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26화 (126/160)

126화. 휴일과 안건

“라엘은 겪어 보지 않았지만 두려워하지 않잖아요.”

레이의 말대로 라미엘은 여성 작위를 법안으로 내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이 만났던 남자들처럼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작위 받고 기세등등하게 나대는 여자를 어떻게 감당합니까?”

불현듯 어떤 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화를 내고 있지만 저런 말을 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자신감이 없었다. 목소리는 컸지만 말끝이 떨렸다. 감당을 못 한다고 하지만 실은 감당을 하고 말고의 선택권조차 없는 걸 두려워하는 게 아니었을까.

‘……반대의 상황.’

그들은 매번 선택을 하는 입장이었다. 작위를 가지고 있는 자신이 상대를 골랐다. 그런데 반대로 선택당하는 쪽이 되어 자신을 돌아보니 은연중에 깨닫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선택받을 수 있을까, 하고.

자신만이 오롯이 독점하고 휘두르던 권력이 상대에게도 갈 수 있다는 건 자신이 선택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을 의미한다.

라미엘은 비로소 그들의 두려움을 정확히 알아차렸다. 작위를 승계하지 못하는 건 기존에도 흔한 일이었으니 아무렇지 않지만, 작위를 가진 여성에게 선택당하지 못하는 상황은 두렵고 부끄러운 것이다.

“난 레이 당신이 내 지위와 상관없이 날 품어 줄 걸 아니까요.”

제가 쥐고 있는 것이 빠져나갈 일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쥐고 있는 게 어딘가로 빠져나간다고 해서 옆의 이 사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란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라엘은 이걸 어떻게 알았어요?”

정말 신기했다. 라미엘은 자신처럼 사상과 생각이 다른 곳에서 오랜 시간 살다 온 것도 아니고, 주변에 이런 걸 일깨워 줄 사람들이 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날카롭게 상황을 분석하고 새로운 사상을 열려 하고 있었다.

‘이 남자도 사실은 지구 어딘가에서 살다 온 거 아니야? ……그건 아니겠다. 저런 외모였다면 인터넷 없는 두메산골에서도 세계적인 스타가 됐을 사람이야.’

“레이 덕분에요. 당신이 내 세상을 더 단단하고 넓게 만들고 있어요.”

레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 사람이 곁에 없었다면 레이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을 볼 일도, 볼 수 있게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내가 뭐든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 리담 사회에 큰 변화를 줄 굵직한 줄기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한 지 오래다. 비단 아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레이가 말한 미래의 아이를 위해서도 달려야 했다.

순간 작게 바람이 불며 꽃잎이 휘날렸다. 그리고 허공에서 하얀 네 다리가 드러났다.

“푸둥?”

두 사람을 본 푸둥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마치 여기에 자신이 왜 와 있지, 하는 얼굴이더니 이내 방싯거리며 계단을 밟는 것처럼 허공을 내려왔다.

“이게 무슨 일이야. 라엘, 어떻게 푸둥이 하늘을……!”

맞다. 푸둥은 강아지가 아니었지.

갑작스레 하늘에서 나타난 반려동물 때문에 대화가 끊어졌다.

송아지보다 조금 더 큰 덩치의 하얀 짐승은 점차 작아지더니 이내 익숙한 크기가 되어 바닥에 누워 털을 비비고 두 사람에게 배를 보이며 생글생글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건 알겠는데 거대해진 푸둥을 처음 본 라미엘은 살짝 당황했다.

“언제 이렇게 자란 겁니까.”

푸둥이 자란 모습은 레이만 봤으니 놀랄 만도 했다.

“아, 라엘은 푸둥 본모습을 처음 보는 거죠? 얘가 모르는 사이에 많이 자랐더라고요.”

워크산에 가서는 본체로 놀다 왔던 모양이다. 보아하니 지금도 한창 실컷 놀다가 게이트를 잘못 건드려 여기로 온 듯했다. 그러니 자기도 놀란 표정이었겠지.

“어머, 라엘. 그런데 지금 얘 정체가…….”

“그림자 기사들을 물린 상태입니다. 지금 당신과 나밖에 없어요.”

레이와 푸엥 전용 공원 쪽으로 산책을 나설 때는 주변을 물리고 다녔다. 위험 요소가 거의 없기 때문에 굳이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어서였다.

조금 더 솔직하자면 레이가 사람이 없을 때 입 맞춰 주는 게 좋아서 안전이 확보된 곳은 웬만하면 뒤에 붙이는 것들을 떼어 내곤 했다.

“타이밍도 좋게 실수했네요. 요 녀석아, 그렇게 몸을 키우고 여기로 오면 어떡해.”

레이가 박박 긁듯이 쓰다듬어 주자 푸둥이 기분이 좋은지 그르렁 소리를 냈다.

“공원에 푸엥 있는데 거기로 가. 가서 같이 놀다 와. 날아서 가면 안 된다.”

푸둥이 바닥에서 일어나 몸을 바르르 떨어 풀을 떼어 내더니 꼬리를 살랑이며 공원으로 갔다.

“저런 것만 보면 누가 봐도 개인데.”

푸엥이 레이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듣다 보니 푸둥이 그러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루이반 사람들은 리담에서 가장 똑똑한 강아지 두 마리를 돌보는 중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레이는 이제 노 아르망 준비를 해야겠네요.”

“네. 앞으로 조금 바빠질 수도 있겠어요.”

그래도 당신 만나러 꼭 올 거니 걱정 말라며 레이가 라미엘을 꽉 껴안고 입술을 부딪쳤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그림자 기사들을 떼어 놓았다. 역시나 잘한 일이었다.

***

레이의 명을 받아 일을 처리하던 도베의 얼굴은 유독 생기가 넘쳐났다.

“좋은 일 있어? 요새 얼굴이 점점 좋아지네.”

레이의 말에 도베가 ‘앗, 정말요?’ 하더니 제 얼굴을 슥슥 문질렀다.

도베는 이번 휴일에 같은 부서 소속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이제 좀 일이 마무리됐다고, 겨우 한숨 돌리는 중이었다. 앞으로 노 아르망만 준비하면 된다고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도베 넌 얼굴이 폈다?”

그들은 소포니악 보좌관 파견 업무를 간 후 번쩍이는 도베의 낯을 보곤 보나 마나 그 작은 도시엔 일도 별로 없는 게 뻔하구나, 하며 부러워했다.

거기에 도베는 자랑을 덧붙였다.

“오늘 ‘휴일’이야.”

휴일의 개념조차 없던, 아마 휴일이 있었어도 긴급 출근을 했을 동기들은 도베의 말에 다들 입을 떡 벌렸다.

“우리 집정관님께서 시행하신 거야. 나뿐만 아니라 소포니악 전체가 다 그래.”

이 말에 소포니악으로 이사를 가고 싶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일이 한가한 것만 부러웠는데 공식적인 쉬는 날이 있다는 말에 다들 엄청나게 놀랐다.

확실히 휴일이란 게 있으니 업무를 할 때 피로도가 확 줄었다. 그만큼 일에 집중할 수 있었고, 업무 일수가 줄어든 만큼 그에 맞추려 업무 중에 허튼 일을 거의 안 하니 자연스레 일의 효율이 올랐다.

‘……신기하신 분이야.’

도베가 바로 옆에서 보면서 느낀 바는 파칸 직속으로 일을 하는 것과 레이와 일을 하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다.

소포니악이 작으니 빨리 일에 적응을 해서 잘하는 건가 했지만 이전 집정관인 필레의 기록을 보면 도시 크기는 문제가 아니었던 듯했다.

집정관이 여자라서 놀란 건 과거의 일이 되었고, 귀족에 대한 편견 같은 건 내다 버린 지 오래였다. 도베는 빠르게 업무를 익히고 도시를 관리해 나가는 레이를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휴일이 있으니 일할 때 기운이 더 나요. 집정관님께서는 이럴 줄 어찌 아셨습니까.”

비행기 타고 싶어서 쉬는 날도 없이 일했더니 효율이 떨어지고 사람 잡기 딱 좋겠더라고.

……라는 말을 적당히 요약했다.

“휴식 없이 일을 해 봤어.”

“아, 맞다. 킹크랩 사업하고 계시죠. 워낙 유명했으니 바쁘셨겠습니다.”

레이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킹크랩 광풍이 한창일 때 실제로 쉬지 않고 일했으니 아주 틀린 말이 아니기도 했고.

“사실 집정관께서 휴일을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이런 게 필요한지도 몰랐거든요.”

“그 필요성 잘 새겨서 주변에 홍보 많이 해 줘. 휴일은 리담 전체에 다 있어야 해. 그래서 난 노 아르망 회의에서 이걸 안건으로 올리려고.”

“관련 자료 준비하겠습니다.”

레이 역시 도베가 보좌관으로 뽑힌 이유를 납득했다. 일머리도 있고 일도 잘했다. 처음에는 일 처리 방식이 기존과 다른 탓에 조금 헤매더니 금방 적응하고 따랐다.

“8년 만에 드디어 헬라네요. 저 노 아르망은 처음이라 떨립니다.”

“도베, 벌써 초대받았니?”

노 아르망의 필수 참석 인원은 각 도시의 파칸과 집정관, 황실에서 오는 사람이다. 이외에는 참여자에게 초대를 받아야만 참석할 수 있었다. 보통은 자신의 가족들과 지인들을 초대했고, 특히 업무 회의를 진행하기에 보좌관은 거의 필수 초대 손님이었다.

지금 같은 경우는 파칸의 보좌관이 아닌 집정관의 보좌관이라는 특수 직책이긴 하지만, 그래도 보좌관이니 필수로 데려갈 것이라 생각하던 도베에게 레이의 질문은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예? 엇, 집정관님, 저 초대 안 하실 거예요?”

도베가 화들짝 놀라더니 서러운 얼굴로 물었다. 삽시간에 표정에서 심정이 드러나는 게 웃겨서 레이가 농담을 건넸다.

“초대장 줄까 말까 조금 고민했어. 처음 만났을 때 불손한 눈빛이 생각나서.”

“아, 아닙니다! 그땐 제가 정말 눈치가 없어서, 아니, 제가 멍청해서 몰라뵙고…….”

여자가 집정관일 줄 누가 알았을까. 리담 역사에 한 번도 없던 일이고 하다못해 집정관 후보로 여성이 거론된 적도 없었기에 그런 것이었다.

“자, 부모님이랑 여동생이 있다고 했지? 네 장 가져가.”

레이가 내미는 빳빳한 초대장에 도베의 얼굴이 활짝 폈다.

“초대장 없으면 못 들어오는 거 알지? 절대 이 사실, 잊어버리지 마. 도베 넌 초대장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입장 배지 나온다.”

“넵! 저 리담에 휴일 만들 수 있게 열심히 하겠습니다!”

도베의 의욕이 불타올랐다.

“아, 그리고 추가해야 할 안건 하나 더 있어.”

레이가 서류를 하나 펄럭이며 웃어 보였다. 도베는 직감적으로 저 건이 분명 휴일보다 더한 무언가라고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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