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보좌관 도베
실내를 연신 두리번거리던 남자는 레이와 눈이 마주치자 어벙한 얼굴을 했다.
도베는 조이먼 직속의 관리부에 있던 자였다.
소포니악 집정관의 비위 사실 고발 이후, 헬라는 도시 전체의 지도자 검증을 했고 그 때문에 조이먼 휘하의 부서 인원 전원이 과로에 과로를 거듭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소포니악으로 업무 지원을 하는 파견 출장을 가 있으라니, 이건 지금 업무에 비하면 휴가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소포니악 임시 보좌관 지원자는 꽤 여럿이었고, 그들과 치열한 경쟁 끝에 따낸 일이었다.
도베는 업무 준비를 위해 출근이 예정된 날보다 하루 일찍 소포니악에 왔고 자신의 상관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미리 인사라도 올리려고 집정관에게 인사 보고를 한 상태였다.
소포니악의 집정관은 그의 보고에 긍정적으로 답변했고 그게 지금의 결과였다.
그런데 관사 집무실 안에는 집정관은커녕 여성만 둘 앉아 있었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집정관님은 어디 계시지?’
그때 도베를 향해 다가온 검은 머리 여성이 입을 열었다.
“그대가 파칸이 보낸 보좌관인가?”
레이의 질문에 도베가 멍청한 목소리를 냈다.
“에? 네?”
“그대가 내 보좌관이 될 도베가 맞느냐고 물었는데.”
레이의 말이 머릿속에 입력이 되질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지금 ‘내 보좌관’이라고 했지?’
도베가 머뭇머뭇, 마치 사실이 맞는지 확인하는 듯한 말투로 되물었다.
“집…… 정관님?”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너무 훤히 보여 레이는 피식 웃었다.
“내가 아니라 이쪽이 더 집정관 같아?”
손바닥으로 케이틀린을 가리키며 물었더니 도베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얼굴로 파드득 놀라며 ‘아,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자기소개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것 때문에 자네가 여기 미리 온 것이기도 하고.”
“앗, 넵! 저는 집정관님을 보좌하러 온 도베라고 합니다.”
“난 소포니악 집정관 레이알렉시스. 잘 부탁해.”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집정관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레이알렉시스. 여자 같은 이름이라고만 생각했지 여자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생에 없던 일에 머릿속에 혼란이 왔지만 도베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하며 표정을 관리했다.
“일찍부터 일 시킬 생각은 없으니 오늘 남은 시간은 소포니악이나 한번 둘러봐.”
“예, 알겠습니다.”
도베는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집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소포니악으로 출발하기 직전 뒤늦게 전달받은, 반드시 집정관을 먼저 뵙고 나서 보라던 작은 편지를 폈다.
「소포니악 집정관, 그분은 수도에서 루이반 공작 부인으로 더 유명합니다. 알고 가면 여느 사람처럼 편견을 가지고 볼 것 같아 지금 말합니다.」
‘이런, 미친……!’ 도베는 소리가 튀어나올 뻔한 입을 틀어막았다. 파칸이 루이반을 걸고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자신은 방금 루이반 공작 부인을 만나고 온 것이다.
‘이런 건 진작 말해 주셔야죠!’
까마득한 상관의 명이라고 너무 순진하게 따르기만 했나 보다. 그냥 진작 볼걸.
‘나 뭐 실수한 거 없었지?’
도베 역시도 수도 귀족에 대한 편견이 있기는 했다. 본 적도 만난 적도 없으니 사람들이 하는 말을 그렇구나, 하고 들어 넘겼던 정도의 편견이었다.
소문의 대부분은 작위가 없으면 사람 취급을 안 한다느니 몹시 교만하고 거만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방금 전엔 수도 귀족이 가진다는 특유의 거만함이나 불편함이 느껴지질 않았다. 너무 잠시만 봐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겠지만.
일단 집정관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도 화는커녕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보면 너그러이 조금 전의 무례를 용서했다는 말이고, 이는 그가 그동안 상상했던 수도 귀족과는 전혀 다른 행보기도 했다.
‘……이 정도는 봐주시는 건가.’
도베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조심, 또 조심이다.
***
“알렉스가 신기한가 보네요. 하긴 조금 놀랄 수도 있겠어요.”
도베가 나가고 케이틀린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여자 파칸, 백작, 공작 등이 줄줄이 나오면 기절이라도 하겠네.”
너무도 당연하게 작위를 받는 여성이 나온다는 레이의 말에 케이틀린은 응원을 받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본인을 공작 부인이 아닌 집정관이라고 소개하며 자신감 넘치는 눈빛을 하는 레이를 보니 여성의 작위도 멀지 않은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렉스 덕분에 제 세상이 조금 더 넓어지려고 합니다. 이 자리에서 업무 보고 계신 모습을 보니 제가 더 힘내야 할 것 같아요. 알렉스 집정관님, 지금 정말 멋있거든요.”
케이틀린의 칭찬에 레이가 아하핫, 하고 웃었다.
레이도 알고 있었다. 비록 임시지만 자신이 집정관을 한다는 사실이 케이틀린에게, 라미엘의 법안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기운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레이 역시도 같은 처지를 꿈꾸는 이들에게 큰 응원을 받는 기분이었다.
“내 존재로 힘이 된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 아니까 정말 제대로 잘 해내고 싶어진다. 고마워, 덕분에 나도 더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말로 전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알 수 있는 연대가 형성되었다.
“여기 온 김에 노을 구경하고 가. 숨겨진 동산이 있는데 거기서 보는 하늘이 너무 예뻐.”
“네. 같이 가 주시는 거죠, 집정관님?”
케이틀린의 말에 레이가 활짝 웃었다.
***
분홍 꽃잎이 레이의 머리 위로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여러 가지 일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봄은 소리도 없이 다가와 계절에 스며들었고 이내 꽃을 피웠다.
예년과 달리 유독 늦추위가 강했던 올해 봄은 아직도 조금 서늘한 기운이 남아 있을 정도였지만 그 서늘함 속에서도 꽃은 굳건히 움을 틔우고 하나둘 활짝 꽃잎을 벌렸다. 만개를 앞두고 있는 꽃봉오리들이 머리 위를 화사하게 덮었다. 여기저기 붉고 노란 꽃들도 정원에 점점 더 선명하게 새겨졌다.
꽃나무를 심었다기에 레이는 자신이 보고 좋아했던 벚꽃나무만 심었다고 여겼는데 정원 여기저기 여러 꽃나무를 심었던 모양인지, 이전의 루이반가에서 못 보던 광경이었다. 공작이 여기저기 꽃나무를 심으라 지시하기 전까지 루이반 정원은 언제나 푸르기만 했다.
“라엘, 당신 여기에 꽃잎이 떨어졌어요.”
레이가 라미엘 어깨에 떨어진 꽃잎을 손으로 톡톡 쓸어 냈다. 떨어져 나간 꽃잎은 하늘하늘 내려오더니 푸엥의 머리 위에 살포시 안착했다.
“나날이 정원이 화사해지네요. 너무 예뻐서 매일이 즐거워요.”
“일하다가도 게이트로 종종 와서 즐기고 가요. 레이 보라고 심은 거니까.”
밤에 찾아와 침실에만 있다 가니 정원의 화사함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건 레이의 휴일에나 가능했다. 피어나는 꽃들로 하루하루 화사하게 변해 가는 모습을 쭉 지켜볼 수 없어 아쉽긴 했다.
여느 때와 같은 휴일이었다. 점심 식사 후 정원으로 푸엥 산책 겸 꽃구경을 나왔다.
푸둥은 워크산 가는 데에 재미가 들렸는지 툭하면 저택에서 사라지는 일이 허다했다.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면서 겨울잠을 자던 짐승들이 깨어나고 여러 풀이 자라고 있을 테니, 삭막했던 겨울과 다르게 이것저것 볼거리나 즐길 것들이 많을 것이다.
마님이 소포니악에 계셔서 정원 꽃구경을 못 하신다고 걱정인 하인들은 정원의 꽃들 중에 상태가 좋은 것들을 추려 작은 꽃나무를 만들고 마력석으로 만든 투명한 상자에 넣어 선물했다. 마력이 다할 때까지 영영 시들지 않는 작은 꽃나무는 상자 그대로 레이의 집무실 책상 위에 놓였다.
저들의 선물은 감사의 의미였다. 레이의 손길이 닿는 곳은 이제 전부 휴일이 생겼고, 이는 루이반도 예외가 아니었다.
레이가 소포니악과 킹크랩, 광산 노동자들에게 휴일을 지정하자, 라미엘도 그 사안을 루이반 공작령 전체에 적용했다. 사정이 생겼을 때 상층부의 허락을 받아야만 쓸 수 있던 휴무가 아닌 공식적인 휴일이 루이반에도 생긴 것이다.
다만 레이의 휴일과 달리 루이반 소속 일꾼들은 각자 쉬는 날 하루를 넣은 일정을 짜서 공유했다. 모두가 하루를 온전히 비우면 저택을 관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 맞다. 라엘, 올해 노 아르망 조만간 열려요!”
노 아르망은 매년 열리는 행사지만 각 도시의 특성이나 상황에 맞는 계절을 골라 진행하는 방식이라 매회 개최 시기가 달랐다.
작년엔 목축업으로 유명한 빅터시안에서 열렸다. 좋은 고기를 먹으려면 빅터로 가란 말이 있을 정도로 고기로 유명한 빅터시안은 목초지와 산이 많고 지대가 높은 편이었다. 그래서 여름에도 서늘한 편이라서 피서 가기 좋은 도시였다.
이러한 도시답게 빅터시안은 여름에 노 아르망을 개최했다. 해산물로 유명한 루이즈가 겨울에 축제를 하듯 루이즈는 보통 겨울 시기에 노 아르망을 열고, 키즈웰은 도시 명물인 로프스 호수가 가장 아름다운 시기인 가을에 열었다.
각 도시에서 열리는 최대 행사인 만큼 도시 특색을 반영한 것이다.
올해는 헬라 차례인데 헬라는 수도인 라비던과 가까워 대연회가 열리는 가을을 피했고, 꽃봉오리들이 여무는 초봄, 딱 지금의 시기에 노 아르망을 개최하곤 했다. 다만 올해는 늦은 폭설 탓에 예년보다 조금 밀린 보름 뒤로 행사가 확정되었다.
“이번엔 헬라 스투라에서 한대요. 난 집정관으로 참석.”
노 아르망은 말로만 들었지 참석해 본 적은 없었다. 첫 참석인데 초대 손님이 아니라 집정관 자격으로 참가를 하게 되다니. 벌써부터 설렜다.
“라엘은 내 파트너.”
그간 행사는 모두 루이반 공작 부부로 묶여서 나갔다. 부부 동반의 공식 행사가 아니어도 레이의 직책은 ‘루이반 공작 부인’이었다. 공식 행사에서 이름도 불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소포니악 집정관’인 레이알렉시스 루이반으로 참석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라미엘의 법안과도 일맥상통했다.
“알렉스 집정관님의 파트너로 가게 될 노 아르망, 기대되네요.”
라미엘은 자신이 파트너로 참석한다는 것에도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기대된다고까지 한다. 리담의 반응을 생각해 보면 쿨하다 못해 한겨울 같다.
라미엘이 순순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며 레이가 작게 투덜거렸다.
“자기 걸 뺏어서 준다는 것도, 남자들한테 작위를 안 준다는 것도 아닌데 여자가 작위를 받는 게 뭐 어때서 그렇게들 난리일까요.”
레이의 말에 라미엘은 그가 생각하던 것들을 처음으로 내어 보였다.
“이건 내 추측이지만, 아마 겪어 보지 않은 일이라 상상도 못 하고 예측이 전혀 안 돼서 그런 것 같아요. 눈앞에 보이는 괴물보다 저 멀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더 무서운 것처럼.”
평생을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살았고 주변도 그렇게 살고 있으니 자신이 그 반대의 역할을 하게 될 거라고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 예측이 전혀 되지 않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 온전히 자신만이 쥐고 있는 것을 나눠야만 하는 데에서 오는 상실감.
언제까지나 혼자서만 차지하고 싶고, 썩어서 버릴지언정 절대 남과 나누고 싶지 않은데 그걸 모두 똑같이 나누자고 하자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법안 때문에 라미엘이 만났던 사람들의 속내가 저랬다. 법안을 반대하는 리담의 모두가 전부 다 저렇게 생각한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라미엘이 만났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저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특별한 이유나 논리 없이 여성 작위 승계에 대한 법안을 ‘그냥’ 싫어했다. 마냥 싫다고만 할 수 없으니 본인들 나름의 논리적인 답변을 찾아내는데, 그 말을 잘 들어 보면 결국은 나누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글도 모르는 여자들이 무슨 가문을 이끌어 갈 능력이 있겠냐며 비하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라엘은 겪어 보지 않았지만 두려워하지 않잖아요.”
레이의 질문에 라미엘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