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27화 (127/160)

127화. 노 아르망 (1)

회의장은 대형 연회장 수준으로 넓었다.

이 거대한 공간 한가운데에 놓인 원형 테이블에는 여덟의 파칸이 앉았고 그 무대를 볼 수 있도록 계단처럼 단층이 있는 좌석에 각 소도시 집정관들이 자리했다. 집정관들만 50여 명이 넘기에 적지 않은 수가 모였음에도 회의였기 때문에 분위기는 차분하고 조용했다.

회의는 파칸들이 그간의 업무 보고를 하고 정보를 나누는 게 먼저였다. 이런 파칸의 도시 회의에 이틀 정도가 소요되고 이후 집정관까지 포함한 자율 의견을 나누는 토론식 회의에 이틀을 소비하는 방식이었다.

올해는 필레 일을 계기로 도시 전수 조사를 행한 헬라가 회의의 주역인 듯 조이먼의 주도로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확실히 전년보단 빡빡하네요. 회의 시간도 길고.”

연임한 집정관으로 벌써 여섯 번째 노 아르망에 참석한 델마가 말했다.

“원래는 이 정도가 아니었나요?”

레이의 질문에 델마가 보통 점심 전후로 끝이 나서 이후는 자유 시간이었다고 답했다. 이번엔 점심을 먹고 나서도 회의가 이어졌고 중간에 간식거리가 지급되기까지 했다.

“이런 경우는 저도 처음인데 이전에도 그리 많지는 않았던 걸로 알고 있어요.”

자주 참석을 해서인지 델마는 어색함이 전혀 없는 편안한 모습이었다.

“필레가 참 큰일을 했네요.”

레이가 움직이거나 말을 할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시선에서 자유로운 건 레이가 델마, 조이먼, 도베와 대화할 때뿐이었다.

레이는 노 아르망 회장에 입장하는 순간부터 고역이었다.

“손님께선 아직 회의장 입장이 어려우십니다.”

필수 참석자는 신상에 관한 정보가 미리 넘어가 있기에 이름을 말하면 들여보내 준다더니 막혔다. 여성 집정관이니 오죽 튀는 신상인데도 말이다.

게다가 필수 참석자는 회의장과 연회장으로 지정된 모든 장소를 이용할 수 있어 이를 표시하기 위해 백합 모양의 배지를 착용한다. 신상 정보를 못 외웠더라도 배지를 보면 정체를 알 수 있을 텐데도 초대장을 요구한다는 것은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라고밖에 해석할 길이 없다.

“……그대는 일을 제대로 안 하는 모양이군.”

“예?”

“파칸과 집정관에 대한 정보는 사전에 고지받았을 텐데. 아니면 이 표식이 보이질 않는 건가.”

회의장 문지기는 신상 정보를 대강 보고 넘겼었다. 왼쪽 가슴에 달린 배지만 확인하면 될 일이었기에 굳이 시간을 들여 외울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역대 노 아르망에서 초대장을 위조해 입장을 시도하는 일반인은 있었어도 관계자를 사칭하는 문제가 일어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안심했는데 이번엔 웬 여자가 대뜸 입장을 하려고 했다.

당연히 초대객이라 생각했는데 가슴에 달린 표식에 조금 당황하긴 했다. 그리고 여자가 저런 걸 달고 있으니 당연하게 위조거나 누군가가 잃어버린 배지를 주워 단 것 정도로 생각했다. 그래서 위협적으로 입장을 막았는데 여자의 반응이 영 냉했다.

“어라, 알렉스 아니십니까.”

그때 델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델마. 오랜만이에요.”

“소포니악에서 바로 오셨어요? 아니면 댁에서?”

“소포니악에서 왔어요.”

“그런 거면 같이 왔어도 됐을 뻔했습니다. 저도 라 헬라 관사에서 왔거든요.”

델마가 레이에게 허락을 받아 에스코트하며 회장으로 들어서려고 했다.

그 모습에 문지기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여자의 초대장이라도 확인해야 했는데 배지를 단 남자가 자연스레 여자를 이끌고 들어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델마. 잠시만요. 이 문지기가 제 신원을 의심해서 전 못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어요.”

레이가 델마를 저지하자 그가 의아한 얼굴로 문지기를 바라보았다.

“신상 숙지 안 했습니까? 문지기가? 다른 분이라면 기억 못 할 수도 있지만 한 번 보면 명단에서 절대 잊을 분이 아니신데. 소포니악 집정관이십니다.”

델마의 확인에 남자는 소스라칠 정도로 놀란 얼굴을 했다.

그 이후 도베가 도착했고 레이가 회장을 돌아다니며 자리를 잡을 때까지 만나는 사람들에게.

“회의는 외부인 출입 금지입니다. 부인께선 연회 때에나 이곳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라는 다채롭게 다져진 소리를 들어야 했다.

도베 역시도 회의 참가자라 배지를 달고 있었기에 벌어진 일일까. 사람들은 레이의 배지를 확인할 생각도 않고 당연한 것처럼 도베에게 저런 말을 했다.

문지기처럼 사전에 참가자 신상을 받는 게 아니니 모를 수도 있지만 그들의 편협한 시야는 레이의 배지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 예상을 못 했던 건 아니지만 스트레스가 조금씩 쌓이는 느낌을 지울 순 없었다.

“하아, 그냥 이마에 써 붙일까요. 내가 집정관이라고.”

레이에게 꽂히는 시선을 델마 역시 모르는 건 아니었다. 미리 사실을 알아서 놀라지 않을 뿐 어쩌면 자신도 저들과 같은 반응을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일이면 끝일 테니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아 주세요.”

델마가 위로를 건넸으나 왜인지 영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네. 그래야겠죠.”

어딘가 조금 찝찝한 기분으로 노 아르망의 첫날, 첫 회의가 지나갔다.

***

레이에 대한 시선은 어딘가에서 소포니악 집정관은 ‘임시’라는 이야기가 들린 후에야 진정이 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진정이 되었다기보다 믿을 수 없는 일을 발견하고 얼떨떨한 와중에 ‘야, 그거 가짜래.’ 하는 말을 듣고 난 후 ‘그럼 그렇지.’의 반응에 더 가까웠다. 하여 시선에서 자유로워졌지만 레이를 불편하게 하는 분위기는 여전했다.

파칸의 업무 보고 회의가 종료된 밤.

레이는 라미엘과 통화를 하며 그녀가 집정관이 된 이후 테가푸스의 회원이 더 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기운 내자.’

그들이 밖으로 나타나도 위협을 받지 않게, 라미엘의 법안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라도 겨우 이딴 분위기와 시선에 위축되고 주눅 들지 않을 것이다.

“……라엘. 보고 싶어요. 진짜 너무너무 당신이 보고 싶어요.”

귀빈들의 안전을 위해 노 아르망 장소에선 마력 사용이 금지되었다. 하여 건물 사방에 진을 그려서 마력을 억제하고 있기에 섣부르게 게이트를 열 수 없었다.

“당신 목소리라도 안 들었으면 나 미쳐 버렸을 거야.”

약한 마력을 일정한 파장으로 바꾸는 방식이라고 하더니, 통신기는 무사 통과였고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곳은 대륙 통일 전, 헬라 왕국일 때 왕실의 별장으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루이반 못지않은 화려하고 좋은 숙소에서 아주 오랜만에 혼자 침대에 누워 있는데 허전해서 잠도 안 왔다.

“라엘 목소리 들으면서 자고 싶은데.”

[무슨 이야길 할까요.]

뭐든 다 해 줄게, 같은 말투로 다정하게 레이를 감싸는 목소리다.

“아무거나, 당신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나에 대해선 레이가 모르는 게 없을 텐데.]

“……그러게. 난 이제 라엘 융털 개수까지 아는걸.”

나지막한 라미엘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레이는 그가 내는 자그마한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어제와 같은 밤이었다.

***

노 아르망 사흘째 아침.

집정관들 주도 회의에 참가하는 날이 되었다. 전력을 다해 준비한 휴일 안건을 들고 레이는 회의장으로 향했다.

집정관들이 안건을 내는 건 필수가 아니라 자율이었다. 의견이 있는 사람들은 거수해서 주제를 발표하고, 파칸 중에서 사회자를 한 명 선정해 그 주제들을 가지고 전체 회의 혹은 토론처럼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이었다.

보통 서너 가지의 주제가 나오는데 도시 전체가 나눠야 할 주제보다 소도시 자체적인 일을 주제로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해당 도시의 파칸과 집정관이 주로 이야기를 나누고 그에 대한 추가 의견으로 타 도시 파칸이나 집정관들이 첨언하는 방식이었다.

사회자로 뽑힌 빅터시안의 파칸이 개회를 명하고 자리를 잡는 것과 동시에 관련 자료들이 사람들에게 각각 배포되었다. 원활한 진행을 위해 자료를 읽을 시간을 주고 그 후 회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것 봐. 소포니악에서 뭘 낸 거야?”

“휴일? 아이의 날?”

올라온 세 개의 안건 중 단연 돋보이는 독특한 주제였다.

휴일과 아이의 날 지정.

레이는 관할 구역에 휴일을 선정했던 것처럼 뒤이어 아이의 날도 지정하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노 아르망에서 대대적으로 한 번에 알리는 편이 사람들이 인식하는 데 효과가 더 좋을 것 같아 지금으로 미뤄 둔 안건이었다.

이걸 노 아르망에 내기 위해 도베와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아이의 기준을 잡는 것부터 고난이었고, 정확한 수치를 내는 통계 기관이 없어서 회계사까지 동원해 셈을 했다.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의 필요성을 간만에 온몸으로 실감하던 순간이 레이의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샤샥 스쳐 지나갔다.

소포니악의 주제가 워낙 거창해 장기전이 예상되었기에 다른 두 개의 안건을 먼저 처리하고 남은 시간을 모두 소포니악 안건에 할애하겠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앞의 두 안건은 소도시 지역의 특산물 개발에 대한 이야기로, 이는 매년 등장하는 평범한 주제라고 했다. 노 아르망이라는 대회의에서 한 도시가 몇 년이나 너무 발언을 하지 않으면 놀러 왔냐는 소릴 들을까 봐 구색 맞추기용으로 내는 안건이라고 했다.

올해로 여섯 번째 노 아르망에 참가하는 델마 덕분에 이런 소소한 정보들을 접할 수 있었다.

“약간 아쉽네요.”

“뭐가요?”

“델마만 아니었으면 내가 최연소 집정관이라는 타이틀도 가져갈 수 있었는데. 델마가 열아홉에 되는 바람에 하나 놓쳤네요.”

“하하핫.”

실제 노 아르망엔 아무리 젊게 봐도 서른은 넘어 보이는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중에 열아홉에 당선된 델마는 어린 걸로 튀는 인물이었다.

집정관 연임까지 하며 6년의 시간을 보냈어도 스물다섯이다. 여전히 나이로는 그가 가장 어린 상태였다. 아마 올해 레이가 나타나기 전에는 델마가 시선을 꽤나 받았을 것이다. 지금도 비슷한 나이대의 두 사람이 조금만 이야기를 해도 시선이 몰려드는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 사이가 좋아 보입니다.”

델마 옆옆 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가 말을 걸었다. 유독 델마를 막내 취급하며 챙기던 스투라 집정관이었다. 델마에게 격 없이 친근하게 굴기에 레이는 처음에 그가 델마의 아버지나 친척인 줄 알았다.

둘을 지칭하면서도 남자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어서 레이가 대답을 했다.

“바로 옆 도시여서 제가 도움을 좀 받고 있습니다.”

“아아, 그러시구나. 근데 여긴 어떻게 오게 된 거예요?”

델마를 핑계로 레이에게 궁금한 걸 물어보려 했는지 그는 몸까지 틀어 가며 말을 붙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