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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29화 (129/160)

129화. 상상도 못 한 정체

“라엘!”

라미엘은 자신의 품 안으로 달려오는 레이를 양팔 벌려 맞이했다. 고작 사흘 만에 보는 건데도 그리웠던 이를 꼭 안아 올리자 레이가 그의 목을 껴안고 고개를 묻었다.

“잘 지냈어요? 나 없는 동안 잠은 어떻게 했어요? 식사 안 걸렀죠? 뭘 했길래 또 더 잘생겨져서 온 거지?”

다다닥 쏟아지는 질문 폭격에 라미엘이 활짝 웃었다.

“레이야말로 잘 지냈어요?”

“아뇨, 잘 못 지냈어요. 당신 없는데 어떻게 잘 지내.”

라미엘의 볼과 입술에 키스가 쏟아져 내렸다. 아내에게 잔뜩 사랑을 받고 나서야 라미엘은 레이를 땅에 내려놓았다.

“살 것 같다.”

레이가 다시 라미엘의 허리를 꼭 껴안으며 품에 기댔다. 평소 같으면서도 평소보다 어딘가 과한 환영의 기색을 보아 이곳에서 녹록지 않은 상황을 겪었다는 게 확실해졌다.

“무슨 일입니까.”

라미엘의 질문에 레이는 놀란 얼굴을 했다.

“어, 어떻게, 어떻게 알았어요?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평소와 똑같은 표정에 날 선 말도 안 했는데 라미엘은 바로 알아차렸다.

“레이가 평소랑 다르니까 알 수밖에 없네요.”

자기 자신조차도 평소와 같다고 생각했는데 라미엘은 단박에 눈치챘다. 어쩌면 이 남자는 어제저녁에 대화할 때부터 목소리만으로 짐작했을 수도 있다.

보고 싶다던 레이의 말에 그는 바로 스투라로 왔다.

초대 손님들도 참석하는 연회는 모레부터 시작이다. 일찍이 와 봤자 그가 머무를 수 있는 곳은 고작 손님용 숙소뿐이고, 연회도 시작되지 않았으니 할 일이라곤 레이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그런 것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바로 달려온 것이다.

[레이, 내가 갈게요.]

“네?”

[지금 바로 가면…….]

“잠깐만. 라엘, 지금이라고요?”

잠들기 전까지 라미엘의 목소리나 들으려고 했는데 잠이 확 깨는 소리였다.

“물론 당신이 당장 보고 싶긴 한데, 당신이라고 해도 아마 회의장엔 입장이 안 될 거예요.”

당신 마음이랑 목소리만 받겠노라고 라미엘을 말렸는데, 말렸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지금 여기 와 있다.

레이가 아주 살짝 내비친, 스스로가 드러낸 줄도 모른 불편을 읽어 내고선 아침이 밝자마자 처리해야 할 업무를 빠르게 끝내고 여기로 온 것이다.

[레이, 회의 끝나면 알려 줘요.]

레이는 저 한마디를 듣자마자 라미엘이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지지부진하던 회의가 끝나고 속이 터져서 저녁이고 뭐고 방으로 돌아가 일찍 잠이나 자려던 차였다. 레이는 단박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라엘, 당신 그동안 정말 힘들었겠다.”

이렇게도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뿐인데 라미엘은 오죽했을까.

“일이 있긴 있었군요.”

라미엘의 물음에 레이는 노 아르망 장소에 도착하고 오늘 하루까지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어렴풋이 예상했던 게 그대로 보인 것뿐이에요.”

매끄럽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입장부터 난관이었고 회의 분위기를 떠올리면 한숨이 나왔다.

“아, 라엘. 우리 여기서 이러지 말고 방으로 가요.”

밖에서 계속 서서 이러고 있을 순 없고,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적합한 장소는 아니었다. 레이는 라미엘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섰다.

“저건 누구지?”

“가까운 사이인 것 같은데, 남편인가?”

“설마 지금 아직 연회도 시작 안 했는데 남편을 부른 걸까요?”

“아무래도 여자 혼자 이 큰 회의를 하려니 남편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제멋대로의 추측으로 술렁이는 내부 분위기는 알 수 없지만, 멀리서도 시선은 느낄 수 있었다.

저들의 시선을 피해, 눈에 띄지 않게 옆문으로 조용히 들어가는데 라미엘의 번쩍이는 미모는 옆문이건 개집 문이건 쪽문이건 가릴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레이도 시선을 휩쓰는데 거기에 라미엘이 더해졌으니 말해 무엇 하랴. 다들 그녀 옆에 있는, ‘아내가 밖으로 돌아다니게 내버려 두는 정신 나간 남자’를 탐색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잠깐, 저분은 설마…….”

“혹시 눈동자가 금색인가요?”

“은발 금안에 키까지 큰 분이라면…….”

은발 금안을 가진 장신의 남자.

라미엘을 알아보지 못한, 정확히는 그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든 파칸들은 ‘누군가’를 연상케 하는 신체적 특징을 떠올리며 말끝을 흐렸다.

방으로 돌아간 파칸 셋을 제외하고, 집정관들과 조금 떨어져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누던 다섯 파칸은 지금 조이먼 한 명을 제외하고 전부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멍해져 있었다.

“루이반 공작이라고?”

“루이반 공작이 연회도 시작하기 전인데 여길?”

“게다가 옆에 있는 저 여자 소포니악 집정관 아냐? 왜 저렇게 공작의 팔짱을 끼고…….”

혼란스러워하는 그들과 달리, 유일하게 레이의 신분을 아는 조이먼만 멀쩡한 얼굴로 공작에게 인사를 할 준비를 했다.

대연회를 제외하고 파칸들은 귀족을 만나는 일이 드물었다. 자기 소속 도시를 돌봐야 하기에 수도에 갈 일도 없어, 귀족이지만 파칸들은 수도 귀족과는 별개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수도 귀족과 어울릴 일도 잘 없고 귀족 가문에 대해서만 아는 게 전부였다.

대연회를 대비해 얼굴을 익히고 가문을 알아 두지만, 그뿐이었다. 얼굴과 이름을 외우는 시종을 두면 되니, 웬만큼 대단한 귀족이 아닌 이상 제대로 기억을 못 했다. 지금 같은 경우는 대귀족인 루이반이 여기 있다고 믿을 수가 없는 것이었고.

조이먼이 성큼성큼 응접실을 벗어나 공작 부부에게 다가갔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께선 노 아르망에 오신 첫 손님이십니다.”

헬라는 수도와 워낙 가까운 생활권이라 수도 귀족과 어울리는 편이었다. 만약 타 도시처럼 거리가 있고 레이가 공작 부인인 것을 몰랐다면 조이먼 역시도 라미엘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조용히 지나가려고 했는데. 어림없는 일이었죠?”

레이의 질문에 조이먼이 웃으며 답했다.

“워낙 출중하시니 어디서든 빛이 나는 법이지요. 그런데 공작님까지 오셨으니 그 빛이 더 눈부시지 않겠습니까.”

뒤이어 그가 인사를 했다.

“헬라 파칸 조이먼 루보이즈입니다. 루이반 공작님을 뵙습니다.”

조이먼의 인사에 사람들은 낯선 남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지금 루이반이라고 한 거야?’

집정관들은 기함하고 파칸들은 남자의 정체가 확인되자마자 부리나케 조이먼의 뒤를 이어 라미엘에게 인사를 하러 나갔다.

파칸들이 사라지고 남아 있는 집정관 중 누군가가 물었다.

“그런데 소포니악 집정관은 루이반 공작하고 왜 저러고 있는 거야?”

대답해 줄 사람이 없기에 질문은 고스란히 허공에 흩어졌고, 집정관들은 루이반 공작과 파칸들의 대화를 들으려 애를 썼다.

“……이리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파칸들의 인사가 이어졌다. 라미엘은 연회 때 정식으로 인사하겠다며 파칸들의 인사를 대강 받아 넘기고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런데 이들은 도통 자리를 뜨려는 기색을 보이질 않았다. 헬라 파칸을 제외한 모두의 눈빛이 자신과 레이를 오가고 있었다.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으니 연회 때 제대로 인사를 하지.”

라미엘에게 거의 꺼지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그들은 쭈뼛거리며 길을 터 주었다. 이들은 지금 레이가 왜 자신과 친밀한 자세를 하고 있는지 영 모르는 눈치였다.

‘둔하군.’

루이반 부부가 은발과 흑발 한 쌍이라는 외적인 특징은 알고 있을 터이니 레이가 공작 부인이라고 짐작할 수 있음에도, 그들은 소포니악 집정관과 공작 부인이라는 타이틀이 한 사람의 몫이라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듯했다.

“실례할게요.”

레이가 인사를 하며 그들의 시선을 잘라 냈다. 라미엘은 아내에게 닿는 파칸들의 시선을 차단하려는 것처럼 살짝 몸을 틀어 레이의 어깨를 감싸 안고 제 몸에 꼭꼭 숨긴 뒤 자리를 벗어났다.

“무, 무슨, 뭐가 뭔지…….”

다들 조이먼을 보고 뻐끔거렸다. 너는 이 상황을 보고도 왜 그렇게 태연하냐는 뉘앙스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에 조이먼이 툭 답했다.

“보고도 모르십니까.”

“보고도 모르겠으니 이러는 거 아닙니까.”

“헬라 파칸은 뭔가 아시는 게지요?”

“루이반 공작이 왜 저분을…….”

“공작께서 서슴없이 친밀하게,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저리하실 수 있는 분이 누가 또 있겠습니까.”

이걸 꼭 말해 줘야 알겠냐, 하는 조이먼의 말에 다들 경악했다.

“그, 설마, 그럼, 그 저, 저 소포니악 집정관이……?”

“그렇습니다.”

“허업.”

어쩐지 회의 내내 헬라 파칸이 유독 침묵을 고수한다 했더니만!

작년 대연회 때 레이와 라미엘이 결혼을 한 상태였어도 이렇게 몰라보진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한 건 그 이후였고, 결혼식도 작위 수여와 동시에 약소하게 진행했으니 라비던에서 멀리 사는 파칸들에겐 레이의 존재가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파칸들은 공작 부인께 실례가 되는 일은 없었는지 급히 자신의 언행을 돌아보았다. 뒤늦게 레이의 정체를 알게 된 집정관들은 경악에 찬, 비명에 가까운 탄식을 내야 했다.

방으로 돌아온 레이는 별말이 없었다. 그저 라미엘을 꼭 껴안고 온전히 그의 몸에 자신을 맡겨 두고 있을 뿐이었다. 라미엘 역시도 레이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기다렸다.

차분하게 어르는 것 같은 라미엘의 손짓에 레이는 요란하게 술렁이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라미엘을 만나면 회의 중 이런 시선이, 이런 말들이 있었다고 푸념이나 늘어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징징댈 게 아닌 일이기에 그냥 삼키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가 회의장에 입장한 이후 한결같이 사람 불편하게 만들던 시선은 그녀가 ‘임시’였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한순간에 사라졌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럼 그렇지.’라는 것처럼.

제 앞에서 직접 말을 하지 않았다 뿐이지 저들이 무슨 소리를 주고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시선이나 분위기 그 외의 것들이 적나라하게 말을 하고 있었으니 모를 수가 없다.

제대로 된 회의 안건 하나 안 가지고 온 사람들이 자신이 달고 온 ‘임시’라는 명함을 보고 안건을 가볍게 치부했다. 그렇다면 ‘정식’인 자신들은 회의에서 대체 뭘 보여 주었나. 구색 갖추기로 특산품이나 내보였으면서 저를 우습게 생각했다.

‘내가 라미엘이었어도 그랬을까.’

아마 순수하게 대단하다고 찬사를 보냈을 것이다. 임시인데도 이런 안건을 가져오셨다며 박수를 쳤을지도 모른다. 루이반이라 그런 게 아니라 후작이나 백작 같은 지위가 있는 자였어도 좋다고 했겠지.

하다못해 ‘제대로 된’ 반대 의견이라도 나왔을 것이다. 공작과 공작 부인의 차이는 이만큼이나 크다.

“……내가 공작을 할 걸 그랬어.”

작위라도 있었다면 임시, 여자라는 상황이 조금 더 흐려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이 무슨 말을 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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