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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30화 (130/160)

130화. 오기

“그들이 무슨 말을 했습니까.”

“별말 안 했어요. 직접적으로 내게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니었고요. 그저…… 내가 정말 잘하는 걸 보여 주겠단 마음을 먹게 만들긴 했지만요.”

언제나처럼 반짝이는 눈동자에 단단한 의지가 보였다.

“레이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너무 애쓰려 하지 말고 적당히 해도 괜찮아요.”

“어떻게 그래요. 내 뒤에 당신 법안이랑 케이틀린 같은 사람들이 있는데. 나 잘 해내고 싶어요.”

첫 여성 집정관이라서, 법안을 위해서와 같은 이유가 없더라도 레이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을 사람이다.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 그랬다. 레이가 집정관이 되는 데에 찬성하고 지지하긴 했지만 라미엘 역시 이 정도로 그녀가 집정관과 잘 어울릴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레이가 수월히 잘 해낼 것이란 믿음은 있었지만 웬만큼 일 잘하는 지도자만큼만 해낼 줄로 알았다. 그런데 레이는 그 이상의 능력을 보이고 있었다. 도시의 생태를 파악하고, 휴일이라는 ‘제도’까지 생각해 올 정도로 탁월한 능력이었다.

사람들이 외지인인 레이를 위해 생업도 포기하고 먼 길을 달려오는 것만 봐도 그녀의 성정과 인품을 알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이 일까지 야무지게 잘하고 있으니 자신이 그 도시 사람들이어도 매달렸을 것이다.

그뿐인가, 레이가 여성 집정관으로 역할을 잘 완수하면 작위 법안에 긍정적인 도움을 줄 것도 알고 있었다.

능력을 최대한 열심히 발휘하면서 좋은 방향으로 달려가는 레이를 응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느 집정관만큼만 일해 주길 바라는 양가감정이 들었다.

레이를 도시와 나눠 갖지 않고, 이전처럼 온전히 그녀가 자신만을 품어 주길 바랐다. 마음속 깊은 곳에선 레이의 자리가 길어야 세 달짜리 임시였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슬며시 머리를 들었다.

‘여느 놈들이랑 다를 바 없군.’

손에 쥔 것들을 모조리 놓게 될까 봐 겁을 내고 작위를 반대하는 자들과 비슷한 마음이다. 다만 그가 나누고 싶지 않은 건 작위나 권력이 아니라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고 온전히 자신에게만 향하는 순수한 레이의 애정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내가 잘해야 ‘아, 여자도 잘 해내는구나.’ 하고 알려질 수 있잖아요. 그러면 내 다음 사람이 조금 더 수월하게 자리에 오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또 당신 법안을 공개적으로 찬성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을지 몰라요.”

“압니다. 다만 나는 당신이 조금 더 당신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걱정 마요. 나 강해요. 이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라미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걱정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고작 예상했던 일을 당했다고 의기소침해할 필요는 없었는데 괜히 신경 써서 라미엘까지 걱정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레이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

진짜, 너무, 엄청 낯설다.

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라미엘이 침대에 누워서 단정하게 입은 자신을 배웅하는 모습이라니.

노 아르망 마지막 회의 날 아침.

이왕지사 여기 온 김에 아무것도 하지 말고 무조건 푹 쉬라는 레이의 명에 라미엘은 간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침대 속에서 옷도 챙겨 입지 않은 채 누워 있었다. 항상 레이보다 먼저 일어나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있던 그였는데 반대의 상황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라엘, 당신 이런 심정이었구나.”

이걸 두고 일을 하러 가야 하다니. 절망도 이런 절망이 없다.

라미엘이 몸을 일으키자 덮여 있던 이불이 그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래된 흉터 위로 레이가 새로 박아 넣은 불긋불긋한 흔적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슬아슬하게 하체만 가린 채로 라미엘이 레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때려치울까. 오늘 회의.’

어차피 저들이 동의를 하든 말든 소포니악은 휴일을 시행하고 있는 중이고 아이의 날도 선포해 버릴 거니까.

“못 가겠다.”

레이가 다시 침대로 가서 라미엘에게 안겼다. 든든하고 너른 따뜻한 품에 절로 눈이 스르르 감긴다.

“레이, 안 갈 거예요?”

지분지분 입술로 레이의 귀를 건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라미엘이 묻는다. 귓가에서 바로 들리는 나른한 목소리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라엘이 이렇게 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가요. 차라리 그냥 계속 자 버리지. 당신 자는 틈에 나가, 아유, 그것도 안 되겠다.”

똑똑.

“집정관님, 도베입니다.”

자신을 찾는 도베의 목소리에 레이는 겨우 현실로 돌아왔다. 뭉그적거리며 라미엘을 못 떠나던 레이가 세상 느릿한 동작으로 일어섰다.

“얼른 올 테니까 요대로 있어요.”

라미엘의 웃음을 뒤로하며 레이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간신히 떼어 냈다.

“오셨습니까.”

레이가 등장하자 파칸을 비롯한 집정관들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사뭇 정중하고 조금은 두려워하는, 경외 섞인 눈이었다. 루이반이라는 이름이 가진 힘을 새삼 깨닫는 기분이었다.

레이가 가벼운 묵례로 인사를 받자 넙죽 굽실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회의 시작 직전에 왔기에 망정이지 괜히 일찍 왔다가 사람들이 하는 마음에도 없는 아부 소리나 들어 줄 뻔했다.

‘라엘 얼굴, 몸매 감상하느라 늦게 나오길 잘했네.’

라미엘이 잘생겨서 참 다행이었다.

레이가 자리에 앉자마자 사회자가 회의 시작을 알렸다.

“어제에 이어 같은 주제 진행하겠습니다.”

오늘은 또 얼마나 지지부진하게 쓸데없는 일에, 단어 하나에만 꽂혀 몇 시간을 물고 늘어질까. 반쯤은 포기한 심정으로 레이는 시큰둥한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느슨한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이 일을 루이반 공작 각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논의가 막 본격적으로 시작될 즈음, 누군가가 레이를 향해 물었다. 자신에게 질문이 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터라 레이는 방금 전 질문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답을 했다.

“공작께선 이미 공작령 전체에 휴일을 시행 중이시고 곧이어 아이의 날도 지정하실 예정입니다.”

대답을 하고 나니 이건 왜 묻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루이반이 뭘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아, 역시 루이반 공작께선 다르시군요.”

“그러게요. 이미 시행 중이시라니.”

“휴일은 공작님이 말씀하셨던 일이었군요.”

순식간에 자신의 공이 루이반의 이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 레이가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다들 회의 자료 안 읽으셨습니까? 공작님이 말씀하신 게 아니라 제가, 소포니악에서 먼저 시행한 일입니다. 공작께선 차후에 공작령에 적용하신 거고요.”

조금 날이 선 레이의 목소리에 다들 입을 다물고 자료를 다시금 뒤적거렸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자료를 제대로 못 봤나 봅니다.”

“공작령에서까지 시행하신다니 확실히 검증은 된 거군요.”

전과는 180도 달라진 상황에 레이는 계속 당황과 의아함을 잃지 못하다가 저들이 하나씩 내뱉는 말들을 들으며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종내는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본인의 실수를 바로 사과한다.

여태 자료로 검증하던 객관적인 사실을 부인하다가 루이반도 시행했다는 말에 실효성을 인정한다.

“공작 부인께선 어찌 이 사실을 아셨습니까.”

대강 존대하던 이들이 극진한 말투를 사용하며 어떻게든 칭찬을 못 해 안달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레이를 차갑게 만드는 한마디는.

‘공작 부인이라니.’

엄연히 집정관으로 참석한 사람에게 ‘공작 부인’이란 호칭을 붙인다는 점이었다.

“이미 루이반에서 검증을 마친 제도이니 우리도 해 볼 만합니다.”

공작 부인과 공작께서 생각하신 것이란 명분 아래 이야기가 착착 진행되었다.

“아이의 날은 어떻게 하죠? 루이반에선 아이를 어떻게 지정하셨는지.”

“1년 중에 쉬는 날 하나를 더 넣자는 거니까 일단 지정하고 후에 아이의 나이를 정하는 건 어떨까요.”

“그것도 좋겠습니다. 아이를 고려하자는 게 이날의 취지니까요.”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긍정적으로 휴일을 평가한다.

이견을 내는 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후 회의는 빠르게 수월히 진행됐다. 어제 걸린 시간의 절반도 되지 않아 황실 관할의 수도를 제외한 여덟 개 도시에 공식 휴일이 지정되었다.

아이의 날은 가장 좋은 계절을 찾자는 말에 각 도시의 기후를 고려해 어느 도시든 한창 날이 따뜻한 시기인 5월 말, 신력으로 새봄이 시작되는 날로 정했다.

“……이렇게 할 수 있었으면서.”

어제 하루 말꼬리만 잡으면서 지겹게도 물고 늘어지던 것들이 루이반이라는 이름 앞에서 일사천리였다.

자신이 이룬 일들이 루이반에 묻혔다. 제 업적이 루이반에 지워진 게 분하고 억울한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앞으로 얼마든지 자신이, 또 다른 여성들이 지워질 수 있다는 공포심 비슷한 감정이 밀려들어 왔다.

‘이제 알겠어.’

레이는 비로소 지난날 델마의 위로가 왜 위로 같지 않았었는지도 깨달았다.

“내일이면 끝일 테니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아 주세요.”

그는 왜 자신보고 참으라고 했을까.

자신을 편협한 시각으로 보고 있는 건 저들이었다. 저들에게 무례한 짓을 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피해를 보고 있는 자신에게 참으라고 했기 때문에 위로가 아니었던 것이다.

‘기죽을까 보냐.’

자신이 버텨야 다음 사람들이 지금보다 조금 더 편하게 이곳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오기가 생겼다.

회의가 끝나고 뒤풀이 겸해서 간소한 다과와 차가 회의장에 차려졌다.

“정말 좋은 생각을 하셨습니다.”

“아주 간만에 노 아르망에서 회의다운 회의를 한 것 같습니다.”

모두가 간만에 제대로 노 아르망에서 일을 해 본 것 같다며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간 얼마나 노 아르망이 연회로서의 기능에만 충실했는지 여실히 보이는 대목이었다.

따라서 뒤풀이 다과회가 열린 것도 오랜만이었다. 회의 후 목을 축이고 허기를 달랠 겸 차려진 다과상에서 가장 먼저 동이 나는 건 차였다. 사회자는 물론이거니와 적극적으로 토론을 한 사람들이 저마다 차부터 찾았다.

“차가운 차는 없나…….”

지금 레이에게 가장 간절한 건 아아였다. 얼음이 잔뜩 들어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마시고 얼음을 씹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다못해 시원한 차라도.

레이의 혼잣말을 들은 도베가 지나가던 메이드를 불러 물었다.

“혹시 주방에 얼음이 있어요?”

“아직 날이 덥지 않아 미처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따뜻한 차 말고 뜨겁지 않은 마실 건요?”

“시원한 음료는 연회용 샴페인뿐인데, 술 괜찮으신지요.”

도베가 이야기를 전해 듣고 바로 레이에게 고했다.

“집정관님, 시원한 샴페인 한잔, 어떠십니까?”

시원한 술 한잔이라니.

조이먼이 일을 잘하는 이로 골라 보냈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인 듯 도베는 이런 것까지도 눈치 빠르게 처리하고 있었다.

“아, 딱 좋네. 그거로 부탁해. 최대한 차갑게.”

“네,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 손에 술잔이 쥐어졌다. 마음 같아선 한 병을 통째로 달라고 하고 싶지만 자제하고, 받은 술을 한 번에 쭉 들이켰다.

“캬. 후, 속이 좀 뚫리는 것 같네.”

“벌써부터 드시기에 조금 이른 것 아닙니까.”

조이먼이 말을 걸며 다가왔다.

“시원한 게 이것뿐이라고 해서요. 도수가 낮은지 술 같지도 않네요.”

화통한 대답에 조이먼의 옆에 있던 세든이 말했다.

“라 헬라 집정관과 정반대시네요.”

“델마요?”

“저는 술을 못해서…….”

레이 근처에 있던 델마가 자연스레 합류했다.

“한 잔만 마셔도 온몸이 빨개지고 두 잔이면 만취해서 길바닥에서도 잘 수 있을 겁니다.”

조이먼이 대신 말을 해 주며 껄껄 웃자 델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거 제발 좀 잊으시면 안 됩니까.”

델마는 첫 노 아르망에서 최연소 당선자로 여기저기서 축하를 받았는데, 거절도 못 하고 술을 한 모금씩 마셨다가 한참 뒤에 회장 야외 정원 구석에서 자고 있는 게 발견되었다고 한다.

“라 헬라 집정관은 보기엔 쌓아 놓고 마셔도 멀쩡할 것 같은데 말이죠.”

건장한 체격과 다부진 외모와는 반전인 주량이었다. 델마의 주량을 주제로 세 사람이 가볍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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