도 귀족이라뇨?”

“소포니악 임시 집정관님, 루이반 공작 부인이세요.”

별장이 소리 없는 경악으로 뒤집어졌다.

***

“왜 말씀 안 하셨어요?”

케이틀린의 질문에 레이가 볼을 살짝 긁적였다.

“굳이 말할 것까진 없는 것 같아서 그런 건데…….”

케이틀린이 소포니악으로 온다는 연락을 받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그녀가 레이의 집무실에 당도했다.

케이틀린이 방문 전에 연락을 미리 넣은 건 그저 최소한의 예의를 차린 것일 뿐, 마음 같아선 소식을 들은 그 순간 당장 달려오고 싶었다.

“제가, 저와 공작 각하께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아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확정이 아니라 임시직이라 섣불리 알리기 애매했거든. 그리고 분명 오래지 않아 소문이 다 돌 테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어. 미안해.”

생각보다 소문이 안 나고 있어 놀랄 따름이었다. 수도 귀족은 정말 타 지역에 관심이 없는 듯했다.

“아니, 아녜요. 알렉스께 사과받으려 한 건 아니고. 그냥 이렇게 좋은 소식이 있는데 저한테 말씀도 없으셔서 조금 서운했나 봐요. 저야말로 무례하게 굴어 죄송합니다.”

케이틀린의 사과에 레이가 미소로 답했다.

“진전은 좀 있어?”

“회원이 조금씩 늘고 있어요.”

“정말 좋은 소식이네.”

레이가 웃으며 축하를 했다.

“알렉스께서는 어떠세요? 혹시 지금 여기 이 관사에서 머무시는 거예요?”

“응. 소포니악 집정관이니 여기 있어야지.”

“공작께선…… 괜찮으세요?”

루이반 공작이 어떻게 이런 일을 받아들였는지 놀라울 일이었다. 자기 아내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는 사람이 퍽이나 이런 생활을 받아들였다니.

“그래서 휴일엔 꼭 루이반에 있어.”

레이는 매일 밤 게이트를 통해 라미엘 품에서 자고 있으며, 휴일엔 기차로 꼬박꼬박 루이반으로 향했다.

“휴일이요?”

“우리 소포니악은 엿새간 일하고 그다음 날 하루는 쉬는 게 규칙이야.”

레이가 간략히 휴일에 대한 설명을 했다. 케이틀린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노동을 해 본 적이 없으니 아마 잘 와 닿지 않을 것이다.

귀족은 귀족이라는 것 자체가 직업이다. 본인의 영지를 굴리는 일을 한다고 하지만 굴릴 사업체가 없거나, 일이 많은 연말연시를 제외하고는 쉬고 싶을 때 얼마든지 쉬고 아무 때나 휴가를 갈 수 있다.

그러니 휴식의 중요성을 그리 못 느낄 것이다. 레이 역시도 한국에서 겪어 보지 않았다면 휴일의 필요성을 알지 못했을 수 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아주 가끔 알렉스가 다른 세상의 사람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어요.”

케이틀린은 통찰력도 대단했다.

레이는 속으로 뜨끔하며 차를 마셨다. 정확히 맞힌 건 아니지만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제가 행하는 것들은 모두 한국에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도 가끔 그렇게 생각해.”

레이의 말에 케이틀린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나더니 이어 케이가 보고를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님 보호차 케이와 엘도 함께 관사에서 머물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집정관님, 파칸께서 보내신 보좌관이 미리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찾아왔습니다.”

레이의 업무를 도울 임시 보좌관이 도착했다. 필레가 소포니악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에 손봐야 할 게 너무 많았는데, 이 부분에 도움을 줄 사람을 파칸이 보내 준다고 했었다.

“제가 시간을 잘못 잡았나 봅니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케이틀린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 편히 앉아 있어. 보좌관 출근은 내일부터라서 지금 잠깐 인사만 하려는 거야. 들어와.”

레이의 말에 문이 열리고 스물 중반쯤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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